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0월 2010-10-01   1663

나라살림 흥망사-죽은 제갈공명이 중동 현대사를 힘들게 하다

죽은 제갈공명이 중동 현대사를 힘들게 하다

정창수 좋은예산센터 부소장

석유와 중국 어찌 보면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현대 석유 산업화의 일등공신은 중국이다. 그것도 죽은 제갈량이 현대의 중동을 힘들게 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중국의 삼국시대이다. 서기 208년 중국에서는 조조, 손권, 유비의 위(魏), 오(吳), 촉(蜀) 세 나라가 자웅을 겨루는 삼국시대가 시작된다. 이중 가장 열악한 곳은 유비의 촉나라였다. 촉은 영토의 대부분이 내륙 깊숙한 산간 지역이고 인구도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적어서 삼국 중 불리한 조건이었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바다에 접하지 않아 소금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소금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소금을 구하려 해도 북으로는 조조의 위나라가, 동으로는 오나라의 손권이 막고 있었고 남쪽은 베트남의 밀림이었다. 그러나 소금을 구하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는 법,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촉나라가 바다로 갈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유지하고 삼국통일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은 그들만의 비결인 소금을 구하는 고도의 기술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도 있던 방법을 제갈량이 있던 촉나라에서 개발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촉나라 사람들이 쓴 방법은 지하수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땅속을 깊이 파면 지하수가 나오고 더 깊이 파면 염수층이 나온다. 이 염수층은 소금이 녹아있기 때문에 소금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소금기 있는 지하수인 염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지하로 1킬로미터 이상을 파고 들어가야 했다. 지하 1킬로미터를 파 내려가는 것은 동네 우물 파듯이 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고도의 굴착 및 시추술이 필요하다. 더구나 심할 때는 4,800척 즉 1.5킬로미터까지 파내려가는 것도 예사였다고 한다. 사람이 직접 내려갈 수 없으니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다. 마침 제철업이 발달해서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여 가능할 수 있었다. 이때 파낸 흙을 실어 내오는 케이블은 대나무로 만들었다.

  이미 중국은 기원전 4세기경부터 이런 시추술로 염수를 끌어올려 큰 솥에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지하에서 소금을 캐낸 것이다. 더구나 중국인들은 소금을 얻는 과정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도 발견했다. 그래서 석유와 천연가스를 연료로 사용하고 대나무로 만든 파이프로 수십 킬로 떨어진 곳까지 이동시키기도 하였다.

  당시 석유가 나오는 우물을 화정(花亭)이라 하고 석유를 석칠(石漆)이라 불렀다. 요즘으로 치면 유전과 석유며, 대나무 파이프는 송유관이다. 비교적 최근인 1965년까지 중국 소금 공급량의 16.5%는 깊은 우물에서 퍼낸 염수로 만든 것이었다니, 이 기술이 중국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석유는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석유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사용되었고 구약성서에도 기록이 있으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아니었다. 그래서 19세기까지는 주로 등화용으로 사용했다.

  석유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시추술을 몰라서 지표면에 흘러나오는 적은 양을 사용하는 정도였다. 대단히 귀하고 비싼 연료였기 때문에 의약이나 종교의식, 접착제, 미라 같은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했다. 

  그러던 중 1828년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가 중국의 시추술을 발견하고 유럽에 알렸다. 처음에는 유럽은 물론 앵베르 선교사도 중국의 기술을 불신했다. 아무래도 미개한 중국이 대나무 케이블로 땅속을 1,500미터나 파내려간다는 것을 처음부터 믿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츰 증명이 되면서 과학계의 인정을 받고 1841년에는 사용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은 철도 건설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이 시추술을 배웠다. 그래서 1859년 최초로 이 방식을 이용했다. 이전까지 미국에서 시추 방식으로 쓰던 방법은 축락법이라고 하는 중국의 활시위 굴착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미국의 현대기술이 중국의 삼국시대보다 못한 기술 수준이었던 셈이다.

  서양이 석유 시추술에 있어서는 중국보다 최소한 1900년이 늦은 것이다. 그러나 이 기술의 전달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석유가 대량으로 공급되자 산업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자동차가 공급되고 전력 생산이 급증한다. 이른바 대량 생산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최대의 산유국 미국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그런데 이 기술의 발전과 산업화로 곤란하게 된 것은 중동이다. 중국의 시추술이 서구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만 하더라도 다른 지역에 비해 중동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아프간과 이란에서 러시아와 대립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식민지 쟁탈전은 주로 아프리카나 인도 혹은 태평양 같은 곳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1900년대 들어 석유 소비가 증가하면서 석유가 많이 매장되어 있는 중동은 1차 세계대전부터 격전장이 된다. 신이 내린 축복이 이들에게는 재앙이 된 것이다. 중동은 이 자원의 혜택을 몰랐고 사용할 줄 몰랐기 때문에 채굴 초기부터 석유자원은 유럽제국주의 국가의 소유가 되고 만다. 더구나 국가 체계도 갖추어지지 않는 등 정치체제도 허약했다.

  중동의 석유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축복일수 있지만 오히려 재앙이 된 것이다. 나름대로 그 지역의 환경에 맞추어 적응하며 살던 지역주민들은 석유로 인해 분쟁이 생기고, 석유로 인해 생긴 부 때문에 과잉소비를 하게 되는 등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소금을 얻고 생존하기 위해 개발했던 평화의 기술이 중동에 저주가 되고 전쟁의 원인이 되어 돌아온 작금의 현실을 삼국시대 유비와 제갈량이 다시 와서 본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최근에는 바다의 석유까지도 채굴하기 위해 개발하다가 멕시코 만 오염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미 문명의 흐름을 돌이킬 수는 없더라도 지금이라도 악순환의 고리를 완화시킬 방도를 찾는 게 필요하다. 문명의 흥과 망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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