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0월 2010-10-01   3083

김용민이 만난 사람- 김창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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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길, 8가지 뜻을 잡다

김창국 현 법무법인 양재 대표 변호사, 전 친일재산조사위원장

김용민 시사평론가 / 사진 김은진 작가

두산대백과사전에서 ‘잡다’라는 말을 검색했다. 무려 스물 네 가지였다. 생소한 단어도 아닌데 뒤진 이유는 김창국 변호사(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초대 국가인권위원장,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장)를 9월 17일 오후 2시30분, 법무법인 양재 사무실에서 만나 고희(古稀) 인생을 되짚어보면서였다. 기막히게 떨어졌다.

 

 

1. 일, 기회 따위를 얻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제13화 고등고시 사법과로 법조계에 입문했다. 검사가 된 것이다. 이후로 대검 검찰연구관, 광주지검 부장검사를 거쳤다.

 

2. 권한 따위를 차지하다
대단한 권위였다. 아버지, 삼촌뻘 되는 사람이 찾아와 “영감님”하며 고개를 숙이니 말이다. 사실 본인이 ‘내가 이런 권력을 가지니까 와서 고개 숙이는 것’이란 생각을 안 했을까. 아니었다. 그러나 연기는 표 나게 돼 있다. 자신만큼 인격과 원칙 준수를 한 몸에 품는 검사도 보기 드물다는 자신감 또한 대단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이 연기하는 사람의 비율을 30%, 반대로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에 자신에게 넙죽하던 사람 70%로 여겼다. 환상은 검사 생활 끝나고 변호사를 개업하면서 완전히 깨졌다. 후자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검사들 있는 자리에 강의차 가게 되면 이런 이야기를 꼭 하게 된다고 한다. ‘겸손 하라’는 취지에서. 하지만 “그건 옛날이야기입니다”라며 코웃음 치더란다. 기막혔다. 옛날과 지금, 뭐가 달라졌는데, 그 젊은 검사들, 저토록 자신할까.
 

 

3. 실마리, 요점, 단점 따위를 찾아내거나 알아내다.

대중에게 '권력의 청부기관’ 쯤으로 낙인 박힌 검찰을 떠났다. 김창국 변호사는 이때부터 ‘인권 변호사’로 거듭난다. 놀라운 변신이다. ‘강병철과 삼태기’가 메탈그룹을 결성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나만 경이로웠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한번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한 젊은 변호사가 정중하고 진지하게 물었다고 한다. “부장검사까지 하시고 어떻게 민변에 몸담으시나”라고 말이다. 따지고 보니 민변에서 검사출신은 시니어그룹부터 젊은 층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감을 찾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력이 김창국 변호사의 유명세를 더하게 만든 힘은 아니었다. 1987년 김근태 고문사건 공소유지 담당 변호인(특별검사),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사건과 윤석양 이병 사건의 변호인 등 주요 시국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1988년 민변 창립에 참여했으며, 서울변협 회장으로 있으면서 서민들을 위해 당직변호사제를 시행했고, 대한변협 회장 때는 변호사의 공익활동을 의무화하는 변호사법 개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족적 하나하나에 철학과 일관성이 박혔다.

검찰 개혁에 대한 질문으로 화제를 몰았다.

“박정희의 청와대는 정권 유지에 있어서 검찰력이 ‘전가의 보도’라는 점을 알게 됐지요. 그래서 인사권을 손에 넣어 검사들 수사 방향까지 좌지우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검찰총장, 법무부장관이 막아줘야 하는데, 막아준 사람,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검찰에게 구속 대신 불구속 수사를 지휘하다 그만둔 법무장관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위’에서 내린 불구속 결정이라 이행할 수밖에 없던 처지였죠. 이행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총리대신 참모로서 그 명을 거역할 수 없어 그런 결정을 내렸지만, 내가 양심에 비춰 볼 때 대단히 잘못된 결정이었다. 나는 물러난다’라며 사퇴했어요. 자존심이 있었던 거지요. 인사권은 권력으로부터 분리, 독립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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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손으로 움키고 놓지 않다.

