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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11월
  • 2010.11.01
  • 973


‘행복전도사’의 죽음이 던지는 질문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최윤희 씨의 강연을 <아침마당>에서 한 두 번 본 기억이 난다. 그녀의 ‘행복’ 강연은 내 생각과는 너무 맞지 않아 보는 내내 ‘울적’해지기도 했었다. 주부 대상 아침 프로그램에 항상 등장하는 ‘일상의 행복론’에는 일말의 진실은 있을지 몰라도, 생활세계의 잡다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싸잡아 ‘마음의 변화’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는 다소 순진해 보이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종교적’인 심오함을 담고 있으나, 그러한 메시지야말로 힘든 세상 문제는 그대로 두고 정신 변화만을 요청함으로써 자기만의 가짜 ‘행복’에 빠져들게 만드는 ‘아편’이기도 하다. 신나는 강연을 듣고 밖에 나오는 순간, 사람들은 다시 자신들이 생각도 못한 문제들을 겪겠지만 그것을 오직 ‘마음의 문제’로 환원시킴으로써 결국은 사회와 인간 사이의 분리만을 가속시키게 된다. ‘행복’은 결코 개인적인 ‘결단’으로만 가능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아브라함적 ‘결단’은 인간을 한 단계 다른 차원으로 상승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 ‘결단’은 언제나 ‘진공상태’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의 목소리에 복종하면 모든 약속이 이루어지는 유대 족장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이다. 내게 ‘최윤희’와 ‘행복전도사’라는 이름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 속에 위치해 있는 하나의 ‘시대적 징후’같은 것이었다. ‘행복의 전도’라는 문제가 가진 치명적 문제를 까발려 현실 속으로 들여옴으로써 반어적 깨달음을 주는 역할은 오히려 <개그콘서트>의 ‘행복전도사’가 하고 있었다.

행복은 전도할 수 있는가 

최윤희 씨가 병마에 시달리다 남편과 함께 자살을 택했다는 뉴스는 그녀가 그토록 외치던 ‘행복’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그 계기가, 최윤희 씨의 활달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아침마당>의 강연이 아닌 그녀의 자살을 알리는 뉴스였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언론에 공개된 그녀의 유서에는 예상외로 고통에 찌든 이의 비참함 대신, 남겨진 이들에 대한 죄송함, 그리고 자신과 함께 길을 떠나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담겨 있다. 죽음 직전에 그녀가 파란색 싸인펜으로 쓰기 시작한 유서의 첫머리는 “저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이다. 분명 자살의 결심은 육체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발단이었을 것이나, 그 결심을 감행하기 직전 이 부부는 자신들이 행복하게 살았음을 선포한다. 그 누구도 ‘행복’해서 자살하는 사람은 없지만, 자살 직전에 자신의 인생을 ‘행복했다’고 쓰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문장을 보며 나는 그녀가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죽음을 앞두고 고통과 분노와 좌절에 몸부림치지 않았음을 짐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하는 아내 옆에서 건강한 몸으로 자살을 선택한 남편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삶 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동반’하기로 결심한 채, 가장 외로운 순간에 자신의 옆에 있어주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비로소 ‘고통’보다는 ‘행복’에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을까 나는 조심스레 추측한다.

  ‘죽음도 끊어놓지 못할 사랑’에 대한 노래와 시는 넘쳐나지만, 실제로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결혼 소식도 많고, 이혼 소식도 많지만, 그 결혼 약속을 죽음 앞에서도 끊지 않은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세상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홀로 보내지 않기 위해 건강한 자신의 삶도 포기하기로 결심한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극도로 복잡한 심정, 그것이야말로 사실은 그녀 자신이 가진 ‘행복’의 한 측면일 것이다. ‘나는 죽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 죽음을 같이 할 사랑하는 이가 함께 있다’ 역설적인 행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감정은 절대로 ‘전도’할 수 없는 것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녀 자신만의 것이 된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행복’은 ‘전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동시에 ‘행복’이 무엇인지를 돌이켜 생각해보라는 ‘전도’를 하고 떠난 것이기도 하다.

삶의 모순과 모호함

우리는 삶이 거의 무조건적으로 찬양되는 사회에 산다. 그러나 그 속에서 많은 이들이 ‘죽겠다’, ‘죽고 싶다’, ‘죽여 버린다’는 말을 달고 산다. 둘 중 어떤 것이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진실은 ‘삶과 죽음’이 그렇게 배타적인 영역에 놓여있지는 않다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죽고 싶다는 사람치고 죽는 사람 없다’는 말이나, 새 신발을 사면 옆 사람이 힘껏 밟아주는 흔한 관습, 자식의 이름을 ‘개똥이’,‘말똥이’처럼 흔하게 지음으로써 오히려 오래 살기를 바라던 일 등의 풍속이 보여주듯, 사람들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을 형식적으로라도 묶어놓음으로써 두부 자르듯 썰어낼 수 없는 인간 삶의 모순과 모호함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삶과 죽음’의 영역을 뒤바꾸어버림으로써 ‘진리’를 설파하는 종교이기도 하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예수의 말이 그렇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모든 것의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바로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시작이 온다는 진리가 기독교 윤리에 담겨 있다.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부활’이 기독교의 핵심 사건인 것은 그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개념을 그렇게 쉽게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언제나 고통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는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반대로, 고통 역시 행복이 있기에 가능한 개념이다. 병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자살을 앞둔 이는 바로 그 극도의 고통이 있기 때문에, 자신과 함께 죽음을 택하기로 한 남편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것이고, 그러한 사랑을 가졌다는 것에서 행복이 무엇인지도 동시에 깨달았을 것이다.

  최윤희 씨가 생전에 아줌마들 앞에서 ‘전도’한 ‘행복’이 사실은 ‘환상’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그런 행복’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최소한 죽음을 ‘끝’이자 ‘종말’로 보지 않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새로운 길을 “떠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 삶과 죽음을 그렇게 배타적인 개념으로 설정하지 않는 가운데, 최윤희 씨는 인간 삶의 모순과 모호함을 대면하고 있다. 그녀가 우리에게 남기는 ‘행복’의 질문은 그래서 그녀의 ‘죽음’과 함께 비로소 새로 ‘살아난다’. 같은 길을 걸었던 앙드레 고르 부부처럼, 최윤희 씨 부부 역시 남아 있는 이들에게 그러한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홀연히 떠났다. 행복이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이고, 죽음을 뛰어넘을 만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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