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8월 1999-08-01   773

모금은 과학이다

극우 해리티지 재단에서 배운 시민운동 노하우

지난 호에 이어 박원순 변호사의 미국시민단체 기행, 워싱턴D.C. 편 중 일부를 2회에 나누어 연재한다. 국무성 한국과장 Mr. Evans Revere, 민주주의가 덜 진전된 국가들을 지원하는 NED, 무려 20만 명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극우보수주의의 싱크탱크 ‘해리티지재단’ 등이 눈길을 끈다.

1999. 3. 27 토요일 필라에서 D.C로

벌써 몇 달이나 묵은 것 같은 필라델피아를 떠난다. 그 사이에 벌써 정이 든 팰로우들과 일일이 작별인사를 하면서 각자 자신의 관심사를 따라 여러 도시로 흩어져 갔다. 워싱턴으로 가는 코치에는 루마니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터어키, 스웨덴에서 온 팰로우들이 탔다. 맑은 하늘, 아직은 마른 나무들이 워싱턴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길을 덜 외롭게 해 주고 있었다. 그 나무들은 이윽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그리고 마침내 무성한 잎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 소리 없는 생명의 전쟁을 우리는 썰렁한 공기 안에서도 한줄기 봄의 느낌 속에서 감지할 수 있다.

피곤했는지 2시간 반이 걸린다는 워싱턴 행 길에 한참 자고 났더니 금방 “워싱턴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간판을 볼 수 있었다. 북쪽 입구 워싱턴은 한참 달리는 동안 백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흑인 투성이였다. 워싱턴의 밤은 클린턴과 힐러리 외에는 모두 흑인으로 가득차 있다고 하는 농담이 생각났다. 토마스 서클을 지나 곧 펜실베니아 애비뉴에 다다르자 낯익은 건물들이 드러났다. 상무성을 포함하여 연방건물들, 저쪽 멀리 백악관과 캐피톨 힐 등이 우리를 반겼다. 내가 농담삼아 가이드를 자청해서 이런 저런 소개를 하고 합리적인 비용을 받겠다고 하자 모두 웃었다.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Inn에 여장을 풀자마자 뒤늦은 점심을 해결하러 나갔다. Watergate Hotel 아래 상가지역의 중국식당으로 들어갔는데 카운터를 보는 사람이 아무래도 한국사람 같아서 물었더니 역시 그랬다. 자신은 에너지관리공단에서 일하다가 잠깐 유학온 남편 따라 여기 와서 집에만 있기 무료해서 나와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주인이 한국사람이라고 했다. 어디서나 식당, 세탁소, 식품점, 편의점 등 조그마한 중소 가게들은 한국사람들이 경영하는 데가 많았다. 좀 더 큰 가게, 더 나아가 제조업으로 진출해 큰 사업들을 해야 하는 단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는 약속한 대로 박지원 씨 부부가 우리를 픽업해서 일본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노광욱 박사님 부부도 함께였다. 박지원 씨는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 Asia Human Rights Watch가 한국문제를 심각하게 다룰 때 그 일의 담당자로서,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 사무실 직원으로 열심히 활동하던 아가씨였다. 지금은 리차드라는 미국청년과 결혼해서 함께 나왔다. 활달하고 밝은 청년이었다. 지금은 유나이티드테크놀로지에 근무하는 지원이는 곧 그곳을 그만두고 다른 투자회사 쪽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노광욱 박사님은 치과의사로서 과거 통일운동과 조국의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지원하던 그런 분이었다. 이효재 선생님의 제부이기도 하였다. 나와의 인연으로 미국에서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한 김용성 선생의 문헌을 몇 박스나 역사문제연구소에 기부한 분이기도 하다. 1993년 내가 미국에서 체류할 당시 몇 차례 뵙고 포토맥강변 아름다운 그분들의 주택에서 맛있는 연어구이를 대접받기도 하였다. 그때로부터 6년이 더 지났는데 아직도 그대로 정정하신 모습이 반가웠다. 그러나 운영하는 치과병원은 사실상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이 환자도 없고 그래서 시간이 많다고 하셨다. 언젠가는 외국에서 이렇게 열심히 활동한 분들의 이야기가 역사로 정리되고 기억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그 일을 좀 해 줄 수 없는가. 저녁을 마치고 호텔에까지 데려다 주고 가셨다.

