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1월 1999-11-01   945

개혁정책 후퇴부터 수구인사 중용까지

문화시계 거꾸로 돌린 박지원 장관의 파행

김대중 대통령은 문화대통령이 아니다. 국민의 정부도 ‘문화정부’는 아니었다. 아직 임기가 더 많이 남았지만 새 정부 출범 후 지금까지 정부의 문화관련 정책, 그 중에서도 영화관련 정책을 보면 문화정부를 기대했던 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머쓱해질 따름이다. 97년 대통령 선거를 코 앞에 두고 있을 무렵, 필자는 네 명의 대통령 후보를 인터뷰했다. 영화산업에 대한 각 후보들의 정책 공약과 비전을 듣기 위해서였다.

김대중 후보는 과연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사전에 보좌진에서 준비한 자료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거침없이 밝히는 ‘소신’을 들으며 역사상 보기 드문 문화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를 했었다.

새 정부 출범 직후, 영화관련 정책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일 때도 개혁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동의하고 양해했다. 물론 임기가 더 많이 남은 이 시점에서 국민의 정부가 문화적이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은 문화대통령이 아니라고 예단하는 것이 섣부른 것 아니냐고, 좀 더 기다려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정부의 영화관련 정책 집행 과정을 보면 기다려서 될 일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적어도 문화를 우선시 하는 대통령, 문화의 세기를 준비한다는 정부에서 해서는 안될 일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먼저 스크린쿼터 문제를 보자(잠깐, 스크린쿼터는 극장에서 1년에 146일 이상은 반드시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해야 한다는 규정으로 막강한 할리우드 영화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나라 영화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구실을 하고 있다. 이런저런 감면 규정에 따라 사실상 106일로 적용되고 있다). 미국의 스크린쿼터 축소 또는 폐지의 요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스크린쿼터를 현행대로 유지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것은 아니라도 정부가 어쨌든 미국의 끈질긴 요구에 맞서 ‘선방’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화정부를 자처하는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상황이 돌변했다. 우리 정부에서 먼저 축소조정안을 내놓기까지 했다. 물론 문화관광부가 한-미투자협정 체결 필요성을 앞세운 경제관련 부처의 힘에 눌린 점은 감안하더라도 당장 한국영화의 사활이 걸린 문제를 영화인들과 제대로 의논도 하지 않고 헌신짝처럼 버릴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인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스크린쿼터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에 ‘친미 대통령’으로 기록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근거중의 하나라는 점에서도 예사로 보아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백 보 양보해서 스크린쿼터 문제는 미국이라는 파트너가 있기 때문에 수세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자. 그러나 새 정부가 추진하는 대표적 개혁정책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위원 구성과정을 보면 국민의 정부를 반개혁적, 반문화적 세력이라고 서슴없이 낙인찍게 된다. 영진위뿐만 아니다. 퇴직 관료를 문예진흥원, 국립현대미술관, 새천년위원회 등 산하 기관·단체장에 줄줄이 갖다 앉힌 문화부의 최근 인사는 정부의 반개혁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실례로 영진위 구성과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5월 28일, 문화부는 고육지책을 써서 겨우 영진위 위원 10명을 위촉하고 대기업 임원을 지낸 전문경영인 신세길 씨를 위원장으로, 영화계에서 개혁적인 인사로 꼽히는 문성근 씨를 부위원장으로 뽑았다. 영화계에서는 정부의 ‘점진적 개혁’ 주장에 동의해 차선책으로 수용했다. 하지만 김지미, 윤일봉 씨 등으로 대표되는 보수세력쪽에서는 심상치 않은 저항 조짐을 보였다.

이들은 영진위를 장악할 수 없게 되자 문화부의 위원 위촉 제의를 받고 수락한 적이 없다며 영진위 구성이 위법이라고 주장했다. 영화진흥법에 의거, 위원을 10명으로 구성해야 되는데 자신들이 수락하지 않았으니까 8명으로 구성한 영진위는 위법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법원에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까지 내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자 문화부는 조기 수습을 명분으로 중재안을 내놓았다.

박지원 장관과 담당 국장이 지난 7월 9일 국회 문화관광위에 출석해 “김지미, 윤일봉 씨가 위촉 제의에 대해 분명히 수락의사를 밝혔으며 위원회 구성도 법적 하자가 없다”고 답변해놓고, 슬그머니 ‘중재안’을 신세길 위원장과 문성근 부위원장에게 내밀었다. 따지고보면 문화부의 중재안도 ‘위원직을 수락하는 대신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다시 뽑자’는 김지미, 윤일봉 씨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나 다름없다. 영진위 출범 직후, 당시 문화부의 주장대로 ‘위원직을 수락해놓고도 수락 사실을 부인하며 위원회 참석을 거부’해 파행을 조장했던 김지미, 윤일봉 씨에 대해 수수방관하던 문화부가 돌연 편파적인 중재안을 내민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일이다.