그러다 2002년, 한국 사회에 ‘기본권’의 의미를 바로 새긴 국가인권위원회 초대 위원장 자리에 오른다. “인권위원회가 독립기구여야 한다는 것은 1993년 12월 파리 유엔총회에서 국가인권기구의 준칙을 세우면서부터였지요. 사실 인권을 다루는 정부기관이야 많이 있습니다. 한국만 하더라도 법무, 고용노동, 보건복지, 여성부 등이 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게 돼 있습니다. 정부로부터 독립된 인권 보장 기구는 그래서 필요합니다.”

독립기구. 하긴 법원 검찰 권력도 명목상 독립기구이다. 그러나 반만년 역사 어느 순간에 이에 부합하는 이름값을 했던가. 다행히 ‘인권의 가치를 위해 권력과 대립할 수 있다’는 관념을 가진 김대중 대통령과 일을 하게 됐다. 그래서였을까. 청와대 수석비서관 조차 인권위원회를 실질적인 대통령 직속기구라고 생각했다. 이걸 바로 새기는데 1년 이상 걸렸다. 인권위원회 직원을 100명으로 한정하려던 정부와 맞서, 216명으로 관철하는 ‘정치력’도 어쩌면 인권위원회가 어떤 기구인지를 관료들에게 심어주는 계기라면 계기였을 터. 인권위원회의 르네상스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김창국 전 대표가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일화 몇 가지를 정리해본다.

○ 김대중 대통령은 내가 추천하는 인권위원 안을 그대로 수용했다. 힘이 인권위에 쏠리게 되자 청와대 일부 수석실에서 일종의 기세 싸움을 걸어왔다. ‘김창국 위원장이 대통령 허가 받지 않고 외국 출장을 했다’고 언론에 흘린 것이다. 몇몇 신문은 “인권위는 정부 예산 안 쓰는가”라며 김창국 위원장을 몰아세웠다. 흐름을 간파한 김창국 위원장, 빈틈없는 논리를 만들어 반박에 나섰다. 연속적으로 말이다. 청와대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 당시 여권 주변에는 요직 발탁을 갈구하는 재야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많았다. 따지고 보니 인권위원회는 좋은 거처였다. 이 때문에 김창국 위원장 책상에는 이력서가 잔뜩 쌓였다. 김창국 위원장은 이를 묶어 자료로 활용했다고 한다. 어떤 용도였냐고? 블랙리스트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창국에게 부탁하면 역효과가 난다’는 소문이 여권에 퍼졌다고 한다.

○ 노무현 대통령 시대가 열렸다. 정권 초, 미국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이라크 전쟁 참전이 결정된다. 김창국 위원장,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국무회의에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위원장에 대해 제재가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이 그때 “인권위는 그런 일 하라고 있는 곳입니다. 넘어 갑시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내도 하루 이틀이다.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 도입 문제를 놓고 논란이 있을 때, 김창국 위원장 시절 인권위원회는 “개인 신상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했다. 이런 반대 저런 저항에 치였던 집권 중반기의 노무현 대통령, 격노했다고 한다. 하지만 격노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노무현 대통령도 인권위원장으로 있는 동안 나한테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문제 삼거나 압박을 가한 일이 없었어요.”

쟁점이 붙은 문제, 특히 인권 업무를 분산 또는 이관하려는 관료 사회의 건의가 있을 때마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창국 위원장을 불러 견해를 듣고는 그 뜻을 대부분 존중해줬다고 한다. 청와대와 내각 쪽에서는 심히 불쾌하게 느꼈겠지만 인권위는 그렇게 순항하며 안착했다. 지금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돼 버렸지만.

5.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굽거나 잘못된 것을 바르게 만들다.

참여정부 때 김창국 변호사는 2006년 정부 위원장 자리를 또 하나 맡게 된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장. 더 이상의 당위론은 사족이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가 일제에 부역하면서 획득한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환수해 독립운동가 후손 등 건국 수훈가문에 부여하는 것에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궁금했다. ‘친일하면 3대가 영화를 누리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가난하다’는 말이 맞는지. 그랬단다. 조사대상 450여 명 중 선조의 혐의가 입증되고 소재가 파악된 168명, 대체로 부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창국 위원장의 절망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한 명이라도 나올 줄 알았어요. ‘우리 선조의 행위는 잘못입니다. 기꺼이 내놓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양식 있는 후손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은 사실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했다’라며 두둔하기 일쑤였죠. 그런 두둔, 억지입니다. 다 조사했습니다. ‘남모르는 독립운동가’ 경력, 사실로 확인이 안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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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흥분되거나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다.

