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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3월
  • 2019.03.01
  • 486

월간 참여사회 2019년 3월호 (통권 263호)

 

참여사회 3월호 <특집>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시민의 눈으로 본 3.1운동’이라는 제목으로 꾸며집니다. 3.1운동 전후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시민’이라는 프레임으로 재조명하고 ‘시민운동’, ‘여성운동’, ‘사법제도’, ‘남북한 역사 서술의 차이’ 네 가지 측면에서 다뤄봅니다. 

 

 

특집1_시민의 눈으로 본 3·1운동

보통사람들의 
3·1운동

글.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만세열전』 저자

 

 

 

민족 저항을 부른 일제의 식민통치

1919년 조선인들은 파리강화회의로 대변되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국제적 합의를 통한 조선의 독립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그것은 객관적 정세를 넘어선 희망이었지만, 국치 이래 이어져 온 오랜 좌절의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가 3·1운동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면, 조선인들로 하여금 일제히 그 문을 통과해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은 일제의 식민통치였다. 조선은 타이완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전진기지에 불과했고, 그들이 내세운 문명통치는 전진기지에 걸맞은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에 한정되었다.

 

일제의 문명화는 기형적이고 성급하며 폭압적이었다. 일제는 경제 개발만 하면 문명화가 된다고 생각했고, 조선인과 조선의 문화를 ‘야만’이라 치부해 무시했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문화를 강요했고, 설득의 과정을 생략했으며,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헌병경찰이라는 막강한 힘으로 억눌렀다. 

 

무단통치 하에서 조선인들의 불만은 해소될 길이 없었다. 조선인의 정치 진출은 친일매국노들에게도 허용되지 않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는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본국에서 별 볼 일 없던 일본인들은 식민지 조선에 들어와 조선인 위에 군림했다. 그들은 온갖 횡포로 조선인을 차별했고, 조선인들은 일상적인 차별과 멸시, 폭력과 공포에 노출되어야 했다. 

 

면서기와 함께 나타나는 헌병경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몇 번이고 나타나 자신이 원하는 것은 관철시켰다. 조선인들의 가벼운 죄는 언제나 무겁게 처벌되었다. 헌병경찰의 ‘즉결처분권’은 남용되었고, 태형을 맞고 신음하는 조선인은 늘어만 갔다. 경제적 이권은 대부분 일본인들 차지였고, 일본인과의 송사는 백전백패로 인식되었다. 학생들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친일파가 되는 길 외에는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기 힘들었다. 일제는 교육제도를 차별해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는 길을 방해했다.

 

조선총독부는 아편과 모르핀을 생산해 공공연히 유통시켰고, 주요 도시에는 공창(公娼)을 설치해 매춘을 조장했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문명이라 생각했겠지만, 조선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미개하고 음란한 문화일 뿐이었다. 일본인들은 칼과 무기를 앞세워 조선을 정복했지만, 오랜 역사에서 오는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은 완전히 꺾지 못했다.

 

조선인들을 격동시킨 것

3·1운동 당시 심문기록 중에는 공중목욕탕 사용에 대한 조선인의 불만이 나온다.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장명식(張明植), 20세은 일본이 조선인을 차별하고 멸시하고 있다며 “예를 들어 본정(本町)의 욕탕에 가면 조선 사람은 목욕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고 말한다. 염상섭의 「만세전」에도 목욕탕에서 조선인이 겪는 불편을 묘사한 장면이 나온다. 공중목욕탕 문제는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에서 아주 사소한 부분에 속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사소한 일이 사람의 마음을 더 격동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염상섭은 적개심이나 반항심은 보통 피동적, 감정적으로 유발된다고 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소소한 언사와 행동으로 조선인에게 억제할 수 없는 반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조선인으로 하여금 민족적 타락에서 스스로 구해야겠다는 자각을 주는 가장 긴요한 동인이 된다고 했다. 경성고보 4학년 학생이던 박노영이 조선의 독립을 생각하게 된 이유를 묻는 예심판사의 질문에 “나날이 보고 듣는 일 중에 우리의 감정을 해치는 일이 많다. 그래서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생긴 것”이라고 한 대답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이렇듯 일제의 식민통치는 조선인들에게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했고, 독립만이 현실을 억죄는 모든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독립은 궁극적으로 자유·평등과 동의어로 인식되거나,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향을 투사하는 말이 되었다. 농민들이 독립이 되면 더 이상 뽕나무를 강제로 심지 않아도 된다거나, 동네의 사방공사에 억지로 동원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3월호 (통권 263호)

3·1운동이 이 땅에 남긴 족적 

기대했던 독립은 얻지 못했지만 3·1운동은 이 땅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일제의 통치는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으나 외형적으로나마 일정한 변화를 보였다. 먼저 총독이 교체됐다. 조선주차군사령관으로 조선에 와서 의병을 진압하고 총독이 될 때까지 승승장구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무능의 극치를 드러내며 여덟 명의 역대 총독 가운데 불명예 퇴진하는 첫 번째 총독이 되었다. 

