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5년 11월 2015-11-02   1290

[만남] B급 호러(horror) 인터뷰 – 이성원 회원

 

B급 호러(horror) 인터뷰

이성원 회원

 

 

글.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사진. 이영미

 

‘B급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오자 인터뷰 자리는 금세 뜨겁게 타올랐다. 
저예산 영화? 공포영화? 덜 알려진 영화? 단순히 질이 떨어지는 영화? 그러자 그가 말했다.
“예전에 극장에서 동시상영이라고 한 편 값으로 영화 2편을 보여 준 적이 있어요. 그 때 두 번째로 상영되던 영화, 그게 바로 B급 영화라 할 수 있죠.”
듣고 있던 이들이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아~ 맞다! 아주 명쾌한 설명이에요.” 
동시상영과 B급 영화, 오래된 기억들을 소환하는 이름. 기억 속에 주윤발이 환하게 웃고 있는 건 이해가 가는데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란 제목은 왜 그렇게 선명하게…. 쿨럭~.
동시상영과 동네영화관에 대한 숱한 추억은 잠시 접고 지금은 ‘고약한 취미bad taste’를 지닌 한 남자를 만나야 할 시간이다. 

 

참여사회 2015년 11월호 (통권 228호)

어, 문구점 사장님이라고 했는데?
문구점 사장님이시라고 하던데 문구점 이름이 뭔가요?
“문구점 사장 아닌데요. 참여연대 정보력에 문제가 좀 있는 듯하네요. 하하하.”
참여연대가 철저해 보여도 사실은 이렇게 어설픈 구석이 많답니다. 그게 또 매력이죠, 하하하. 내자 지금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한때 문구유통업을 했었죠. 서점을 오래 하시던 아버지가 IMF 때 사정이 어려워지자 사업을 문구유통 쪽으로 바꾸셨어요. 그때 저보고 도와달라고 하셔서 그렇게 자영업자가 되었죠. 지금은 그마저도 그만 두고 ‘전국문구점살리기연합회’에서 상근자로 일하고 있어요.”
문구점 사장님과 관련한 질문들이 줄줄이 펑크 나도 내겐 ‘인터뷰 3년’의 내공이 있지 않던가. 눈은 질문지를 LTE급으로 훑어 내리면서도 입은 그새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전국문구점살리기연합회’는 어떤 곳인지 설명 좀 부탁드려요.
“2012년에 학습준비물제도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의도에서 시작한 직능단체예요. 문구점 자영업자의 90%가 학습준비물제도 때문에 장사가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학생들이 문구점에서 사야할 물건을 학교에서 나누어주니까요. 이걸 해결해보려고 단체를 만들고 정치권 인사들을 만나기 시작했죠. 그렇다고 학습준비물제도를 없애자는 건 아니에요.”
그들은 반대로 학습준비물제도를 더욱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현행 입찰제도는 입찰을 전문적으로 하는 큰 업체로만 이익이 돌아가므로 학습준비물을 골목상권에서, 학교 옆의 작은 문구점들을 통해 구매해달라고 요청했다. 
“저희가 생각하는 경제민주화란 그런 것이니까요, 거대 담론 같은 게 아니라.”

그러나 국회에서 야당인사에게 들었던 답변은 그야말로 ‘식스센스급 반전’이었다. 
“그 사람들의 말이 너무 기막힌 거예요. ‘경제민주화? 안 되는 것을 왜 계속 주장하나? 국회의원들이 자영업자들을 만나는 이유는 낮에 직장인들은 다 출근하니 사진 찍기 좋은 곳이 골목상권 밖에 없어서다’ 이러더군요. 서러움에 많이 울었어요. 그때 아는 선배가 참여연대에 한번 찾아가보라고 했어요. 민생희망본부 안진걸 처장을 만나 저희 입장에 대해 설명하니까 딱 3초 만에 ‘저희랑 같이 하시죠’하면서 제 손을 잡더라고요.”
그렇게 감동어린(?) 참여연대와의 만남 이후 단체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참여연대와 함께 경제민주화 정책들을 검토하다 보니 대부분의 골목상권들이 대기업과 각을 세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것은 문구업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사해 보니 대형마트 3사의 매출이 2,500억 이더군요. 문구업계 전체 매출 5,000억 중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었던 거죠. 학습준비물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 거죠.”

