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하고 범인의 효율적인 검거를 위해 정보를 정부에서 일괄되게 관리하려던 야심찬 전자주민등록증 도입이 국민여론에 부딪쳐 중단되었다. 대신 재질만 플라스틱으로 바꾼 새 주민등록증을 발급할테니 전자지문을 등록하라고 한다. 그러나 지문이 전자화되면 그것은 애초의 전자주민등록증의 기능을 고스란히 대체하게 될 것이다. |
주민등록법은 “주민의 주거관계 등 인구의 동태를 명확히 파악하여 주민생활의 편익을 증진시키고 행정사무의 적정한 처리”를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주민생활 편익증진과 주거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는데, 우리나라 주민등록제도가 운영되는 실상을 보면 정말 그러한가 하고 의아해진다.
우선, 주거관계 파악이 목적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국가가 요구하고 있다. 주민등록표상의 항목은 무려 141개에 달하고 있고, 최종 학력은 물론 대학 졸업자의 경우 졸업한 대학의 이름과 전공까지도 밝혀야 한다. 게다가 이러한 정보들을 지방자치단체도 아닌 중앙정부가 직접 관리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을까?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단체는 오로지 대리점 역할만 할 뿐 주민등록 관련한 모든 정보는 행정자치부와 경찰청 본청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다. 이쯤만 해도 이 법의 목적이 주민을 등록해 통제하는 데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여기에다 국민 개개인을 바코드 번호 매기듯이 주민등록번호를 매겨놓고 있고, 모든 국민들에게 열 손가락 지문을 찍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주민등록법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전자주민카드 시행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주민등록제도를 개선하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고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번 주민등록증경신사업에서 이러한 주민등록제도의 문제는 하나도 개선된 것이 없다. 그러나 전과 다름없이 단지 ‘개악’되지 않은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단순히 종이에서 플라스틱으로 증명서의 재질이 변화된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전자지문’을 채취한다는 점에 있다. 주민등록증을 새로 만드는데 사진까지는 그렇다치더라도 왜 지문을 왜 다시 채취하는 것일까? 그것도 전자화된 디지털 방식으로 지문을 채취한다고 한다. 현재 주민증 경신 사업에서 제기되는 의혹 중에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전세계에서 우리만 지문등록
지문날인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난 92년에 있었던 일본정부의 재일한국인들에 대한 지문날인 강요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92년 일본정부에서 재일한국인들의 지문날인을 받겠다하여 많은 재일한국인들이 일본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 저항했고 그 노력의 결과로 94년 일본정부는 2차대전의 특수성을 감안한다하여 94년 한국계와 대만계 일본인의 지문날인은 폐지시켰고 급기야, 지난 5월에 일본정부는 모든 외국인들의 지문날인제도를 전면 폐지시켰다.
이처럼 보다 쉬운 주민관리를 위해 국가차원에서 지문날인을 받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래서 거의 모든 국가에서 범죄자에 한해서만 지문날인을 받고 있고, 과거 일본과 같이 외국인 지문날인을 받는 경우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소위 문명국에서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지문날인을 받는 나라는 없다. 특히, 우리의 지문날인제도는 지난 30년 동안 법률적인 근거조차 없이 운영되었다. 모법인 주민등록법에서조차 언급되지 않고 시행령과 시행령 별지 서식에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전자주민카드제 문제로 주민등록제도와 지문날인의 사회적인 문제가 제기되자 4월 26일 개정된 주민등록법에 주민등록증 수록항목으로 ‘지문’을 추가시켰다.
정부가 이처럼 전국민을 대상으로 전자지문을 채취하는 목적과 의도는 또 어디에 있을까? 정부는 범죄자 색출과 대형사고시에 시신의 신원확인을 위해서 지문등록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시신의 신원확인이 지문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전국민 지문날인 제도를 시행하지 않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시신확인 작업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범죄자 색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문을 등록하려는 것이다. 이미 국내 경찰청에서는 조회 목적으로 특수 전과자에 한하여 지문 자동 인식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으며, 이 시스템은 우무지 즉, 오른쪽 엄지 손가락의 특징점을 추출하여 지문을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오른쪽 엄지 손가락의 전자지문을 채취하고 있다. 전자 지문채취는 예비범죄자로 감시하던 대상자를 특수전과자에서 전국민으로 확대 실시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문등록은 전자주민카드와 같다
한편, 전자 지문채취가 이처럼 국민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전자적인 방식으로 고도화시킨다는 사실과 함께 새 주민증 발급과정 전체가 전자주민카드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전자주민카드제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주민정보의 통합과 중앙집중적인 발급 시스템도 변함이 없다. 중앙정부에서 주민정보를 통합하여 조폐공사에서 일괄적으로 카드제조를 하고 있으며 전자주민카드 발급을 위해 미리 구입해 둔 전자주민카드용 카드원판과 카드제조기, 주전산기 등을 이번 주민등록증 발급에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IC칩(전자칩)만 빠져 있을 뿐 모든 장비와 운영시스템은 전자주민카드 시행계획에 나와 있는 그대로이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IC칩 대신에 전자지문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지문이 지문 자동인식 시스템에 의해 광범위하게 사용된다면, 건물을 출입할 때에도 지문감식기에 손을 대고 들어가야 하고, 만약 금융망이나 다른 정보망과 연결되면 전자주민카드와 똑같이 될 것이다. 지문이 바로 현금카드이자, 신용카드가 되고 전자주민등록증이 될 것이다.
결국 새 주민증은 주민증 자체의 수록 내용이 조금 축소되었고 IC칩 대신에 전자 지문을 사용하다는 차이 외에, 발급시스템과 운영체계가 전자주민카드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전자주민카드제가 폐지된 것이 아니라 기만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지문날인 거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든 국민을 범죄자 취급하는 지문날인제도를 거부하지 못하다가 이제와서야 지문날인을 거부한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울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이 주인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할 길이 또한 이 길이 아닐까?
우리 사회의 이런 문제들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지문날인 거부는 본격적인 불복종 운동으로서 국가의 주인이 주인역할을 하기 위한 첫 출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지문날인 거부는 이처럼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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