 

새로 부임한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무단통치를 폐기하고 문화정치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일제는 조선태형령을 폐지한다던가, 교육제도를 개선한다던가 하면서 조선인들의 불만이 집중되었던 제도도 일부 개선했다. 지방자치를 도입한다며 지방제도도 뜯어고쳤다. 그러나 그들의 제도 개선은 기만적이었다. 실질적인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선전이 앞섰다. 뒤로는 친일파 양산에 적극 나서 조선인으로 조선인을 통제하려 했다. 일제 당국은 여전히 동화를 얘기했지만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3·1운동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일부 허용됐다. 이것은 일제 당국이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어 한 것이었다. 또다시 조선인들을 거리에서 맞이하는 것보다 제도 안으로 끌어들여 통제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일부 허용은 3·1운동이 가져온 가장 눈에 띄는 성과가 되었다. 조선인들은 이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민족운동을 확대해나갔고, 이는 조선 사회에 커다란 활력이 되었다. 1920년대 수많은 청년·종교·노동·여성단체가 쏟아지고, 청년의 시대, 단체의 시대, 대중의 시대를 연 것도 이로 인한 것이었다.

 

만세시위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양산했다. 이들은 만주와 상해로 달려가 독립운동의 새로운 주역이 되었다.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은 4월 10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8월에는 대한국민의회와 통합정부를 구성해, 민족을 대표하는 정부이자 독립운동 총본부의 역할을 담당하고자 했다.

 

만세시위는 독립운동의 방법도 다양화시켰다. 만세시위를 통해 ‘민족’을 실감하고, 자유·평등·민주주의를 각성한 사람들은 일부는 외교적인 수단으로, 일부는 무장투쟁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또 파괴와 암살을 표방한 의열단체가 나타나기도 하고,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제국주의국가를 타도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모두 3·1운동이 낳은 새로운 독립운동세대였다는 점이다. 의열단의 김원봉이 그랬고,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이 그랬다. 서울파 공산주의자 김사국, 상해파 공산주의자 이봉수 등 공산주의 주요 계파의 지도자들도 3·1운동이 낳은 새로운 독립운동세대였다. 이것은 3·1운동이 발생했을 때 일제 당국이 가장 우려했던 바였다. 3·1운동을 경험한 세대의 존재는 두고두고 일제의 통치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였던 것이다.

 

100년 전 ‘만세’가 오늘의 ‘촛불’과 닮은 이유

3·1운동의 경험은 조선 민중도 변화시켰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은 조선인들을 대하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들의 결집은 그들에게 공포까지 느끼게 했다. 3·1운동을 통해 다수의 힘을 실감한 조선인들은 이제 일본인들의 부당한 대우와 차별이 벌어질 때 참고만 있지 않았다. 기회가 되면 하나로 뭉쳤고 그때마다 만세를 부르며 다수의 힘으로 현실의 문제를 고치려고 했다. 

 

이렇듯 3·1운동은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일제의 압도적인 폭력과 강압에 독립은 쉽지 않았지만, 조선인들은 그들의 통치에 동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항거했다. 저항에 나선 이들은 저명한 독립운동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명의 보통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만들어 배포하며 싸움을 이어나갔다. 

 

100년 전 포기할 줄 몰랐던 평범한 사람들의 싸움이 오늘을 열었다. 민주주의가 파괴될 때, 국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가만히 있지 않고 일어나 당당히 싸우는 역사를 만들었다. 동학농민운동 이래 시작된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그 모습은 10년, 20년마다 어김없이 재현되어왔다. 처음에 그것은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한 싸움이었고, 나중에 그것은 훼손된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기 위한 투쟁이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1945년 건국운동이, 1960년 4·19혁명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이, 2016년 촛불혁명이 그랬다. 그 시작에 3·1운동이 있었다. 이것이 100년 전 ‘만세’가 오늘날의 ‘촛불’과 닮은 이유였다.  

 

성인이 지정된 장소에서 자유의사로 성매매 행위를 했을 경우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

 

 

참고문헌

권태억 「1910년대 일제의 문명화 통치와 한국인들의 인식」, 「한국문화」 61, 2013.

이종민 「가벼운 범죄, 무거운 처벌」, 「사회와 역사」 107, 2015.

권보드래 「만세의 유토피아」, 「한국학연구」 38, 2015.

기유정 「식민지 군중의 “길거리 정치”와 식민자의 공포(1920~1929)」, 「도시연구」 19, 2018.

 

 

 

특집. 시민의 눈으로 본 3·1운동 2019년 3월호 월간참여사회 

1. 보통사람들의 3·1운동 조한성

2. 유관순의 친구, 유관순의 동지 장영은

3. 법 앞에 불평등한 조선인 도면회

4. 같은 경험, 다른 기록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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