 

    ‘을’들의 전쟁
“그때부터 문구류를 중소기업적합업종으로 신청하고 대형마트와의 싸움을 시작했어요. 근데 아직도 문구점 자영업자들은 자기들이 왜 이렇게 죽어나가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고 있어요.”
문구점 주인들의 대다수가 상황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면 ‘전국문구점살리기연합회’의 활동이 좀 저조한 거 아닌가요? 
“맞아요. 맘 같아선 저희도 회원사들 수를 팍팍 늘리고 싶어요. 회비도 받고 싶고. 근데 동네 문구점 하루 매출이 많아야 7만 원, 적은 데는 3만 원이에요. 하루 순수익이 만 원밖에 안 되는 곳이 허다하죠. 그래서 서울시교육청하고 협의하면서 학습준비물 예산을 늘려달라고 했어요. 학생 1인당 학습준비물 예산이 1년에 3만원이니 한 달에 3천원 꼴도 안돼요. 이러니 실험실습 자체를 안 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죠. 예산부족으로 학교에서는 딱 3만 원어치만 교육하는 실정인데 학부모들이 이런 현실을 모른다는 게 답답하죠.”

서울시교육청하고 협의 끝에 준비물 예산은 실험실습에만 쓰고 일반학용품들은 학생들 각자가 구입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골목상권에는 아무 효과가 없는 거예요. 학부모들이 학용품을 대형마트에서 구입하고 있단 걸 미처 몰랐던 거죠. 결국 핵심문제는 대기업의 시장침탈에 있었어요.”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동네의 작은 문구점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빈틈엔 덩치 큰 프랜차이즈 사무용품점들이 들어섰다. 소매점들이 줄어들자 판로가 막힌 도매업자들도 자체적으로 매장을 냈다. 싼 가격을 앞세운 도매업체들의 매장은 그나마 남아있던 영세문구점들의 몫마저 빼앗았다. 대기업의 탐욕이 불러일으킨 악순환의 전말은 이렇다.
“지금은 대형마트가 더 편리하겠지만 그러다 동네 문구점들이 모두 사라지면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이 입게 돼요. 아침에 느닷없이 준비물 필요할 때 이용할 동네 문구점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동네에 문구점이 없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 둔 학부모 입장에겐 또 하나의 호러무비다. 

그래서 성과는 있었나요?
“성과도 꽤 있었죠. 문구류가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되었고, 대형마트들과도 협상이 이루어졌어요. 이제 대형마트에선 20개 정도의 물품은 낱개로 판매할 수 없고, 학용품 구매가 몰리는 신학기엔 할인행사 또한 자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동네 문구점들의 사정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세상에 알린 것과 동네문구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죠.”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집 근처 문구점들의 간판이 하나씩 머리를 스쳐갔다. 알파문구, 드림디포, 아이꿈터…. 그러나 정작 동네의 한 초등학교 옆 문방구 두 곳은 이름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먼지를 잔뜩 쓰고 길가에 나앉아 있던, 볼품없이 알록달록하기만 한 학용품들 몇 개가 떠오를 뿐…. 내 기억의 초라함은 그대로 그들의 현실이었다. 

 

참여사회 2015년 11월호 (통권 228호)참여사회 2015년 11월호 (통권 228호)

프랜차이즈 문구업체와 대형마트에 의해 사라지는 동네 문구점(위)과 이들을 살리기 위한 을살리기국민본부의 활동(아래)

 

    ‘살리기’ 전문입니다
그는 ‘을살리기국민운동본부’에서도 상근자로 일한다. 그러고 보니 그의 전문분야는 ‘살리기’다. 그러나 살리느라 바쁜 이가 있다는 건 누군가는 ‘죽이느라’ 바쁘다는 것. 우리네 삶은 이래저래 딱 B급 호러 무비 수준이다. 
“대선 패배 후 수많은 단체들이 희망을 잃었어요. 경제민주화는 정말 불가능하구나…. 저희 단체도 접으려 했는데 그때 남양유업 사태가 터지고 편의점 점주들의 자살이 잇달았어요. 그러자 ‘전국유통상인연합회’에서 힘을 규합하자고 연락이 왔죠. 그렇게 참담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게 ‘을살리기국민운동본부’예요.”

