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9월 2007-09-01   1749

테마 기획 – 고향: 고향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만드는 것

고향은 어디에 있는가? 고향에 관한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두 가지 내용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개인적 차원의 고향이다. 여기서 고향은 무엇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그곳은 아름다운 전원일 수도 있고, 삭막하기만 한 시멘트 절벽 속일 수도 있다. 사실 요즘 어린이의 대부분은 병원에서 태어난다. 그러니 그들에게 출생의 고향은 병원이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개인적 차원에서 보자면, 고향은 대단히 다양한 장소로 나타난다. 그것은 출생과 성장의 기억을 담고 있는 곳이라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공간의 특성에서는 커다란 차이를 가진다.

둘째, 사회적 차원의 고향이다. 이 경우에 고향은 흔히 근대 이전의 사회와 장소를 가리킨다. 개인이 고향이라는 말로 어린 시절을 추억하듯이, 사회도 고향이라는 말로 근대 이전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도시화가 80%를 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조만간 이 비율은 90%를 넘게 된다. 그런데 도시사회인 현대는 삭막하고 시끄럽고 비인간적 면모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자연이 살아 있고 사람들의 관계가 훨씬 밀접했던 근대 이전의 사회와 장소를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되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고향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누구나 태어나 자란 곳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떠나서 모든 곳이 너무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고향은 단순히 태어나 자란 물리적 공간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공간은 자연과 문화의 복합체이다. 고향은 내가 태어나 자란 자연과 문화의 복합체를 뜻한다. 그러나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개발주의의 광풍이 몰아친 결과 아예 토건국가가 되어버린 이 나라에서 자연과 문화의 복합체로서의 고향은 이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개인적 차원의 고향도, 사회적 차원의 고향도 이 나라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발소 그림’ 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고향

나는 서울의 청량리에서 태어나서 대학을 마치기 직전까지 살았다. 그러니까 내 고향은 청량리이다. 아직도 그곳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청량리 시장, 청량리 경찰서, 청량리 우체국, 청량리 역, 청량리 588, 산동네, 대왕코너, 미도파, 나까마 시장, 경동 시장, 대왕극장, 동일극장, 오스카극장, 시대극장, 경동극장, 홍파국민학교, 홍릉국민학교, 삼육국민학교, 성일중학교, 청량중학교, 고려대학교, 시립대학교, 경희대학교, 시성약국, 무궁약국, 상신당 약국, 백제약국, 임재약국, 인천약국, 동아상회, 찻길, 골목길, 서부운수, 삼흥운수, 평안운수, 호수여객, 리어카, 지게꾼, 구두닦이, 이발소, 미장원, 무당집, 목재소, 목수집, 두부공장, 소금공장, 신망애 한의원, 이재선 한의원, 박마리아 산부인과, 동다방, 흑다방, 독서실, 비바리, 향원, 흑룡강 중국집, 이숭녕 박사 집, 홍순구 교수 집,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청량사, 홍릉, 청량리 뇌병원, 그리고 무엇보다 2만 평에 이르던 서울대 문리대 예과 터.

우리가 그냥 ‘문리대’라고 부르던 서울대 문리대 예과 터는 오랫동안 빈 터로 남아 있다가 1976년 ‘미주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경성제대 시절에 건축된 붉은 벽돌의 근대 건축물들과 높다란 굴뚝이 모두 헐려 없어졌으며, 벌레와 새, 족제비 등이 놀던 들판과 언덕과 나무들도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그곳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우리는 매일 그 담장을 넘어 들어가 놀았다. 그곳이 아파트 단지로 바뀌면서 그 언저리에 있던 우리 집도 철거되었고 나의 유년기도 그렇게 끝나 버렸다. 만일 그 곳을 근대 건축물이 보존된 공원으로 만들었다면, 청량리는 지금과 사뭇 다른 곳이 되었으리라.

어려서 내가 이발을 하던 집 앞의 이발소에는 이른바 ‘이발소 그림’이 거울 위에 걸려 있었다. 초가집이 있고, 마당 가운데서 어머니가 곡식을 고르고, 그 곁에서 닭과 병아리들이 모이를 쪼고, 왼쪽 끝에는 물레방아가 돌며, 화면 아래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오른쪽 멀리 어슴푸레 산이 보인다. 이렇게 정식화된 정겨운 고향의 모습은 이미 그 시절부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마음속의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라디오는 김상진이라는 가수가 여린 목소리로 온힘을 다해 열창하는 ‘고향이 좋아’라는 노래를 매일 틀어주었다.