1999. 3. 29 월요일 11 : 30 국무성 한국과장 Mr. Evans Revere 방문

에반스 과장은 이미 한국문제만 2~30년 다루어 와서 완전히 남북문제를 꿰뚫고 있는 듯 했다. 얼마전 북미회담에도 부단장으로 참가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한국의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미국정부로서는 대체로 지지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의회내에서는 평양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강경파까지 있지만 대체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앞으로 있을 대통령선거에서 고어 부통령이 당선되면 대체로 클린턴 정부의 입장을 승계하겠지만 부시 지사가 당선된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이렇게 답변했다. 전혀 알 수 없다. 부시 지사는 아직 한번도 대북문제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는 이미 북한과 한국을 수없이 다녔고 특히 1988년 무렵 보스워스 대사 시절에 북한대사관 창설 가능성이 있어 그 준비요원으로 뽑혀 한국에 1~2년 근무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그게 어려워져 결국 국무성으로 다시 소환되었다고 했다. 부인도 한국인이고 이름이 미자라고 해서 웃었다. 집사람이 자신의 이름 난희의 ‘희’자나 당신 부인의 이름 ‘자’자는 한국 여성의 가장 흔한 이름이라고 했더니 맞다며 웃었다.

내려오면서 수위에게 국무성 식당이 추천할 만 하냐고 했더니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하였다. 조그마한 카페테리아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것보다는 너무 좋은 날씨여서 바깥에서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일단 바깥으로 나왔다. 길거리의 노점상에서 핫도그 두 개와 음료수를 사 링컨메모리얼 부근의 숲에서 점심으로 때웠다. 3월말인데 마치 여름날씨처럼 더웠다. 아직 나무에 잎이 제대로 나지 않아 태양을 가릴 수 없었다. 그래도 큰 나무 밑으로 가서 앉았다. 잔디와 땅에서 나오는 서늘한 기운, 맑은 공기, 밝은 태양이 기분 좋았다. 1993년 체류시에 맛본 워싱턴의 지독히 더운 날씨 생각 때문에 아직은 즐거운 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더운 것이 아니라 습기찬 날씨 때문에 더욱 곤혹스러운 여름이었다. 지나가는 새 한 마리가 똥을 누었는데 내 셔츠 소매에 딱 떨어졌다. 그것마저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못했다. 잠깐의 산책을 하면서 옛날의 추억을 되새기고 다시 2시의 약속을 위해 국무성 안으로 들어갔다. 국무성은 완전히 하나의 요새처럼 바깥 사방에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두고 있었다. 차량이 왕래하는 건물 입구에도 큰 장애물을 만들어 두었다가 차량출입시에는 그것이 자동적으로 사라지도록 만들어 두었다. 출입체크도 하도 엄중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일이 신분증을 대조하고 기록하고 면담자에게 확인할 뿐만 아니라 공항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힘들 정도로 모든 물건을 샅샅이 조사하였다. 들고 나온 노트북을 열어보라, 켜보라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미 국무성이 테러를 조심해야 할 정도로 미국정부가 저지른 잘못이 많은가. 세계제국 미국을 노리는 테러리스트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정부에 의해 피해를 당하는 국가, 사람이 많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1999. 3. 30 화요일 10:00 NED (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 미국식 민주주의 확장의 조타수

1983년 NGO의 노력을 통하여 전세계의 민주적 제도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립된 이 단체는 미국 의회의 지원과 감독 하에 있는 기구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으로부터 함께 지원을 받고 있는 초정당적 기구로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전세계에 확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95년에는 국무성 장관이 이 단체를 가리켜 “민주적 개혁과 자유에 대한 중요한 초당파적 공헌자”라고 추켜세웠다고 한다. 민주적 제도를 수립하고자 하는 전세계의 수많은 민간교육기관, 인권 및 언론기관 등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이 단체의 주된 과제이다. 한국에서도 얼마전 시민단체협의회와 민주시민교육에 관한 공동의 세미나를 열었고 지금은 세종연구소와 민주화진전과정에 관한 연구작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이 단체의 칼 거쉬먼 회장이 우리 부부를 맞아주었다. 과거 미국의 유엔대표부 고위자문관, 유엔의 인권문제를 취급하는 유엔총회 제3위원회 미국 대표, 유엔 안보리 미국 교체대표 등을 역임한 거쉬먼 회장은 외교관 출신답게 유연하고 친절했다. 그는 자신들의 역할과 관심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였고 관련된 사람들을 불러 인사시켰으며 직접 2개 층에 소재한 NED의 조직과 기능, 담당자들을 소개하였다. 그 가운데 나이지리아 사람으로서 그 나라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서 있다는 이노센트라는 사람도 있었다. Ms.루지아나 코언은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만난 적이 있었던 여성이었다. 카프만이라는 사람은 세종연구소와의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사람이었다. 팰로우십 프로그램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거쉬먼 회장은 자신들이 보다 덜 민주화된 나라들에 주된 관심과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음을 설명했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도 중국, 버마, 인도네시아 등에 더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워낙 폐쇄적인 사회여서 북한의 민주화나 인권문제에 당장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 대신 점진적인 남북교류와 경제교역의 추진에 따라 신뢰와 화해를 쌓아가는 것만이 북한을 민주화시키는 길일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지난번 Ms.코언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집요하게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운동을 한다면 재정지원을 할 용의가 있음을 이야기하여 좀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그 동안 북한인권문제를 다루는 단체와 언론은 대체로 극우보수파들이었음을 설명했었다. 동시에 나는 거쉬먼 회장에게 아시아국가들 가운데 그나마 선진적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한국과 같은 존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한국의 민주적 이행과정의 포괄적 진전이 한국을 따르는 많은 아시아·동구권 국가들에게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동의하는 듯하면서도 심각하게 새겨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1999. 3. 31 수요일 09:30 해리티지재단

