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9월 2007-09-01   1119

고향을 잃어버린 시간들

내 고향은 전라북도 전주시 서서학동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고향을 잃어버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와 세 번째 이사를 한 뒤 아버지는 본적지를 당시 살던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으로 옮겨버렸다. 우리 집은 가족회의가 없다. 가장으로서 절대적 권위를 누리던 아버지가 정한 것이라면 우리 집에선 무조건 법으로 통했다.

내 고향 집은 산 중턱을 깎아 온통 장미를 심은 꽃집이었다. 뒷산을 넘으면 전주가 자랑하는 완산칠봉이 있다. 아름드리나무 숲인 그곳은 어린 나의 넓은 놀이터였고, 지금은 사무치는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숲에 들어가면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기에 여름이면 거기서 하루 종일 지냈다.

아버지가 서울로 본적을 옮긴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당시에는 호적 관련 서류가 필요할 때 주거지(주소지)가 아닌 본적지까지 찾아가야 발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전라도 차별’이었다. 아버지의 당시 직업은 기자였다. 전라도 출신에 전라도 지역 기자이자, 고위간부이셨던 아버지가 지역차별로 고민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희망은 신기루에 불과했다. 나는 감옥에서 처음 이 ‘전라도 차별’을 경험했다. 76년 4월 나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하는 ‘별말씀을 다 하십시다’라는 시집을 냈고, 그 때문에 지금은 헐려 없어진 ‘남산의 중정’에 끌려 간 후 긴급조치9호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서대문 구치소로 끌려갔다. 중정 구금기간을 빼고 나는 1년 4개월 20여 일을 서대문에서 영어의 몸이 됐다. 사춘기를 감옥에서 보낸 나는 그곳에서 아버지가 버린 고향을 스스로 버렸다. 만17세로 긴급조치 9호 최연소자 구금자였던 나는 당시 유일하게 소년수방에 있었다. 구치소 9사하에서 나는 내 고향을 ‘니꾸사꾸’, ‘깽깽이’라고 모욕하던 잡범들 사이에서 참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성인방에서 사상범들은 동질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사회인식 탓에 집단학대를 당하지는 않지만 나는 달랐다.

박 정권이 붕괴된 후 내가 택했던 직업은 아버지와 같은 기자였다. 이력서에 본적을 서울로 써도, 3차 면접 때면 공개할 수밖에 없는 원적 탓에 나는 여전히 ‘전주’였고, 면접관은 ‘아! 전라도’였다. 노태우 정권 때 서울에서 경기도로 일터를 옮겨 계속 기자였지만, ‘전라도’는 숙명이었다. 입사 당시 나를 추천한 분은 자신이 책임질 것이니 원적을 말하지 말라했고, 나는 또 다시 고향을 버린 결과 입사했다.

내가 고향을 되찾은 것은 DJ가 대통령이 될 때였다. 나는 기자실에서 지역선거 결과를 송고하면서 내가 기자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구두를 벗어 내리치며 목 놓아 울었다.

최근 나는 자주 전주에 간다. 14년 전 고향으로 돌아간 아버지를 뵈러가는 것이다. 전주의 중심부(옛 도청 주변)는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관문을 지날 때면 톨게이트 입구의 ‘호남제일문’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상념에 잠긴다. 전주가 더 이상 외면당하는 변방이 아니라 자부심 가득한 땅이 돼야 한다고 믿는다.

이하영 부천일보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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