타향도 정이 들면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말을 했던가

바보처럼 바보처럼

아니야 아니야

그것은 거짓말 향수를 달래려고

술이 취해 하던 말이야

아~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정든 고향 떠나 도시로, 도시로

오늘날 자연과 문화가 살아 있는 정겨운 고향은 극히 희귀한 존재가 되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때마다 고향을 찾아간다.

사실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고향을 떠났다는 것을 뜻한다. 도시화 역사가 벌써 40년이 넘었고, 이제 도시가 고향인 세대도 많이 늘어났다. 초기에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온 사람들이 이제는 어느덧 노인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비도시 지역에 고향을 두고 도시에 나와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특히 비수도권 지역에 고향을 둔 수도권 주민이 매우 많다. 이 때문에 게르만 대이동보다 10배나 많은 한민족 대이동이 명절 때마다 펼쳐진다.

서울의 땅 크기는 전 국토의 0.6%이지만 전체 인구의 1/4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으며, 국토의 11.2%인 수도권에는 전체 인구의 1/2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다. 처음에는 서울 인구가 급증했지만, 곧 그것이 수도권으로 확장되었다. 1960년대 초 서울의 인구는 200만을 넘어섰다. 1970년대 초에 소설가 이호철은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서울의 인구는 더욱 급증해서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 1,00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물론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과 그 자녀들이다.

조선의 지배세력은 가족을 단위로 강력한 지배체계를 형성하고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윤리의 정치’를 펼쳤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주자가례’에 따라 조상을 잘 모시는 것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는 의식을 깊이 심어 주었다. 그 결과 극히 남녀 차별적이며 세대차별적인 제사제도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것이 조선 왕조 500년을 지탱하는 핵심적 기제가 되었다. 그리고 급속한 공업화와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쉽사리 약화되지 않았다. 나훈아의 ‘고향역’과 같은 노래의 배경에는 이러한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뿐이 곱뿐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전쟁과 개발이 빚어낸 ‘난민사회’

미국의 소설가 토마스 울프는 1938년 폐결핵으로 죽었다. 그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는 2년 뒤인 1940년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막대한 이익을 노린 개발로 말미암은 고향의 파괴와 상실을 다루고 있다. 그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86년 한국에서는 소설가 이문열이 같은 제목의 소설을 출간했다. 그는 예의 의고투 문체로 고향의 상실을 묘사해 큰 인기를 얻었다.

이문열이 탄식하는 고향의 상실은 그가 칭송하는 박정희의 지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토마스 울프의 소설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려대 영문과 김우창 명예교수는 그렇게 설명한다. 토건국가의 확립에까지 이른 개발주의의 광풍 속에서 수많은 개발난민들이 발생했다. 1950년대가 전쟁난민의 시대였다면, 1960~70년대는 개발난민의 시대였다. 이 사회가 각박한 난민사회가 된 것은 무엇보다 개발독재의 구조적 유산이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간 만들기가 고향 되찾는 길

다시 생각해 보자. 고향은 어디에 있는가? 사실 고향은 저기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게는 타향이더라도, 내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면, 내 자식들에게 이곳은 고향이다. 그렇다면 고향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만드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무엇보다 개발주의의 광풍을 잠재우지 않으면 안 된다. ‘선진국’의 토지제도를 적극 도입해서 개발이익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투기소득, 불로소득을 과감히 없애야 한다. 여기서 나아가 송전탑, 전봇대, 전깃줄, 도로, 아파트, 펜션, 간판, 십자가 등 난개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생태문화적 개발만이 도시와 농촌이라는 장소적 차이를 떠나 타향을 고향으로, 고향을 고향답게 만들 수 있는 길이다. 유럽의 도시나 농촌을 보며 언제까지 감동만 할 것인가? 일본과 비교해도 우리의 공간문화는 얼마나 척박한가? 우리 자신과 후손에게 아름다운 고향을 만들어주기 위해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바르게 살자’라는 한심한 계도성 문구가 새겨진 돌덩어리나 여기저기 세워지는 후진성은 하루빨리 종식되어야 한다.

홍성태 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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