사실 위원회 안에는 역사학자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친일 행위의 단죄라는 역사적 당위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 사람,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김창국 위원장은 법률가의 양식을 고집했다. 법 논리에 맞춰 단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자 있는 판단 때문에 패소 등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 친일재산환수의 역사적 명분에 흠집이 생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7. 어떤 상태를 유지하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 이런 의미에서 인권위원장, 친일재산환수위원장, 이 두 자리는 일맥상통하다. 공직을 훌훌 털고 원로 인권 변호사 신분이 된 김창국 위원장에게 수년에 걸친 공직 생활의 소회를 물었다. 권력과 각을 세우며 ‘My way’를 걸었건만 그의 입에서는 ‘노무현’이라는 권력자의 이름을 주어로 한 문장이 흘러나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더 오래 사셨으면 했지만 천수(天壽)를 누린 셈이었죠.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침없는 언변이 논란이 됐을 때엔 저도 같이 비난했지만 바른 역사의식과 철학 또 인권 감수성을 가진 대통령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기억납니다. 종로에서 국회의원 하다가 부산에 내려가 출마하겠다고 했을 때지요. 나보고 후원의 밤 축사를 부탁하더라고요. ‘그 돌쇠 같이 미련하고 고집스런 선택을 했지만, 아무도 흉내 못 냅니다’라고 했어요. 얼마 전 봉하마을에 가서 추모 박석에 새길 글을 알려 달라고 했을 때, ‘당신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역사인식과 철학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답했어요.”

친일재산조사위원장 자리는 공교롭게도 2년은 노무현 정부, 나머지 2년은 이명박 정부에서 지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도 물었다. 이런 답을 들었다.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 인권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오로지 전 정권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 잘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고요. 친일재산조사위원회를 다른 과거사위원회와 통폐합하려던 시도를 보며 느낀 감회입니다.”
 

 

 8. 『…을 …으로』 계획, 의견 따위를 정하다.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하면서 놀랐어요. 생활비는 물론 용돈도 안 될 보수지만 참여연대 상근자들, 정말 사명감과 열정으로 일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나마 최소한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실은 이들의 사명감과 열정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 분들, 존경합니다.”

김창국 전 위원장은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두 번이나 맡았다. 맑은사회만들기본부장일 때엔, 원로 법조인 체면을 벗어 버리고, 대중 앞에서 연설도 하고, 어깨띠 두르고 서명도 받기도 했다. 실천 속에 애정이 샘솟기 마련이다.

기왕 이야기 나온 김에 적체된 시민운동에게 활로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이명박 정부가 최근 ‘공정한 사회’를 기치로 내걸었지요. 코웃음 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런 걸 너희들이 할 수 있겠는가’라며 시작부터 냉소적으로 나와서는 안 됩니다. 공정한 사회란 무엇인지, 그 사례는 무엇인지 정부를 지도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완수한다면 우리는 지지하겠다’라는 입장까지 밝혀야 합니다. 이 정부를 좋은 길로 견인해 가야 합니다.” 좬참여사회좭 지난 호에 이어 이번에도 만난 시민운동의 원로들, 한결같은 입장이다.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는. 거듭되는 조언이다. 이런 지적에 우리가 귀를 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창국 변호사의 인생을 ‘잡다’로 풀어봤다. 24가지 중 1/3인 여덟 가지가 이 안에 녹아 있다. 나머지 중에는 ‘돈이나 재물을 얻어 가지다’, ‘노름 따위에서 어떤 끗수나 패를 가지다’, ‘남을 모해하여 곤경에 빠뜨리다’, ‘기분, 일 따위를 망치다’ 등의 부정적 내용도 적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부덕의 소치’ 따위는 허용하지 않은 ‘다 잡은 처신’은 요즘 3당4락(‘비리 의혹이 세 가지로는 부족하고 네 가지쯤 돼야 공직에 발탁된다’는 뜻) 정부에 큰 귀감이 된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상실한 도덕성, 무너진 민주주의의 기틀을 부여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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