문화부는 9월 1일 신세길 위원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옛 문화공보부 관료 출신 박종국 씨를 영진위 위원으로 위촉하는 한편 그동안 위원 위촉을 수락한 적이 없다고 부인해오던 김지미, 윤일봉 씨도 다시 위촉했다. 문화부의 사퇴 종용을 거부하던 문성근 씨에게 정부의 개혁 방침은 변함이 없으나 수습을 위한 절차가 필요하다며 ‘감언이설’로 부위원장직을 물러나게 한 뒤, ‘합법적’으로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갈아 치운 것이다. 영진위 위원장 교체 소동으로 문화부는 일관성없고 무원칙한 행정의 표본이라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게 됐다.

이 과정에서 문화부는 또 무리수를 두었다. “위원 결원이 생겼을 때에는 결원된 날로부터 30일 이내 그 보궐위원을 위촉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문화부는 진작 스스로 ‘위원직을 수락한 사실이 없다’며 위원이 아니라고 우기던 김지미, 윤일봉 씨 대신 다른 사람을 위촉했어야 한다. 3달 동안이나 영진위 운영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어온 김지미, 윤일봉 씨에 대한 조건없는 면죄부는 물론 편파적인 특혜까지 제공한 것이다.

영진위가 도마에 오른 국정감사에서 밝혀진 박종국 위원장의 전력도 예사가 아니다. 9월 29일 문화부 회의실에서 열린 문화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여야의원들은 한결같이 영진위 구성에 법적 하자가 있고, 신임 위원장 등이 개혁적이 못하다며 박지원 장관을 몰아세웠다.

국민회의 길승흠, 최희준 의원은 문화부가 그동안 김지미, 윤일봉 씨가 틀림없이 위원 위촉을 수락했고 위원회 구성도 적법하다고 주장하다가 9월 1일 김지미, 윤일봉씨를 다시 위촉한 것은 규정에 어긋난다며 구성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지원 장관은 “김지미, 윤일봉씨가 9월 1일 위촉 이후 그동안의 영진위 활동을 추인했으므로 문제없다”고 대답했다. 이날 박지원 장관의 답변은 법규정과는 무관하게 마치 김지미, 윤일봉 씨의 의사에 따라 ‘정통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문화부의 속셈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여당인 국민회의의 최재승 의원은 박종국 위원장이 문공부 공보국장 시절인 1974년 12월 당시의 언론자유운동을 언론인들의 내분이라고 강변해 기자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직위해제 된 사실이 있다는 것을 비롯 “우리나라 인구가 많아 1∼200만 명쯤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등 망언을 했던 사실도 들춰냈다. 또 박종국 위원장은 62년 8월부터 63년 8월까지, 65년 4월부터 67년 3월까지, 군사정권 체제유지를 위해 영화를 검열하고 가위질하던 공보국 영화과에 행정사무관으로 근무했고, 88년부터 94년까지 공륜 부위원장을 지낸 사실을 일깨우며 “군사정권 체제를 옹호하고…이중 잣대를 가지고 자의적으로 검열을 했던 인물이 어떻게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이에 대해 박지원 장관은 “과거를 반성하고 개혁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감독하겠다”는 무책임한 대답으로 일관했다. 조희문 부위원장도 현정부의 개혁적인 영화관련 정책안에 사사건건 반대 입장을 밝힌 대표적인 보수인사로 김지미, 윤일봉 씨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그는 심지어 스크린쿼터 축소안에 동조하는 주장으로 영화인들의 ‘공적’이 되기도 했던 사람이다. 문화부의 또다른 속셈은 10월 4일 입법 예고한 영화진흥법 개정안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영진위가 자율기구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하며 국민의 정부가 문화적임을 강조하더니, 영화진흥법을 바꾼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영진위가 매년 예산집행의 규모 및 기본방향 등에 관해서 문화관광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을 슬그머니 끼워 넣은 것이다. 통합방송법 개정안을 둘러싼 소동에서 이미 확인한 것처럼 문화부도‘말 잘 듣는’사람을 앉힌 다음, 통제권 안에 넣어두겠다는 발상이다. 문화부의 이 같은 방침이 밝혀지자 문성근, 정지영, 안정숙 등 영진위의 개혁파 인사들은 이미 사퇴했다.

선거를 앞두고 한껏 문화적 마인드를 뽐내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서 자행한 반문화적인 작태는 이렇게 사사건건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 선봉에 대통령의 수족처럼 움직이던 박지원 문화부 장관이 서 있다는 점이 더욱 씁쓸한 대목이다.

조종국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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