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8년 12월 2018-12-02   919

[특집] 보수를 위한 제언

특집 4_가짜보수 진짜보수

보수를 위한 제언

 

글. 박권일 사회비평가

 

 

많은 사람들이 보수 재건의 중심에 자유한국당을 놓는다. 어쨌든 그 정당이 소위 ‘보수세력의 본류’임은 분명하므로, ‘보수를 위한 제언’이 현실적으로 ‘자유한국당을 위한 제언’이 되는 것은 꽤 자연스럽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도 ‘제대로 된 보수’가 필요하다 말한다. 그러면서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등이 탄핵과 촛불, 6.13 지방선거를 계기로 ‘합리적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 사회를 위해서도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보수를 위한 제언,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자유한국당은 지난 7월, 김병준 씨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삼고 10월엔 전원책 씨를 조직강화특위 위원으로 들여 “전례 없는 권한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전원책 위원의 첫 일성은 “욕을 먹더라도 칼자루가 있으니 할 일을 할 것이다”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위원은 “인적 쇄신이 무조건 사람을 쳐내는 건 아니”라며 슬쩍 물러나더니, 급기야 ‘태극기부대’와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분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가장 열렬한 지지그룹이므로 제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쏟아진 반응의 7할은 폭소였고 3할은 조롱이었다. 같은 보수 세력의 일원인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위원까지 나서 직격탄을 날렸다. “전원책 변호사는 태극기 부대도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엄호한다. 김병준 비대위원장까지 태극기 부대도 보수라고 규정한다. 태극기 부대는 보수가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죄가 없고 죄를 지을 수도 없다는, 즉 박통을 수령으로 모시는 개인숭배집단에 불과하다.” 전원책 씨의 ‘특별 활동’은 휴대폰 해촉 문자로 한 달 만에 끝나버렸다. “모실 땐 ‘십고초려’ 내칠 땐 ‘십초고려’”라는 비아냥과 함께 자유한국당의 경박함만 새삼 부각됐다.

 

사실 ‘보수를 위한 제언’의 정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10월 초 외부 기관에 ‘보수 재건을 위한 정책 제언’을 의뢰한 적이 있다. 이에 서울대 정치연구소가 <한국 보수정당의 위기와 재건> 보고서를 작성한다. 당은 같은 달 30일 의원총회를 열어 이 보고서를 공개했다. 여러 제언이 담겨있었지만 핵심은 명확했다. “중도·보수 우파들을 포용하는 정당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태극기부대’ 같은 극우세력과 같이 가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보고서는 보수 유권자의 분열 원인에 대해 “대북·안보전략에 반대되는 강경노선만을 고수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보수를 결집할 수 있는 합리적·온건적 보수 노선을 근본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고도 분석했다.

 

게다가 10월 8일 비대위 산하 ‘좌표와 가치 재정립 소위원회’가 발표한 <한국당의 반성·혁신·나아갈 길> 보고서를 보면, 자유한국당 스스로도 어떤 길을 가야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거기 나온 4대 가치는 “자유와 민주, 공정과 포용”이고, 4대 가치를 뒷받침하는 6대 혁신가치는 “국가도덕성, 정의로운 보수, 따뜻한 사회, 당당한 평화” 등이다. 하나같이 옳은 이야기다. 문제는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실천이 안 된다는 것이다.

 

보수정당, 아직 배가 덜 고프다?

실천이 안 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들이 있다.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아직 배가 덜 고프다는 것. “존립의 위기”니 “뼈를 깎는 반성”이니 호들갑을 떨어대지만, 자유한국당은 정말로 막다른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 2018년 11월 말 현재 정당 지지도는 20%를 상회❶하며, 반사이익이든 어쨌든 나날이 지지도가 오르는 추세다. 특히 당 중앙과 지도부를 보면, 오랜만에 시작한 ‘야당 놀이’를 신나게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 받는 건 지역조직들이며 실제 불만도 팽배하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버티고 버티다 보면 정권의 레임덕이 올 것이고 적어도 지금보다 상황은 나아질 것이다. 

