월간참여사회 2018년 09월 2018-09-01   640

[환경] 폭염이 남긴 것

폭염이 남긴 것

 

희생자들은 누구인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위험사회론을 주창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기후변화 같은 생태 위기, 원전 사고, 대형 재난 등을 비롯해 근대화가 낳은 현대사회의 거대 위험은 계층이나 국경 따위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덮친다는 뜻이다. 지구와 인류 전체가 ‘위험 공동체’라는 하나의 운명으로 엮였다는 것. 벡의 이론은 산업화, 경제성장, 과학기술 발전 등의 깃발을 펄럭이며 직진으로만 내달려온 현대사회의 본질을 파헤친 날카로운 통찰이자, 그런 근대화 과정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 여겨진다. 한데, 위험이 꼭 민주적이기만 할까? 

 

우리는 올여름 사상 최악의 폭염 사태를 겪었다. 더위와 관련된 거의 모든 기록이 줄줄이 깨졌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북반구를 비롯한 지구촌 전체가 그랬다.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가공할 폭염으로 가장 큰 고통을 당한 이들은 누구인가? 폭염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은 누구인가? 폭염은 모든 사회 구성원을 차별 없이 강타한다. ‘민주적’이다. 불구덩이처럼 펄펄 끓는 가마솥더위가 힘들고 괴롭기는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누구나 폭염으로 쓰러지거나 병에 걸리거나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지난 8월 15일까지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모두 48명으로 집계됐다. 평소 한 해 평균 폭염 사망자의 4.5배로서 역대 최다 기록이다. 사망자를 포함한 온열질환자 수는 4,301명이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 7년 동안 발생한 온열질환자를 모두 합한 수의 절반에 달한다고 한다. 주목할 것은 폭염이라는 ‘불의 칼’에 희생당한 이들의 대다수가 홀몸 노인, 일용직 건설 노동자, 이주 노동자, 농민, 노숙자 등이었다는 점이다. 

 

에너지 빈곤층이란 말이 있다. 냉난방이나 취사 등에 필요한 에너지를 쓰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이 가구 소득의 10%가 넘는 저소득 가구를 가리킨다. 비용 부담 탓에 냉난방 기구를 사거나 가동하기 힘든 이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대개 국민기초생활 수급권자나 차상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에너지 빈곤층은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거의 10% 정도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폭염의 맹렬한 공격은 방어 수단이 없거나 취약한 이들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집중됐다.

 

사람만이 아니다. 570만 마리가 넘는 가축이 더위를 이기지 못해 떼죽음을 당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동물은 절대적 약자다. 밀집사육으로 상징되는 산업화된 공장식 축산업 시스템에서 철저하게 ‘물건’으로만 취급되는 동물들은 더욱 그러하다. 이들에게 올여름은 그야말로 ‘불지옥’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폭염은 가난하고 힘없는 생명들을 가장 먼저, 가장 집중적으로 고꾸라뜨렸다. 

 

그러므로 폭염은 단순한 자연재난이 아니다. 불평등이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재난이다. 자연 현상을 인간 세상에서 참사와 재앙으로 바꾸는 핵심요소가 바로 불평등이라는 사실을, 올여름의 폭염은 날것으로 증언한다. 누군가 집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누군가 생존의 벼랑에 내몰려 극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하며 일하다 죽어가는 것을 한낱 개인의 불행으로 돌려도 될까? 우리는 이것을 ‘사회적 실패’ 또는 ‘사회적 유기’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어느 책의 제목처럼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재난이 초래하는 대부분의 비극에는 ‘사회’가 아로새겨져 있다. 

 

월간 참여사회 2018년 9월호 (통권 258호)

 

자연의 문제? 인간과 사회의 문제!

폭염 대책과 관련해 흔히들 시카고 사례를 거론한다. 1995년 살인적인 폭염이 시카고를 덮쳤다. 무려 700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정부 당국과 대학 등이 나서서 희생자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폭염 간의 관계를 면밀히 조사했다. 그 결과 빈곤 정도, 인종, 나이 등이 폭염으로 인한 사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밝혀졌다. ‘사회적 고립’이 사망의 주요 원인이라는 점도 드러났다. 가난한 홀몸 노인, 폭염에도 집을 떠나지 않은 사람, 사회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 등이 이런 피해자였다. 시 당국은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대책 마련에 나섰다. 

 

4년 뒤인 1999년에 또다시 비슷한 폭염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이번엔 대응이 달랐다. 폭염이 시작되자 에어컨을 가동하는 쿨링센터를 지역 곳곳에 수십 군데나 설치했다. 취약계층을 비롯해 누구나 이곳에 쉽게 갈 수 있도록 무료 버스를 운행했다. 공무원과 경찰 등은 사망 위험이 높은 홀몸 노인이나 낡은 집에 사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상황을 확인하고 그에 걸맞은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4년 전과 비슷한 수준의 폭염이었음에도 사망자는 110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공적 시스템을 통해 ‘사회적 돌봄’이 이루어진 덕분이었다. 

 

자연 현상 자체를 막기는 어려워도 이것이 재난으로 번지는 건 막거나 줄일 수 있다. 시카고 사례는 정부가 재난에 대비하여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참고자료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정의, 공공성, 사회적 관계, 연대, 공동체 같은 것들이 생동하는 사회를 만드는 게 그것이다. 불평등을 줄이면 그만큼 재난은 줄어든다. 사회적 연대가 공고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살아 있고 공동체 움직임이 활발하면 고립과 배제가 일으키는 비극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사적 욕망, 적대적 경쟁, 냉혹한 이윤 추구 따위가 들끓는 곳은 그 자체로 재앙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지긋지긋했던 올여름 폭염은 자연의 문제란 곧 인간과 사회의 문제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글. 장성익 환경저술가

녹색 잡지 <환경과생명>, <녹색평론> 등의 편집주간을 지냈다. 지금은 독립적인 전업 저술가로 일한다. 환경 분야를 비롯해 다양한 주제로 책 집필, 출판 기획, 강연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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