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1월 2010-11-01   1146

동화 읽기-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사는 이웃 ‘이주자’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사는 이웃 ‘이주자’

『울지마 샨타!』
공선옥 글
김정혜 그림
주니어랜덤, 2008년 3월

주진우 『참여사회』 편집위원, 평화박물관 사무처장

 

최근 개봉한 영화 <방가?방가!>를 봤다. 한국 사람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외국인노동자로 취직한다는 설정과 그에 따르는 코믹 코드, 노래 경연대회의 감동을 결합해 상당수의 관람객을 극장으로 모으는 데 성공한 듯하다. 이 영화가 이주노동자 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하는 계몽영화는 아니지만 그 영화 속에서 차별과 불안 속에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표정을 영상으로 접할 수 있어 좋았다.

  외국인 100만 명 시대라는 말이 들린다. 한국사회에 외국 사람이 많아졌으니, 우리도 이젠 좀 배타성을 버리고 수용적인 자세를 가지자는 취지의 다문화 캠페인도 부쩍 늘어난 듯하다. 그러나 외국인 100만명 시대라는 말은 사실 많은 다른 사실을 감추고 있다. 넘쳐나는 ‘다문화’도 처음에는 반가웠으나 이젠 오히려 진부하고 진실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울지마 샨타!』는 이주노동자 자녀의 시선에서 한국사회와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 책은 ‘외국인 100만명 시대’나 ‘다문화’에 가려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들. “넌 왜 하필 방글라데시 애니? 네가 미국 애라면 얼마나 좋아.” 샨타의 한국 친구인 가현이 엄마가 한 말이다. 그 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아이를 이주노동자 아이와 놀도록 ‘허용’하기까지 하는 비교적 호의적인 사람이다.

  영화 속에는 이들이 산업연수생이나 고용허가제의 한시적 노동자로 한국으로 들어와 불법체류자로 살 수밖에 없는 현실, 폭력적인 단속과 추방 정책 속에서 하루하루를 긴장과 불안 속에서 지내는 상황, 당장은 임금이 싼 일손이 필요해서 쓰지만 불법체류자란 신분을 이용해 월급을 떼먹고 부당한 대우를 하는 공장 사장들, 한국 정부의 가차없는 단속과 강제 추방, 그리고 무엇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돈 벌러 온 사람을 바라보는 한국 사람들의 멸시의 시선들이 잘 드러나 있다.

  당연하게도 이 책은 이런 현실들을 분석적으로 기술한 논문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 그것도 아이의 시선이 담긴 동화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지만 그것은 딱딱한 분석이 아니라 하나의 삶, 그리고 다양한 감정으로써 이다. 추상적인 ‘외국인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사람마다 다른 구체적인 인격과 정서를 가진 사람들로서이다.

  샨타를 잘 이해해주는 한국인 ‘절친’ 가현이는 샨타가 ‘같은 외국인’인 제치크와 잘 놀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샨타는 제치크를 ‘같은 외국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그랑 노는 게 재미없어서 놀지 않는 것인데, 이를 가현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 아이인 가현이 눈에는 샨타나 제치크나 똑같이 외국인으로 보이는 것이다.

  사실 이는 ‘다문화’의 시선이기도 하다. ‘다문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또 다른 동일성의 위험을 안고 있는 인식이다. ‘다문화’의 전제는 ‘우리나라’라는 주체와 ‘다른 나라’라는 객체의 공고성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다 같다는 인식을 깔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인식이 이주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공통의 차별을 기술할 경우 일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과 관계하고 소통할 경우에는 오히려 커다란 제약이 된다. 우리는 ‘이주노동자’라는 추상과 친구가 될 수는 없다. 샨타나 샤말, 띠엔같은 구체적 인격들을 만나야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방글라데시나 베트남 혹은 네팔의 문화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소중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치 이주노동자들을 이해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이해는 구체적 접근이다. 이들의 차별적이고 고통스런 삶도 보편화된 ‘이주노동자’의 상황으로가 아니라, 구체적 인격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슬픔과 고통으로 만나야 한다. 이 동화의 시선처럼 말이다.

“OOO은 원래 그렇잖아”

이 책은 사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편견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보여준다. 샨타는 한국 남자 아이들의 “여자들은 원래 띨띨하잖아.”라는 말과 가현이의 “아줌마들은 원래 그렇잖아.”라는 말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은 원래 그래.”라는 말을 연상한다. 우리가 가진 바탕을 성찰하지 않고, 이주노동자 문제에서만 뾰족한 해답을 바랄 수는 없다. 그것은 어떤 집단을 무리지어 동일하게 규정하려는 폭력이다. 그것이 폭력인 것은 그것을 행사하고 그런 인식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 주류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폭력인 것은 그 피해자가 우리 사회 비주류와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외국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안에는 허구한 문제들이 있다. 외국인들을 불러다 놓고 한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텔레비전 연예 교양 프로그램들은 때때로 그들 눈에 비친 우리 사회를 객관화하거나, 나라마다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기도 하지만 거기에 이주노동자의 시선이 담겨있는 적은 거의 없다. 한국에 온 외국인의 칠팔십 퍼센트는 이들 이주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일 텐데도 말이다. 유학생들과 전문가 집단들도 한국 사회에 적응하느라 고충이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우리 경제를 싼 값에 지탱하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들여온 우리 사회 바닥에 있는 다수의 이주노동자들의 실체를 공중파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들이 뉴스에 등장하는 것은 범죄를 저질렀을 때뿐이다.

  서울의 인사동을 지나가는 백인 청년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과 우리 애가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 아이와 사귀는 것을 불편해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은 어떤가. 

  그들의 삶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그들은 왜 이 험난하고 배타적인 곳에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 직장을 알아보듯이 가난과 가망없는 미래가 그들을 여기로 보냈겠지,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작가는 결국 샨타네 가족을 방글라데시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수의 이주노동자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 이 땅에 어떻게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송출수수료 빚을 갚아야 하는 이유에서든, 고향의 가족의 생계를 위한 것이든 그렇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이주자들 아닌가. 아이들은 전학을 가고, 직장을 구하고 옮기고, 어떤 다른 사회로 이동하면서 산다. 그럴 때 느꼈던 불안과 부적응은 이주민들에 비해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이기도 하고 그 성격도 판이하게 다르지만, 우리가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고자 할 때 우리는 늘 이주를 꿈꾸거나 실행한다. 그런 점에서 이주자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왜 이 땅으로 건너와서 이 고생을….” 이란 의문 대신에 현재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을 만나자.

  샨타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기쁜 일과 슬픈 일을 모두 글로 남기고 싶어 한다. 글쓰는 사람이 되어서 쓴 글에서 샨타가 만난 우리들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샨타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냥 샨타로 만나준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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