– 극우보수 싱크탱크로부터도 배운다

그렇게 많이 익숙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 단체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유니언역에서 내려 의회건물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매사추세츠 애비뉴가 나온다. 그 오른쪽으로 바로 해리티지재단(Heritage Foundation)이 있었다. 5∼6층짜리 멋있는 건물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레이건의 사진부터 과거 공화당 거물인사들이나 이 재단에 큰 돈을 낸 사람들의 사진 또는 기념패 등이 온 벽에 걸렸다. 이미 인터넷을 통하여 이 재단에 대해서는 좀 연구를 해 보고 왔다. 이 재단의 설립취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1973년에 설립된 해리티지재단은 연구기관이자 교육기관이며 싱크탱크이다. 자유로운 기업활동, 작은 정부, 개인적 자유,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 그리고 강력한 국방이라는 원칙에 기반한 보수적 공공정책을 연구하고 증진하는 것이 이 재단의 임무이다.”

여기서 이미 ‘보수적’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재단은 대단히 보수적이며 공화당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싱크탱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시아연구책임자인 Dr. 리차드 피셔를 만나고 나서 더욱 황당해졌다. 무뚝뚝한 이 사나이에게 내가 자리에 앉자 말자 질문을 던졌다. “웹 사이트에 들어가보니까 당신네 재단에서는 한국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강력히 지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미처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이 사람은 ‘강력히’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말문을 막았다. 그는 이른바 햇볕정책을 지지는 하지만 부족하고 불만스러운 게 많다고 했다. 무엇이 불만이냐고 했더니 이쪽에서는 다 주면서 그쪽에서는 하나도 주지 않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북한에 대한 압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떤 압력이 가능하냐고 했더니 한국에 미군 2개 사단을 보낸다거나 식량원조를 줄이거나 심지어 북한 영공에 미국 전투기들의 시위비행까지 고려해야 된다고 했다. 국무성의 에반스 과장의 이야기가 퍼뜩 생각났다. 이 사람이 바로 북한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거나 그런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연구자의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북한이 좀 더 강하게 나오면 완전히 코소보 꼴이 될 판이었다.

이 정도에서 화제를 돌리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설립취지에 “conservative”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국에서 보수적이라고 하면 완전히 박정희, 전두환 생각만 하는데 자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볼멘 항변부터 시작했다. 한국의 보수세력으로 자칭하는 사람들이 과거 극우독재세력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해리티지재단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경제적 자유라고 했다. 개인적 자유와 자유경쟁을 기초로 하는 경제적 자유는 동시에 정치적 자유와 밀접히 관련이 있다는 월스트리트저널지와 함께 발행하는 경제자유지표(Index of Economic Freedom) 역시 이 재단이 국내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방책이었다. 조사대상 95개국 가운데 한국은 28위였고 북한은 꼴찌였다. 그나마 28위라면 성적은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경제자유라는 것이 규제의 철폐뿐만 아니라 시장개방, 외자유치, 국내외자본제한철폐 등에 직결되어 있어 한국이 그동안 얼마나 미국의 압력을 받아 그 제한들을 철폐해 왔는지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강력한 방위 역시 이 재단이 지향하는 바라고 주장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인식이나 강경한 미국 군사정책의 경향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들었다. 이 재단이 그동안 낸 책자의 리스트만 보아도 그 성향을 아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듯 하였다.

