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1월 2010-11-01   1226

어느 날 문득, 영화 한 편-늦가을 오지 않는 사람

晩秋

 


조광희
변호사

오전 재판을 마치고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김해공항은 아직 더웠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제공하는 행사 차량을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광안대교를 건너면서 차창 밖으로 바라본 해안에는 마천루의 숲이 전보다 우거져 보였다. ‘저 중의 하나가 얼마 전 화재가 난 곳이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호텔에 도착한 나는 스마트폰을 통해 트위터에 접속했다. 트윗들을 훑어보던 나는 한순간 멈칫하며 내 눈을 의심했다. 영화 잡지 〈씨네21〉의 강 모 기자가 중국 여배우 탕웨이를 조금 전에 인터뷰하고 악수를 한 후 헤어졌다는 내용이었다. 탕웨이라면 〈색, 계〉의 여주인공이 아닌가. 본래 여배우들에게 (아마도 국민 평균보다는) 관심이 적은 편이지만, 탕웨이에게는 어떻게 된 일인지 관심을 접기가 어려웠다. 〈색, 계〉의 적나라한 장면들 때문인지, 아니면 탁월한 연기력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내 무의식을 조금만 심문해보면 금방 탄로 날 사실을 속이지 말자. 적나라한 장면 때문이다. 그 탕웨이가 부산에 왔구나.

“탕웨이와 악수한 손을 내 뺨에 비볐다”

체크인을 하고 배가 출출하여 호텔 근처에서 막국수를 먹는데, 영화사 ‘봄’의 오 이사와 우연히 마주쳤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탕웨이가 부산에 왔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외국 영화인들과 교류가 많은 오 이사는 어제 장이모우 감독, 탕웨이와 함께 술을 마셨다며 오늘 또 만날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나는 그때 비로소, 탕웨이가 필름이 사라져서 이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리메이크한 같은 제목의 영화에 출연했고, 그 영화 때문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출자는 김태용 감독, 상대 배우는 현빈이었다. 오 이사에게 혹시 만나게 되면 반드시 내게 연락을 달라고 당부를 하고 초초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탕웨이는 인터뷰 직후 부산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실의에 빠진 나는 ‘꿩 대신 닭’이라는 생각으로 〈씨네21〉이 부산국제영화제 취재를 위해 임시로 사용하는 사무실에 들렀다. 거기서 기사 마감에 여념이 없는 강 기자를 발견한 나는 탕웨이와 악수했다는 손을 낚아채서 내 뺨에 비볐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낮이 ‘영화의 바다’라면, 밤은 ‘술의 향연’이다. 해운대 거리와 주점 곳곳에서 술판이 벌어지면, 영화 관계자들은 어느 자리가 더 재미있을까 저울질을 하며 새벽녘까지 이 술집 저 술집을 떠돌아다닌다. 그렇게 며칠째 술자리를 전전하다 보면, 비로소 죄의식이 발동하여(또는 초청 받은 사람이 얼마나 영화를 예매하고 보았는가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영화제 측에서 관리한다는 소문도 있어) 영화 상영 스케줄을 뒤적거리게 된다. 영화제는 보통 목요일에 개막을 하고 다음 주 금요일까지 진행된다. 개막 당일과 주말에는 야단법석이지만, 막상 주말이 지나고 나면 사람들이 하나 둘 부산을 떠나기 시작하여 해운대가 한적해진다. 월요일에 간단한 업무를 처리하고 화요일 오후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려던 나는 화요일 오후 5시에 〈만추〉가 상영된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이 영화라도 보고 떠나야 마음이 진정될 것임을 깨달았다.