 

둘째, 구조적 요인으로서 엘버트 허시먼이 말한 ‘비탄력적 고객’의 존재다. 허시먼은 정당을 경쟁시장의 기업과 대응시키고, 유권자를 합리적 소비자와 대응시킨 앤서니 다운스 류의 가설이 왜 현실에서 종종 작동하지 않는지를 분석한다. 호텔링-다운스 이론에서 갈 곳 없는 소비자, 즉 유권자는 그저 무기력하게 행동하지만, 허시먼에 따르면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적극적이고 과격한 항의를 통해 자신이 속한 정당에 압력을 행사한다.❷

 

소위 ‘태극기부대’는 허시먼이 말한 “갈 곳 없는 유권자”의 전형이다. 자유한국당이 반공주의적·극우주의적 세력 중 가장 막강한 권력집단이기 때문에, 이들은 좀처럼 다른 정당으로 이탈하지 않는다. 자유한국당이 설령 추악한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해도 자신들의 신념인 ‘빨갱이’ 혐오와 박정희·박근혜 숭배를 완전히 배신하지 않는 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 단지 더 강한 ‘빨갱이 탄압’과 더 강한 ‘박정희 숭배’를 요구할 뿐이다. 이런 비탄력적 고객의 항의에 맞서면서 변화를 꾀하려면 그만한 동기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자유한국당에 그 정도로 강한 추진력과 절박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보수의 재건보다 시급한 것은 낡은 정치 구조를 깨뜨리는 일

셋째 이유는 일종의 가정법이다. 만약 ‘보수의 재건’이 자유한국당의 실제 목표가 아니라면? 그럴 경우 자유한국당의 현재 행위가 더욱 매끈하게 설명될 수 있다. 만약 집권여당을 진지하게 도모한다면 ‘집토끼(지지자)’ 뿐 아니라 ‘들토끼(부동층)’와 일부 ‘산토끼(타정당 지지자)’까지 설득할 논리와 가치가 중요해지며, 이때 ‘보수의 재건’은 진지한 목표가 된다. 그러나 ‘보수 재건’이 명목상 목표일뿐이고 실제 목표가 단지 ‘생존’과 ‘여력 보존’ 정도라면, 대응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 경우엔 충성도 높은 지지자들, 행동력 강한 극렬 지지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게 중요해진다. 그들만 결집해줘도 20~30%대 지지율이 굳건히 유지되기 때문에 굳이 부동층 시민을 설득하려고 애쓸 이유가 없다. 

 

월간참여사회 2018년 12월호(통권 261호)

 

보수에 대한 제언도 좋지만, ‘제대로 된 보수’ 같은 정치적 플라톤주의의 쓸모를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이들이 그런 이야기를 당위로 전제하지만, 그 당위는 여러모로 미심쩍다. ‘제대로 된 보수’는 ‘제대로 된 진보’만큼이나 모호한 관념이다. 영국 보수당이나 독일 기민당을 모델로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그 나라들의 발전경로와 한국의 그것은 전혀 다르다. 설령 ‘한국형 합리적 보수’라는 관념을 인위적으로 설정한다 해도, 지금의 제도적·문화적 조건 속에서 자유한국당 및 주변세력이 이를 실현해야 할 동기와 필연성은 크지 않다. 

 

현재의 정치구조는 결국 제반 사회적 조건, 유권자의 지향들이 정당정치와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며 형성된 것이다. 어떤 이상적 보수(주의)를 상정하고 모종의 당위를 제안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 같은 낡은 정치 기득권 구조에 작은 균열이라도 낼 사회전략을 고민하는 일 아닐까?  

 


❶ 2018.11.19.-23. CBS-리얼미터 조사(전국 유권자 2,505명,  95% 신뢰수준, 표본오차 ±2.0%p). 더불어민주당 지지도 39.2%, 자유한국당 22.9%, 정의당 8.8%.

❷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앨버트 O. 허시먼, 강명구 옮김, 나무연필, 2016, 131-147쪽

 

 


특집. 가짜보수 진짜보수 2018년 12월호 월간참여사회 

1. 대한민국에서 보수는 누구인가 김민하

2. 진보·보수의 오남용 고승우

3. 영국 보수당은 지금 안병억

4. 보수를 위한 제언 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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