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0월 2010-10-01   1236

동화 읽기-울기엔 좀 애매한

울기엔 좀 애매한

『울기엔 좀 애매한』
 최규석 지음
 사계절
 2010년 7월


주진우
『참여사회』 편집위원, 평화박물관 사무처장

 

입시경쟁에 내몰리는 청소년들의 고통이 깊게 꿈틀댄다. 화산 밑에 끓고 있는 용암같이 불안하다. 그 폭발력을 알 수 없는 절망을 어찌해야 할까. 이들의 비명과 절망은 단지 공부에만 죽어라 매달려야 한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꿈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오지 않을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무작정 유보해야만 하는 악무한 구조의 단단함에서 온다.

 『울기엔 좀 애매한』은 어찌 보면 특수한 얘기이다. 대학 입시생들이긴 하지만, 만화학과로 진학하려는 만화가 지망생들이 등장한다. 아 참, 이 책은 만화다. 만화가 지망생들이 보통의 청소년들을 대표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좀 미묘하다. 자신의 예술적 재능과 꿈을 펼치려한다는 측면에서 음악, 미술 등 예능계 지망생들과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우리 사회가 만화라는 매체를 대접하는 수준을 반영하듯이 일반 아이들에 비해 더 무관심한 상황에 방치되어 있다. 이러한 미묘한 위치가 꿈과 현실이 가지는 갈등과 격차를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학원 앞 조그만 분식집을 운영하는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원빈, ‘모태가난’ 집안의 큰 아들 은수, 재능은 뛰어나지 않지만 부잣집 딸인 지현, 술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학원에 다니는 은지 등의 이야기가 때로는 홀로, 때로는 겹쳐져서 그려진다.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아이들이지만 막상 이야기는 극적이지 않다. 고난을 이겨내는 주인공들의 감동적인 이야기하고는 거리가 멀다. 달콤한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대중의 기대와 유혹을 떨쳐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희망의 조짐마저 열어놓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은 고난을 낳고, 이야기가 끝나는 곳에서 다시 절망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집에 차압딱지가 붙었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은수의 동생은 자기는 곧 취업나갈거라 얘기하면서 차라리 “나한테 꿈이 없는 게 참 다행스럽”다고 자조한다. 절망은 이런 것이다. 꿈을 가진 게 오히려 불행 하게 되는 상황. 가족이나 주변 사람을 희생시켜야지만 자기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상황. 이 얘기를 듣고 슬리퍼 차림으로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문자를 무시하고 거무스름한 다세대주택들 너머 불빛 찬란한 거리와 고층 아파트들을 바라보는 은수의 뒷모습은 이 책의 백미다. 책 제목처럼 울기엔 좀 애매하지만, 그래서 더욱 슬프다.

  온통 배반이다.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만화가의 꿈을 접고 있다가 입시를 몇 달 앞두고서야 학원에 등록한 원빈은 재능을 인정받고 일취월장하지만 결국 만화학과에 합격하고서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한다. 한 해 전 등록금이 없어서 재수를 하며 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뛰고 있는 은수는, 좋아하는 전 학원 동창이 대학에 입학해 학원 강사로 오면서 자신의 처지 때문에 연애관계를 지속할 자신을 잃는다. 원빈과 은지는 돈 많은 지현 부모와 학원 원장의 공모 때문에 수시 지원에서 지현에게 지원 기회와 작품을 빼앗긴다. 원빈이 아르바이트 하는 서점 주인은 ‘천민자본주의’ 운운하며 말로는 이 사회의 착취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원빈의 아르바이트 비를 떼어먹으려 한다.

  이들을 절망에서 구해줄 것은 결국 돈이다. 오랜 학원 강습에 따른 숙련도에도 불구하고 만화가로서의 창의성이 부족한 지현은 부모님이 돈을 써서 다른 학원 아이들의 작품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원하던 대학에 합격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비난에 눈물을 글썽이며 가방을 싸는 그가 과연 이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이들의 당장의 목표인 대학에 들어간다면? 강사인 태섭은 안다. 대학에 입학해도 “하루 열두 시간 넘게 햇빛도 안 들어오는 교실에서 시험 치고 평가하고 두 달을 반복하면, 우린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아득해질 거란 사실을. 만화를 그리는데 왜 대학교 학벌이 필요한가, 하면서.

  작가는 서문에서 자신이 동일한 상황을 겪어온 어른으로서 일말의 책임감이 이 만화를 그리게 했다고 고백했지만,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우리 어른들 잘못이야, 더 이상 아이들을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하면 안돼, 세상을 변화시켜야만 해’라고 다짐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른들이라고 상황이 더 나은 것은 아니다. 이 아이들이 겪은 절망이 몇 차례 되풀이 되면, 그냥 어른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혼해 따로 사는 원빈의 아버지는 아들 대학등록금이 없어서 동동거리는 엄마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도 컴퓨터 수리로 먹고 살기 바쁘다. 고객 집에서 나오면서, “나중에 전화오면 서비스 만족에 매우 만족이라고… 평점 낮으면 월급을 깍아서…”라고 부탁하는 게 더 절실하다. 학원 아이들의 마음을 속 깊게 알아채주는 강사 태섭이라도, 이 아이들의 상황을 어찌할 수는 없다. 결국 등록금을 내지 못한 제자를 소식을 듣고 침묵할 수밖에.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절망적이지만, 이상하게 재미있다. 데생이 뛰어난 그의 그림을 보는 즐거움 때문이기도 하고, 곳곳의 인물들 간의 대화에 등장하는 시도 때도 없는 유머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의 유머는 좀 독특하다. 현실을 잊게 만드는 초월적 오락으로서의 유머가 아니라 자학과 썰렁함을 무기로 하는 유머이다. “인생 찌질한 게 무슨 자랑이라고 맨날 그렇게 웃고 떠든대?” “그렇다고 울기도 좀 그렇잖아?” “웃거나 울거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 화를 내는 것도 가능하지.” “누구한테요?” “그게 문제지.” ㅋㅋㅋ, ㅠㅠ.

  아이들은 뚜렷한 해결책 없이, ‘어떻게든 되겠지’란 자기방관적 태도를 갖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 은수의 별명이기도 한 “어떻게든”의 태도는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면서도 이상한 위안을 준다. 그냥 살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않는다. 하는 데까지 해보는 삶, 자신의 꿈과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다. 세상이 아무리 절망스럽다하더라도 이런 태도마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희망의 단서이다. ‘울기엔 좀 애매한’ 탈출구 없는 자신들의 상황을 객관화하고 슬퍼하거나 좌절하거나 또는 극복하거나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그저 자신의 삶을 밀고 나가는 태도는 이 책에서 값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이야기의 내용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스타일로 살아갈 작은 힘을 준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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