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7년 11월 2017-11-02   1419

[역사] 참교육의 불꽃, 김철수

참교육의 불꽃,
김철수

 

 

글. 권경원 다큐멘터리 감독

독립장편 다큐멘터리 <국가에 대한 예의>를 만들었다. 

 

 

“친구들은 감옥에 있는디, 우리만 시험을 볼 것이냐.”

 

유신 때 폐지되었던 학생독립운동기념일(11월 3일)은 폐지된 지 11년이 지난 1984년, ‘학생의 날’이란 이름으로 부활했고, 그로부터 22년이 또 지나서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라는 제 이름을 되찾았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1929년 광주역에서 조선여학생이 일본 남학생에게 댕기머리를 잡힌 우연한 시비 끝에 조선남학생이 난투극에 가담했다가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퍼졌다는 식의 약사만으로는 당시 각성한 10대의 학생들을 묘사하는 데 모자람이 있다.

 

시위가 시작된 11월 3일은 광주고보생과 광주농교생 10여 명이 조직한 성진회(醒進會)라는 학생비밀결사의 3주년 되는 날이었고, 일제의 명절 명치절(明治節)이자 음력으로 개천절인 날이었다. 명치절 기념식이 끝나자 광주고보, 광주농교의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오는 일본학생들을 광주천에서 광주역까지 쫓아가며 대치했다. 이후 광주의 학생들은 일방적으로 한국인 학생에 대한 비난 기사를 쓴 광주일보사를 습격해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그들이 외친 구호는 ‘조선독립만세’, ‘일본제국주의타도’, ‘광주중학(일본인학교)타도’, ‘식민지교육철폐’ 등이었으며 광주 시가지를 돌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댕기 머리를 잡혔던 여학생 중 하나인 이광춘은 광주여고보의 비밀결사 ‘소녀회’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시위 이후 ‘백지시험동맹’을 주도했으며, 시험 당일 학생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자 “친구들은 감옥에 있는디, 우리만 시험을 볼 것이냐”며 전교생을 교문 밖으로 이끌었다. 이듬해 1월 18일까지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이 시위는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장례식

 

전남보성고등학교 3학년 김철수

이승만의 독재를 끊어냈던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17세 김주열의 주검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이 나라의 현대사는 길이 막힌 역사의 복판에서 반드시 어린 학생들의 희생이 반복됐음을 증명한다. 

 

1991년 5월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을 하면서 가장 가슴 아렸던 죽음 중의 하나는 당시 유일한 고등학생이었던 전남 보성고 김철수의 죽음이었다. 김철수는 1989년 전교조 교사 대량 해직 사태가 있었을 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친구 김미진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당시에도 해직이 두려워 전교조를 탈퇴하는 선생님들을 감싸는 진중한 학생이었으며, 밥상을 앞에 놓고도 밥상과 농촌의 고된 노동 그리고 당시의 교육 현실에 대한 이야기까지를 유쾌하게 연결해 이야기할 줄 아는 학생이었다. 

 

1991년, 광주 5월항쟁 11주년 기념일이자 강경대의 장례 행렬이 광주 망월동으로 향하던 날, 전남 보성고의 학생회는 자신들의 이름으로 주최한 5·18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었다. ‘솔개’라는 학내 동아리에서 풍물과 독서토론을 했던 김철수는 그날 하얀 민복을 입고 행사의 길놀이에서 징을 쳤었다. 행사가 시작되자 학교 건물 뒤에서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은 김철수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몸에 불을 붙인 채 ‘노태우정권 퇴진’을 외치며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른 김철수는 구호를 멈추고 행사장에 있던 친구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희 언제까지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래?”

 

부모님
보성에 계신 김철수의 부모님. 벽에 ‘참교육’ 액자가 걸려 있다.

 

그의 마지막 육성이 담긴 테이프 

“철수 마지막 목소리 테이프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어요.”

그는 아산병원으로 옮겨졌다가 곧 광주의 전남대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가 입원한 중환자실 옆 침대에는 4월 29일 분신했던 박승희가 누워있었다. 3일 뒤에는 고향 후배 김철수의 분신을 애통해하며 분신한 정상순이 옆 침대로 실려 들어왔다. 스스로 몸을 태워버린 세 젊은이가 한 병실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김철수는 2주 정도 병원에 있었다. 분신 직전 써 놓은 유서의 일부가 불에 타버려 훼손되었기에, 유족과 친구들은 그가 영원히 눈을 감기 사흘 전 그의 유언을 녹음했다. 그의 육성이 기록된 자료가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채록된 내용을 문자로만 접했던 나는 김철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 위해 그의 유족과 친구들을 수소문했다.

 

추모사업회 사이트에 가입하고, 전남추모연대에 연락을 해봤지만 그들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렇게 다큐멘터리가 제작 일정의 끄트머리로 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1991년 고등학교 학생운동에 관한 소설 『나무에게서 온 편지』를 쓴 하명희 작가로부터 귀한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광주의 한 선생님이 철수 마지막 유언 목소리 테이프를 가지고 계세요.’

죽음을 기록하는 이로서 이 모든 일에 충분히 감정적 거리를 두었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 테이프 속의 육성을 들으며 잠시 무너졌다.

2분 남짓 힘겹게 녹음된 그 파일에서 정말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와 남겨질 수밖에 없었던 그의 마음은 무엇일까를 구분하려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3주일 동안 밥 한술 못 먹고, 하루에 물 한 컵으로 살아왔다는 그의 고백에도 맘의 동요를 참을 수 있었다. 내가 무너졌던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누군가를 간절히 부르는 그 목소리였다. 내가 3인칭으로 기록해왔던, 26년 전 세상을 떠난 그 철수가 살아 있는 지금의 나를 2인칭으로 반복해서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내게 전해진 김철수의 육성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옮기기 위해 나는 듣고 또 들었다. 

 

갓 완성한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동안 또 하나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10월 28일 토요일 2시, 전남 보성고등학교 교정에 김철수의 추모비 제막식이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그의 추모비가 교정에 서게 된 것은 26년 만의 일이 되었다. 전교조는 해직 교원 9명의 조합 탈퇴를 거부하면서 2013년 10월 ‘법외노조’ 통보를 받았다. 현재 전교조는 10월 말까지 법외노조 철회를 위한 교섭에 나설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