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1월 2010-11-01   1196

칼럼-등신불(等身佛)

등신불(等身佛)

 
 
 
이태호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구소련이 해체되었던 1991년 봄, 저는 대학교 5년을 꼬박 다니고도 졸업학점이 모자라 11학기째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동료들은 대부분 졸업했거나 직장을 찾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저는 몇몇 친구들과 학생운동에 남아 어설픈 ‘지도부’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표현은 전혀 겸양이나 냉소의 표현이 아닙니다. 당시 저는 모든 것에 의기소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생운동에 뒤늦게 동참한 저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선배들과 동료들에 의지해 요구받는 일만 그럭저럭 해오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돌아보니 나를 이끌어주던 이들은 사라지고 저와 소수의 동료들만 아직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정파 논쟁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회운동의 당위나 중요성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가 후배들을 이끈다거나 동료들에게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었고, 그걸 평생 직업으로 선택하는 일은 더더욱 무모하게만 느껴졌습니다. 동료들에 대한 원망도 전혀 없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럴 정신적 여유도 없었습니다. 돌아보니 학점도 엉망이고, 운동가로서의 자신감도 없고, 심지어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변변히 오래 유지하지 못하는 저 자신이  한심해보였고, 그런 걸 걱정하고 있는 저 자신이 나약해보여 괴로웠습니다. 이도저도 아닌 것 같았고 불안했습니다. 한마디로 ‘뭘 먹고사나?’ 하고 소심하게 걱정하고 있었던 게지요

그러던 중 짧은 수필 속 구절 하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문득 부끄러움을 느끼고 새벽녘에 뉘우쳐 본 적은 있는가? 네 근짜리 짐을 질 수 있는가? 삼십 리 길을 걸어갈 수 있는가?”

루쉰魯迅, 잡문 <분에 못이겨 죽다> 중에서

 

봉천동 달동네 자취방에서 이 글귀를 읽던 그 새벽에 저는, 골목길을 지나 일터로 나가는 이들의 발자국 소리도 함께 들었습니다. 봉천동 달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막노동이나 행상을 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새벽 공기도 느낄 겸, 문밖으로 나가봤습니다. “동도 트지 않은 찬 새벽에 돈 벌러 나가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구나?” 새삼 놀랐습니다.

 

루쉰의 글귀처럼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문득, 과연 내가 ‘네 근짜리 짐’을 질 수 있는지, 저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날 당장 공사판 ‘오야지’였던 셋방 주인아저씨에게 부탁해 ‘타이루’ 공사 보조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그해 봄에는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도중 경찰에 의해 사망한 것을 계기로, 3당 합당-민주자유당 해체 요구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일을 시작한 저는 새벽엔 ‘노가다’, 저녁에 시위, 밤에는 평가회의, 그리고 다시 새벽일로 이어지는 혹독한 두 달을 보내야 했습니다. 몸은 고되었지만 마음만은 한없이 평온했습니다.

 

두 달 후 동료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일어나 서울을 잠시 떠나기까지, 내 노동의 대가로 60만 원을 벌었습니다. 더불어 제가 등짐을 남들만큼은 진다는 새로운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네 근짜리 짐을 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로부터는 더 이상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고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천에 잠시 피해 있던 여름 동안에는 컨베이어 벨트를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노동운동 같은 거창한 목표 때문이 아니라 단지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단지대와 평야지대가 만나는 부천의 어느 한적한 변두리, 가난한 노동자 가족 여러 세대가 기거하는 쪽방 촌에 거처를 정했습니다.

 

한밤중에 논 사이로 난 가느다란 농로를 따라 산책을 나가곤 했습니다. 자욱하게 안개가 내리기라도 하면, 앞뒤로 길이 사라져 오로지 회색 공간 속에 나 자신과 푸르게 번져가는 달빛만 존재하는 것 같은 몽환적인 풍경이 연출되곤 했습니다. 사위는 온통 회색이었지만 앞으로 나아가면 마치 나를 위해 길이 열리듯이 꼭 필요한 만큼의 길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종종 해체되어버린 사회주의 체제의 현실을 풍자하는 가십 기사가 실리곤 하던 때였습니다. 그 중 구소련 노동자들의 세 가지 특징을 설명하는 기사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말은 청산유수지만, 일은 안하고, 매사에 무책임하고 냉소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사를 읽으면서 소련 노동자들과 쪽방촌에 사는 한국 노동자들의 일상이 대비되어 떠올랐습니다.

쪽방촌에 사는 한국 노동자들은 어쩌면 그렇게 소련 노동자들과 정반대인지!

자기주장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어눌하고,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 하며,

부패한 정치인과 재벌을 욕하며 소주잔을 기울일지언정 ‘생산성 향상’ 표어 아래서 말없이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한국의 노동자들.

열심히 일해도 여전히 가난하고, 정치와 제도로부터 늘 소외당하고 배신당해온 그들…
한국의 노동자들도 청산유수로 정치토론에 끼어들고, 게으를 권리를 논하며,

당국과 회사가 내건 미사여구에 냉소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사회주의 체제는 루쉰의 표현대로라면 ‘분에 못이겨’ 스스로 몰락해버리고 말았지만, 깃발은 사라졌어도 현실 문제는 여전히 남아서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상식 밖의 월스트리트’를 풍자하는 가십 기사가 예전에 구소련 노동자들을 풍자하던 지면에 실리고 있습니다. 세계 정상들이 모여 투기자본 규제방안을 모색한다는 기사 옆에서. 

  

40년 전 11월 13일, 동대문 시장에서 한 봉제공장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손에 들고 분신했습니다. 아, 전태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혹은 사위가 온통 회색인 안개 속에서도, 더욱 더 또렷해지는 영원한 푯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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