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1월 2010-11-01   3892

나라살림 흥망사-조선시대 왕의 비자금, 내탕금

조선시대 왕의 비자금, 내탕금

정창수 좋은예산센터 부소장

조선의 땅은 왕의 것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왕은 이념적으로 국토와 백성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관료 중심 행정국가였던 조선에서 왕이란 전제정치의 주군이 아니라 가장 높은 관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에게는 국가 재정과 별개인 사실상 사유재산이 존재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왕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국가의 공식기구에서 담당했으니 이론적으로는 왕이 따로 개인재산이나 비자금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관료들은 왕에게 개인재산을 갖지 말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관료들이 끊임없이 주장한 이유는 왕이 막대한 양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로 왕의 비자금인 ‘내탕금內帑金’이라고 한다. 아무리 권력을 가진 왕이라 할지라도 공식기구를 통해서는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권이 강하고 법치가 어느 정도 보장된 조선시대였기에 더욱 심했다. 아무래도 정치를 하려면 돈을 아무도 모르게 쓰거나 마음대로 사용할 때가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또 왕실의 품위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다.

조선시대 내탕금의 두 얼굴

내탕금이라는 조선왕조 비자금은 태조 이성계의 재산에서 시작되었다. 고려에서 출세하기 전부터 이성계의 집안은 함경도 지역 최대의 실력자였다. 더구나 왜구의 침공이나 황건적의 난 등 전쟁에서 계속 공을 세우게 되고, 이 공으로 받은 상들은 대부분 토지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재산을 늘려 이성계가 왕이 될 때는 함경도 3분의 1 정도가 이성계 땅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조선 개국 후 신권정치를 주장하는 정도전 등이 국고에 환수할 것을 주장했는데, 계속 결론을 미루다가 태종이 정도전 등을 제거한 후에 왕의 재산이라고 선포했다. 신권에 대한 왕권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종의 비밀 특별회계인 내탕금은 내시로 구성된 내수사라는 기관이 관리했다. 물론 내시들은 내탕금에서 나온 전별금 같은 보상금으로 노후를 편안히 보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내시들이 왕에게 충성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관료들은 내수사의 재산이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내수사가 관리하는 토지와 노비는 왕의 재산이어서 관리들이 손대지 못하는데다가 소작료마저 낮았다. 그래서 백성들은 소작이라도 하려고 뇌물까지 주면서 치열하게 로비를 벌였다. 최소한 관리들의 수탈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땅을 바치고 소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기 땅으로 농사지어 세금이나 횡포에 당하느니, 차라리 낮은 소작료를 내는 내수사의 토지가 차라리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자금과는 달리 조선시대 왕들의 내탕금은 긍정적으로 쓰인 경우도 많았다. 정조가 사도세자 묘를 이장할 때 부근에 살던 백성들에게 땅값을 4배로 쳐준 것은 물론 이사 자금까지 주었다거나 영조가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거나 하는 경우가 그렇다.

  비자금은 왕만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다. 왕비와 대비들도 각자 비자금을 가지고 있다가 필요에 따라 사용했다. 결혼할 때 가지고 들어온 재산을 계속 소유했기 때문이다.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어머니인 엄씨는 진명여학교와 숙명여대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돈의 원천이 외국에 철도 부설권이나 광산 채굴권을 팔고 받은 비자금이어서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 부정부패가 망국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 왕족들의 대규모 불사佛事나 사치하는 데에 들이는 돈도 대부분 내탕금에서 지출했다. 왕비나 대비 등이 지출하는 것은 별도였다.

통치가 끝나도 내놓지 않는 통치자금

하지만 내탕금이 조선의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막는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다. 병자호란 이후 전란으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북벌을 내세웠던 명분을 실천하려면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다. 하지만 ‘군비를 강화하여 후금에 복수하자’고 외치면서도 정작 그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근본 대책은 마련하기 어려웠다.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수사를 움켜쥐고 왕족 가문들의 특권을 비호하는 한 양반들에게 군포를 거두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실제 양반들에게 군포를 거두자는 논의는 이후 200년이 훨씬 더 지난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가서야 실현된다. 왕이 모범을 보이지 않는데 기득권층이 동의할 리 없기 때문이다.

  많이 늦었지만 고종에 이르러서는 내수사를 내장원으로 승격시켜 황실 재산을 관리하게 했다. 그리고 각종 사업을 진행했는데 한때는 정부 재정보다 많을 때도 있었다. 물론 이 돈들은 헤이그 밀사를 보낼 때처럼 중요한 용도로 쓰이기도 했지만 비정상적인 재정 운용은 국가 시스템을 결정적으로 붕괴시켰다. 백성들이 왕실에 대해 실망하게 된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왕이 돈을 많이 가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국가의 개혁에 동참했어야 했다.

  고종의 문제는 비자금을 만든 것에만 있는 게 아니라 황제의 지위를 지키고 왕실을 보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종은 나라를 살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왕실을 살리려고 했다. 물론 그에게는 왕실이 곧 나라였겠지만, 그것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생각이었다.

  근대화를 위한 많은 사업들이 자금 부족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구한말 그 아까운 시간들이 흘러 망국의 길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비자금 추징을 피하기 위해 300만 원을 낸 것이 화제이다. 29만 원밖에 없다던 그의 꼼수가 또다시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이에 비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2천3백억 여 원이 환수되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비해서 관리 기술이 부족한 것인지 준법정신이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나마 고종은 왕실이라도 지켜 국가의 미래를 만들어 가려고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은 통치자금일까? 자칭 통치자금은 왜 모았으며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도 궁금하지만, 통치가 끝난 후에도 스스로 내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직도 무슨 통치할 일이 있는 것일까? 아직도 그들은 자신들이 왕(혹은 왕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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