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1월 1999-11-01   2281

인정사정 볼것없다

품격있는 폭력영화

인정사정을 보지 말라니. 이 무슨 무지막지하고 섬칫한 말인가! 누군가에게 ‘인정머리 없는 것’이라는 욕이라도 듣게 되면 가슴 한켠이 서늘해 오면서 코끝부터 찡해지는 것이 우리네 정서인데.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잔인함과 폭력성, 그리고 ‘얼마나 인정사정을 안 봐주길래’ 하는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 영화관의 문턱을 넘었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재미없는 영화는 절대 보지 않는다. 한번쯤 예술성이 있으나 별로 재미는 없는 영화를 찾아서 보기는 하지만 그 영화를 보고 난 후 어떤 예술성이 있었는지 애써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평론도 즐기지 않는다. 영화보기 전에 읽으면 영화를 보는 동안 전문가의 평론에 맞추어 영화를 보게 되고, 영화를 보고 난 후 읽어도 나의 느낌이 전문가의 의견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평점을 매기게 되는 것이 영 입맛이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라는 영화를 선택하면서, ‘제목만큼 스릴이 있을까?’ 라는 기대와 함께 그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영화를 접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잠시 졸았다’는 것이다.

이런 소리를 하면 이명세 감독을 좋아하고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많은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겠지만 줄거리 중심으로 영화를 보는 단순한 나 같은 사람은 영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조직의 보스가 죽고, 신출귀몰한 범인을 깡패 같은 형사들이 잡으러 다니는 것이 이야기의 처음이자 끝이 아닌가! 허무했다.

하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이러한 단순한 줄거리를 뛰어넘는 다양한 맛이 있었다. 실제인물을 모델로 설정해 생활을 함께 하면서 그 사람의 생활과 소품까지 꼼꼼히 챙긴 치밀함이 돋보였으며, 2년여 동안의 준비된 시나리오와 성의가 넘쳐나는 영화장면들은 한마디로 ‘대끼리’(최고라는 의미, 경상도에서 잘 쓴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란 은행잎이 쌓인 거리에 검은색 승용차가 한 대 있다.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예쁜 어린아이, 이윽고 비가 내리고 차안의 한 사내는 40계단 위에서 우산을 기다리는 또 한 명의 사내에게로 다가가 칼을 휘두른다. 우산이 갈라지면서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은 빗물에 섞여 작은 폭포를 이룬다. 전혀 아름답게 느껴지는 장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노란 은행잎과 비오는 거리, 무심히 갈 길을 가는 사람들, 빨간 피, 이 모든 장면이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범인과 형사가 쫓고 쫓기는 장면들도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묘미중의 하나다. 장성민(안성기)과 우형사(박중훈)의 추적신은 짜 맞춘 듯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현장감있게 표현한다. 같은 공간 속에서도 서로 엇갈려 지나치는 두 사람.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장면이다.

문득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그 어느 때가 생각난다. 범죄와의 전쟁 선포 후 범죄가 더 늘면 늘었지 줄고 있지 않다는 짧은 보도도 생각난다. 오늘날 범죄는 점점 더 치밀하고 잔인해져, 으슥한 밤길은 절대 혼자 걸으면 안되고, 누군가가 당하고 있어도 절대 나서서 도와주면 안된다고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경찰청 사람들>의 범죄를 모방해서 더욱 해괴한 신종범죄가 발생하고, 폭력영화를 흉내내는 호기심 어린 10대도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마다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폭력적인 성질들을 절제하지 못하게 만드는 지금의 혼란과 방황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때때로 폭력적이고 싶은, 한번쯤은 나쁜 짓을 상상해 보는 나 같은 많은 사람들에게 숨겨진 폭력성을 이 한편의 영화가 순화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폭력과 범죄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더욱 정서적이고 인간미를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매력일 것이다.

최수미 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 시민사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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