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1월 2010-11-01   1484

전태일 40주기-어려운 사람을 향한 사랑, 배려 그리고 연대

어려운 사람을 향한 사랑, 배려, 그리고 연대

손형지 『참여사회』 객원기자

청명했던 10월의 어느 오후, 이름 모를 전태일‘들’이 생계를 위해 그들의 청춘을 바쳐 일할 수밖에 없었던 평화시장을 찾았다. 평화시장의 모습도, 시장 주변의 풍경도 낡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4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청계천변을 따라가다 보면 을지로6가에 이르러 긴 3층 건물이 보인다. 평화시장이다. 시장 앞은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자칫 한눈을 팔았다가는 일행을 놓치고 만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니 의외로 한산한 편이었다. 40년 전 전국 기성복 수요의 약 70%를 충족시킬 정도로 번성했다던 평화시장도, 이제는 근근이 장사를 꾸려가고 있다고 한다.

  평화시장이 한창 번성했던 1970년, 당시 이곳은 영세한 규모의 공장들(2, 3층)과 점포들(1층)로 구성되어 있었다. 햇빛도 안 드는 좁은 공장에는 1만 여명의 노동자―재단사, 미싱사, 재단보조, 미싱보조, 시다 등―가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들 중 일종의 견습공에 해당하는 시다의 대부분은 스무 살도 채 안 된 앳된 소녀들이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고 기분이 우울했던 청년 전태일, 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 평화시장의 어린 소녀들―즉, 시다들―이었다.

  시다들이 일했다는 악명 높은 ‘다락’은 이제 없어졌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어디에 있는 걸까. 40년 전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스스로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내려갔다던 계단으로 갔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에서 쉬고 있던 한 아주머니가 묻는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 이 계단은 40년 전에 전태일 열사가 이곳에서 일하던 어린 시다들과 힘겹게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 분신했던…….”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다른 곳을 보는 아주머니. 대답에 대한 답을 미처 듣지 못한 채 평화시장을 나온다.

잊혀선 안 될 이름을 위해 – ‘전태일 다리’

평화시장 바로 앞에는 다리가 있다. 다리 위에는 동상이 하나 서 있고 다리 주변 도보에는 네모난 동판들이 빼곡히 깔려있다. 동상과 동판이 기념하는 인물은 바로 전태일. 그래서 공식 명칭은 아니지만 이 일대는 일명 ‘전태일 거리’로 불리고 있다.

  평화시장 앞의 다리, 종로구 대학천남길과 중구 을지로6가를 잇는 이 다리의 공식 명칭은 ‘버들다리’이다. 2004년 서울시가 시민 공모와 각종 의견 수렴을 통해 결정한 이름이다. 그러나 최근 버들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바꾸자는 캠페인이 진행 중이다. 전태일과 관련된 역사적 현장인 평화시장이 바로 근처에 있으며, 이를 고려한 시민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태일 40주기 행사위원회’ 등이 주축이 되어 전태일이 태어난 8월 26일부터 분신한 11월 13일까지, 80일 동안 매일 8명이 참여하여 다리의 개명을 요구하는 범국민 캠페인 ‘808 행동’ 1인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거부하던 서울시가 최근 명칭 병행 표기를 제안했고, 10월 중 이 안건이 서울시 지명위원회에 상정될 예정이다. 이를 통과하면 국가지명위원회에 상정되게 되고, 여기에서도 안건이 통과되면 비로소 공식 명칭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과정을 거쳐 표기가 시행되면, ‘전태일 다리’는 개인 이름을 교량 명칭으로 붙인 서울시의 첫 사례가 된다.

  다리 위에는 전태일 동상이 있다. 2005년 전태일 35주기를 기념하여 설립된 동상이다. 현재 동상 앞에는 ‘아름다운청년 전태일 40주기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노래를 하고 있는 사람들과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다리 주변 도보에는 전태일을 기념하는 동판들이 있다. 마모되어 가는 동판의 활자를 보고 있는데, 다리를 지나가던 아버지와 어린 딸이 동상 앞에 선다. 동상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묻는 딸에게 아버지가 설명하기 시작한다.

  “응, 전태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야…….”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을 울리는 전태일 정신

전태일과 ‘바보회’ 동지들이 들르곤 했다던 명보다방으로 올라갔다. 이제는 명보커피숍으로 간판이 바뀐 그 낡고 오래된 다방에서,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을 만났다. 박계현 사무총장은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전태일 정신에 대해 말했다. “집에 돌아갈 차비를 털어 점심을 굶은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밤늦게 평화시장부터 쌍문동까지 두 시간을 걸어 귀가하던 마음, 즉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향한 구체적이고도 극진한 사랑, 배려, 그리고 연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도 통금이 있던 시절, 밤 12시가 되면 야경꾼에게 잡혀 파출소 신세를 지기도 하면서 말이다. 밤이슬을 맞으며 걷던 전태일은 그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런 마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돌아가는 길, 어느덧 이 도시에도 어스름이 내리고 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전태일에 대해 생각한다. 오늘날 전태일은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흐릿해져가는지도 모른다. 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전태일이 내려갔던 계단에는 이제 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그를 기념하는 동판의 활자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전태일 40주기를 기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직 이 사회에는 힘겹게 살아가는 수많은 전태일‘들’이 있다. 전태일 정신이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사랑, 배려, 그리고 연대’라면, 그것은 특정 시대·특정 계급의 전유물일 수 없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전태일 정신은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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