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9월 2007-09-01   1882

테러는 왜 일어나는가

 

아프간 반미 저항집단인 탈레반 잔존세력에게 납치돼 인질로 잡혔던 한국인 기독교인들의 고난은 도대체 테러가 무엇인가, 테러는 어떤 개념을 지녔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만든다. 테러를 ‘정치적 동기를 지닌 폭력’이라 규정하더라도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가 내려지는 탓이다.

1980년대의 민주화투쟁에 큰 동력을 마련해주었던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전두환 군사정권과 그 하수인이었던 문귀동 경장(당시 부천경찰서 소속)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그저 ‘부천서사건’ 또는 ‘부천서 권양사건’이 적당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렇듯 같은 현상을 어떻게 이름 짓느냐에 따라 성격이 확 달라진다. 테러를 둘러싼 명칭 논쟁도 마찬가지다. 공격을 받는 자의 눈에는 분명히 ‘테러’이지만,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닌 국가(이를테면 미국, 이스라엘)의 침략에 맞서 죽음을 마다 않고 저항하는 무장 세력들의 시각에선, 자신들의 투쟁은 정치적 존립을 위한 ‘성전’이고, 그런 투쟁을 벌이다 죽은 사람은 ‘순교자’다.

19세기 초 프러시아의 전쟁이론가 칼 폰 클라우제비츠는 그의 유명한 『전쟁론』에서 전쟁을 가리켜 ‘다른 (물리적) 수단들을 동원한 정치적 관계의 연장’으로 정의 내렸다. 테러도 마찬가지다. 폭탄 테러를 비롯한 폭력적인 현상은 그 행위자들의 열정과 분노라는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많은 테러 연구자들도 그런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브루스 호프만 미 RAND 연구소장은 “테러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원래부터 정치적”이란 정의를 내렸다. CIA 부설 대(對)테러센터 소장을 지냈던 폴 필라도 “정치적 요구 실현이 테러의 기본요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의 여러 테러 연구자들이 보이는 한계는 테러를 국가가 아닌 정치적 무장집단들의 폭력으로 좁혀 본다는 점이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테러가 일어나는가, 테러의 근본 원인보다는 테러의 결과 쪽에 더 초점을 맞춘다.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에는 정치적 변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폭력이 아닌, 이를테면 선거혁명 같은 합법적인 장치들이 마련돼 있다. 정치적 욕구불만을 합법적으로 풀기 어려운 제3세계에는 그런 미국식 테러 개념이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가 없다.

국가도 테러를 지저른다

전쟁도 따지고 보면 정치적 폭력이다. 흔히 전쟁과 테러의 차이점으로, 전쟁을 이끌어 가는 주체가 국가인데 비해, ‘테러’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비국가 조직(non-state actor)이란 점을 꼽는다.

그러나 이 같은 분석엔 한계가 따른다. 국가도 테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놓친다. 20세기 전반기 나치 히틀러와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국가폭력은 국가테러에 다름 아니다. 영미를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드레스덴을 비롯한 독일 도시들을 마구 공습, 시민들을 죽인 것도 국가테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한참 뒤인 1960년대까지 아프리카 지역을 식민지로 거느리던 서구 열강들은 그 지역 민족해방운동을 ‘테러’로 몰아붙였다. 제3세계 민초들의 눈으로 보면, 그런 압제는 다름 아닌 기독교 문명국가들의 ‘국가테러’였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가들을 미사일로 표적 사살하는 전술도 ‘국가 테러’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압살한 정두환정권의 행위도 국가공권력이란 이름 아래 저질러진 국가테러였다.

바로 여기에서 국가테러에 맞서는 테러균형론이 설 자리가 마련된다.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2004년3월 이스라엘 헬기 미사일에 사망)은 2002년5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자택에서 필자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하마스의 저항을 ‘테러’라 일컫는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국가테러’에 맞선 ‘테러의 균형’이다”라고 주장했었다.

일반적으로 국가가 현상유지(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테러리스트들은 정치사회적 변화와 개혁을 추구한다. 테러를 통해 공포를 확산시켜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 테러리스트들의 목표다. 정치적 동기를 지닌 테러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포를 확산시켜 국가로부터 정치적 양보를 받아내려는 것’이다. 따라서 테러는 잔인하게 벌어진다. ‘테러가 온건하게 벌어졌다’는 말은 어법상 모순이다. 9·11 테러가 극단적인 보기다.

9·11이 낳은 여러 신조어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끈 것이 ‘테러와의 전쟁’이다. 미국이 벌여온 ‘테러와의 전쟁’은 ‘전쟁-종전협정-평화’라는 고전적인 등식과는 다르다. ‘테러와의 전쟁’은 전 세계 반미 저항세력들을 상대로 벌이는 21세기의 새로운 무한전쟁이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영구평화는 무덤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영구 전쟁이나 다름없다. 부시 미 대통령은 테러리스트의 뿌리를 뽑을 때까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겠다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미국이 바라는 대로 테러의 뿌리가 뽑힐까. 그래서 테러전쟁이 막을 내릴 수 있을까?

‘테러전쟁 시대’ 연 미국의 패권주의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 노암 촘스키(미 MIT대 교수, 언어학)를 비롯하여, 부시 행정부의 대외 강공책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비판자들은 ‘테러와의 전쟁’이 21세기 미국의 패권을 확장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명분 또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지구촌을 휩쓰는 테러의 뿌리를 보면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이 깔려 있다. 테러는 그에 대한 저항운동의 성격이 짙다. 미국의 석유자원 챙기기,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 더 나아가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세계를 힘으로 지배하겠다는 패권전략을 비판하는 물리적 저항이 곧 테러다.

노암 촘스키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패권추구가 끝 모를 테러전쟁의 시대를 열고 말았다”고 한탄한다. 테러라는 이름의 정치적 폭력은 왜 일어나는가, 무엇이 테러리스트들로 하여금 분노와 좌절을 안겨주었고, 끝내는 죽음을 마다하는 자살폭탄을 터뜨리게 하는가를 헤아리지 않으면 테러는 끝이 없을 것이다. 아프간에서 탈레반이 일으킨 한국 기독교인 인질사건도 바로 그런 배경과 맞닿아있다.

김재명 국제분쟁전문기자,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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