갑을 관계의 피해당사자들이 모인 ‘을살리기국민운동본부’는 업종 구성 또한 무척 다양했다. 편의점으로 대변되는 각종 가맹점들, 식자재도매업 대리점, 식음료유통업체, 대리운전기사, 고물상….
“여름 내내 일주일에 2번 이상 만나 기자회견도 하고 농성도 하고 그랬죠. 그렇게 힘을 합쳐 싸우자 꿈쩍도 하지 않던 본사들이 입장표명을 하고 피해자구제도 이루어졌고, 결국은 중소상공인들을 보호할 법을 제정하는 데까지 나아갔죠. 물론 그 일들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찾겠다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가 느낀 건 ‘재미’였다. 비슷한 사정의 자영업자들끼리 모여 정보도 얻고 서로 위안도 나누고 함께 뭉쳐 싸우고, 어느 업종에서 기자회견을 하면 모두 나와 빈자리를 메워주고…. 
“그렇게 하니까 우리들이 하는 말에 힘이 실리고 세상이 우리 얘길 들어주더라고요. 우리의 목소리가 커지는 경험은 진짜 재밌고 짜릿했어요. 제가 참여연대에 와서 느낀 게 크게 두 가지인데, 첫 번째가 참여의 기회, 두 번째가 연대의 기쁨이에요. 참여연대, 이름 한번 참 잘 지었어요.”

근데 ‘살리기’가 전문이신 분이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는 B급 공포영화를 좋아하신다고요?
“공포영화는 항상 시대상과 맞물려 있거든요. 최근에 개봉된 영화 ‘오피스’도 다들 공포영화인 줄만 알지 그 영화가 ‘남양유업 사태’를 소재로 했다는 건 잘 모르더라고요. 욕설 파문의 당사자인 본사 직원은 대체 왜 그런 비인간적인 행태를 보였나, 혹시 회사 시스템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예요. 막대한 자본이 투자된 영화라면 과연 그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을까요? 쉽지 않죠. 그래서 제가 저예산의 B급 영화들을 좋아하는 거예요.”

한때 영화사에 다니며 시나리오를 쓴 적도 있는 그는 최근 ‘배드 테이스트(Bad Taste)’라는 B급영화전문 팟캐스트도 시작했다.
“‘배드 테이스트’는 단순히 영화만 소개하는 게 아니라 영화를 사회문제와 결부해서 이야기해요. 지난 주에는 ‘영화 속의 언론’이란 주제로 현재 우리 사회의 언론 지형을 살펴보았고, 이번 주는 ‘헬조선’을 주제로 독립영화 ‘마돈나’와 ‘김복남살인사건의 전말’, 애니메이션 ‘돼지왕’ 등을 통해 지옥처럼 변해가는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어요.”
문방구 아저씨를 만나는 줄로만 알고 왔는데 내가 들은 건 ‘을’들이 벌이는 세상과의 한판 전쟁, 그 리얼스토리였다. 막판에는 비전문가들이 논하는 영화비평으로 인터뷰는 끝이 났다. 장르 구분이 애매해진 이 인터뷰는 저예산이라는 점에서, 등장인물이 할 말은 다 한다는 점에서 진정 B급이다.

 

    어디를 봐야 하는가
“자영업자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지길 바라는 게 아니에요. 단지 ‘내가 먹고사는 데 도움을 줄 정책을 가진 정치세력’을 지지하길 바라는 것뿐이죠. 내가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를 하니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말이죠.”
제도와 법 못지않게 자영업자들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그가 힘주어 말했다. 모든 문제들이 잘 풀리면 언젠가는 자신도 다시 자영업자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내게 반문하던 그. 그러고 보면 그가 세상의 모든 ‘갑’들과 이토록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는 자신이 왔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기 위함일 뿐이다. 이 지극히 평범한 이유가 갖는 무게에 마음이 묵직해졌다. 

“그렇다면 알려줘야지,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는 걸!”
인터뷰 말미에 그가 영화 <암살> 속 대사 하나를 툭 던졌다. 승부욕이 발동한 나도 영화 속 명대사를 찾기 위해 꽤나 시간을 들였다. 다음은 그와 내가 이구동성으로 좋아한다고 말했던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 <판의 미로>의 엔딩 자막이다. 
‘그녀가 지상에 남긴 흔적들은 어디를 봐야하는지 아는 자들에게만 보인다고 한다.’
어디를 봐야하는지를 아는 자. 그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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