가장 늦은 시간대인 저녁 9시로 비행기 예약을 미루어 놓고, 영화가 시작하는 5시를 기다리자니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었다. 해운대 백사장을 이리저리 걸어도 보고, 찻집에 들어가 카페모카를 마셔도 보지만 5시는 아직 멀기만 하다. 문득 해운대 한쪽 끝에 있는 미포에 오륙도행 유람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낸 나는 점심을 먹은 후 배에 올랐다. 역시 호수든 강이든 바다든 물에 접한 도시에서는 유람선을 타주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1,000원을 줘 새우깡을 사들고 배 한구석에 앉아 졸다 보니 어느새 오륙도다. 느릿느릿한 세월을 수십 년간 반복해 살아온 듯한 선장의 설명이 이어지면서 배는 오륙도를 돌아 다시 미포 선착장으로 향한다. 설마 이런 것으로 갈매기를 유혹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선미로 가서 새우깡을 공중에 던지기 무섭게 갈매기들이 몰려든다. 밸도 없다. 인간이 던져주는 음식을 먹고사는 삶이 아니라 ‘비행이라는 꿈’을 위해 몸을 던지는 ‘갈매기 조나단’은 역시 소설에서나 볼 수 있을 뿐. 배에서 내려 바닷가 벤치에 노숙자처럼 누워본다. 그렇게 잠시 가을의 정취를 느끼다 보니 어느덧 탕웨이를 만나야 할 시간이다.

만나야 한다. 만나서는 안된다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미국의 교도소에 몇 년째 복역 중이던 중국인 애나(탕웨이)는 어머니가 사망하자 장례식을 위해서 72시간 동안 석방된다. 무표정하게 시애틀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애나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성들을 시중드는 이상한 직업을 가진 한국인 청년 훈(현빈)과 우연히 마주친다. 자유를 낯설어 하는 애나는 두서없는 삶을 살아가는 옆자리의 훈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가족들에게 돌아왔지만 애나의 감정과 동떨어진 채 진행되는 가족들의 애도는 어쩐지 남 일 같다. 그렇게 짧고 어색한 자유를 보내던 애나는 훈과 다시 마주치고, 그들은 시애틀의 유원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어머니 장례식 뒤에 이어진 소란.

그 과정에서 느끼는 지난 세월에 대한 애나의 비통함과 애절한 울음.

그런데 그 감정에 유일하게 교감하는 사람은 뜻밖에도 이방인인 훈이다. 짧은 자유와 감정적 사치를 내려놓고 이제 애나는 교도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인데, 이상한 감정은 애나를 놓지 않는다. 교도소로 돌아가는 길의 안개 낀 휴게소에서 두 연인은 길고 깊은 입맞춤을 하고, 갑작스런 이별이 다가온다.

다시 세월은 흐른다.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애나.

애나는 석방되는 날 만나자던 훈의 말을 기억하고 그 휴게소의 커피숍에서 그를 한없이 기다린다.
원작이 있었고 여러 차례 리메이크가 있었지만, 나는 훈이 과연 나타날지, 나타나지 않을지를 알 수 없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가끔 그런 순간들이 있다. ‘주인공의 정서와 동일시된 내 감정이 요구하는 바’와 ‘그 요구가 배반되어야만 예술이 된다’라는 딜레마에 빠지는 순간들. 그들은 어찌되는가.

만난다. 만나지 못한다.
만나야 한다. 만나서는 안 된다.
언젠가는 만난다.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잊는다. 잊지 못한다.
모두 사라진다. 사랑도. 기억도. 아니 그렇지 않다.

“사랑하기보다 추억하기 좋은 시간”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음악은 계속 이어지고, 나는 늦가을에 피어난 두 사람의 짧은 인연을 생각하며 어두운 좌석에 계속 앉아 있다. 불이 켜지자 나는 영화 속 몽환적인 안개에 휩싸인 듯 흐느적거리며 극장에서 호텔로 돌아간다. 차는 필름을 거꾸로 돌린 듯 호텔에서 다시 공항으로 달린다. 차가 화려한 광안대교를 건널 때 나는 의상이 부실했던 〈색, 계〉의 탕웨이를 잊고, 무거운 코트를 입은 〈만추〉의 탕웨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늦가을의 대기가 서서히 가라앉을 때 나도 모르게 떠올려 본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과 헤어졌던 사람들 그리고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이제 어떤 사람은 이름을 잊었고, 어떤 사람은 얼굴도 잊었으며, 어떤 사람은 만났는지조차 희미하다.

  사랑하기보다는 추억하기에 좋은 시간, 늦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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