The March of Freedom / Modern Classics in Conservative Thought The Power of Ideas / The Heritage Foundation at 25 Years Balancing America’s Budget / Ending the Era of Big Goverment Restoring American Leadership / A U.S Foreign and Defense Policy Blueprint Why America Needs a Tax Cut

그는 해리티지재단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의회활동에 주로 집중하여 공공정책결정과정에 구체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국내외 정책에 대한 다양한 이슈에 대해 즉각적이고도 간단한 배경자료를 냄으로써 정책결정권자들이 바로 참고하고 영향받도록 해 구체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국회의원들이 결코 수십 페이지, 수백 페이지의 논문이나 보고서를 읽지 않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2,3페이지짜리 요약본이 훨씬 영향력을 갖는다고 하였다. 바로 이 방법으로 국회의원을 교육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방문한 이날 3월 31일 바로 나온 “배경자료(Backgrounder)”는 1265호를 기록하면서 ‘아시아에서의 IMF정책: 비판적 평가’라고 하는 소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은 160명의 상근연구자와 연간 300만 달러의 예산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점에서는 분명히 부러운 일이었다. 선거과정에서 후보자들에게 정책대안들의 쟁점을 모아 제시하고 또한 당선된 사람들에게는 “AGENDA – '99 : A New Vision for Amreica”라는 책자를 내서 이들의 의정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일도 결국 이 재단의 영향을 키우고 행사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이 재단이 하는 일 가운데 또 하나 배워야 마땅한 일은 바로 대체예산안 제출이었다. 의회내의 CBO 제출 예산안에 대해 분야마다 이에 대한 논평과 권고를 담아 국회의원들이 예산심사를 하는 과정에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게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참여연대가 사회복지 분야에 관해 이 작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했던 적이 있다. 구체적 계수를 다루면서도 정부 예산안에 대해 논평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현재 참여연대의 인력수준으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단 한번 어렵더라도 선례를 만들면 그것을 매년 개선해 나가는 것은 조금은 더 쉬운 일일 것이다. 해리티지재단이 내세우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가 “작은 정부, 적은 예산”이었다. ‘세금’ 자체가 적이라는 말까지 썼다. 사실 자신들의 대체예산안에 보아도 중앙부처가 거의 3분의 1정도로 줄어 있었다. 참여연대가 장기사업으로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는 예산낭비 부분에 대해서는 연구성과가 없느냐고 했더니 그것보다는 예산 자체를 줄이는 것이 부패와 낭비의 근본적 방지책이 되고 예산집행의 효율성을 증진시키는 혁신책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완전히 예산감축이 이 재단의 지상의 과제인 것처럼 보여졌다.

이 재단의 웹사이트에는 20만 명의 기부자들이 헌금을 함으로써 이 재단이 운영되고 있다고 써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이곳에 큰돈을 내는 것은 기업일 터였다. Dr. 피셔는 이런 말을 했다. “모금은 과학이다”. 그 말 하나는 정말 멋있었다.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재정난으로 고민할 줄은 알아도 정말 과학적으로 모금하는 고민은 한 적이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금의 과정 자체가 바로 “당신들의 신념과 실천 때문에 기부한다”는 생각에 따라 하는 것이므로 시민교육의 한 수단일 수밖에 없었다. “당신들이 재벌과 싸울 때 중소기업들에게 그 취지와 하는 일의 내용과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어떻게 덕이 되는지를 잘 설명하여 왜 기부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지 않느냐”고 반문하였다. 회사와 노동조합, 교회와 대학 등에 기금 마련을 위한 투자를 적지 않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그러한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걸 실행할 의지와 힘이 달렸다. 어디서나 모금은 중요한 것이므로 참여연대의 경우에도 적어도 5명에서 10명까지의 상근자가 매달려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구경시켜 달라는 부탁에 여러 연구실들과 자료실, 그리고 자신의 방을 안내했다. 그 방에 들어서니 사방에 몇 개의 전투기 사진들이 붙어 있고 한쪽에는 1989년인가 평양에서 개최되었다는 평화축전의 포스터가 크게 붙어 있었다. 반제연대·평화 등의 글귀와 함께 성조기를 그려놓은 뱀이 전세계를 집어먹는 살벌한 포스터였다. 왜 저런 끔찍한 사진을 걸어두느냐 했더니 자신은 언제나 북한의 그런 호전적인 모습을 상기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끔찍하였다. 처음 해리티지재단이 방문리스트에 올라 있을 때는 왜 좀 더 진보적인 재단이 아니고 하필이면 이 재단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곳을 걸어 나올 때는 참 잘 왔다고 생각했다. 이런 부분을 보지 못하고 어찌 미국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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