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8월 1999-08-01   683

‘딴짓’ 안하고 좋은 방송하겠습니다

유학마치고 돌아와 또 파업중인 손석희 아나운서

그는 또 파업 중이었다. 문화방송 정문을 통과하면서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싸움이 있는 곳에 늘 내가 있더라.”

“민주노총 연대파업 끝나고 석 달 있다가 미국 갔는데 온 지 석 달 만에 파업이 있네요.”

그가 미국에 있던 2년 동안은 한번도 파업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도 ‘갠 파업과 무슨 인연이 있는지’ 하셨다.

“문제가 되는 방송관련법안의 요체는 방송위원회에 전권을 주는데 인원구성이 문제예요. 대통령이 세 명, 문화관광부가 추천한 여섯 명 중에서 대통령이 셋을 고르고, 국회의장이 셋을 정하니 아무 것도 아닌 거죠. 최악의 경우 대통령 입맛대로 될 수 있으니 방송독립은 물 건너가는 거예요. 저희 문화방송은 방문진(방송문화진흥원의 줄임말)에 예산권까지 주는 걸로 되어 있으니 완전 핫바지가 되는 거죠. 그걸 막자는 거예요.”

방송악법 저지를 위한 연대파업(한국방송공사, 문화방송, 방송위 노조)의 배경을 그는 숨도 안 쉬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냈다. 미국에서 막 연필 놓고 온 유학생 티가 여기서 느껴졌다.

손석희의 ‘딴짓’

미국에서의 2년 세월을 들어보니 과연 그는 ‘고달플’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왔다.

“처음에는 L.A에 넉 달 반 있었어요. 손석희의 미국 탐험, 열 번 나갔을 거예요.”

그건 나도 한 번 봤다. UFO에 대한 것이었다. 보면서 궁금했던 게 있었다.

“그거 다 영어로 직접 물어보고, 그 사람들이 영어로 한 거 바로 다 알아듣고 그랬어요?”

“마구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자료로 웬만한 정보는 사전에 다 알고 들어가는 거니까 그건 가능하지요. 인터뷰는 미리 영작하면 되고 상대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대충 짐작이 가는 거구.”

그래도 그건 실력임에 틀림없다. 미국 가기 전에 어학당에 다니던 그에게 영어공부하기가 어떠냐고 물었을 때 겸손이 지나쳤던 것 같아 약간의 배신감이 스쳐갔다.

L.A에서 원래 목적지였던 미네소타에 간 것은 그해 9월. 미네소타 주립대 저널리즘 객원연구원이 그의 신분. 그해 연말에 터진 IMF는 그를 ‘방년 41세의 나이에 학생이 되도록’ 자극했다. ‘어려울 때 외국에 와서 객원연구원이란 이름으로 애매하게 보내기 보다는 생산성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켠에 없지 않던 공부의 가능성을 현실화하게 한 것이다.

그는 ‘봐주는 게 없는’ 학교의 요구기준에 맞춰 토플을 공부했고 저널리즘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주말에도 공부하느라 새벽 한두 시에 들어왔어요.” 지금 생각해도 다시 못할 것이 ‘여름학기의 통계학 듣기’라는 악몽 같은 추억을 남긴 덕분에 교과과정을 1년만에 마치고 지금은 논문만 남은 상태.

그의 논문제목을 말하자면 <미디어 운동에 있어서 자원동원론적 일고>.

“운동에는 동원되는 자원이 많지요. 노조원, 여론조성도 다 동원자원인 셈인데요. 5공 말기에 언론노조가 세워진 후 그동안 정치적인 환경도 변했고 언론분야에 자본이 많이 들어오고 주변 환경이 급변 했잖습니까. 공영방송이라는 것만으로 사람들이나 일반여론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느냐, 아마도 아닐 거예요. 동원의 전술 전략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그걸 보려는 거지요.”

짐작컨대 우리나라 언론노조운동의 운동방법론에 관한 것인 모양이다. 아까 파업을 이야기할 때는 언론노동운동가 같더니, 논문을 이야기할 때는 언론학 교수 같았다.

얼마 전 그가 쓴 글을 『한겨레』에서 보았다. 사람들이 미국 간다니까 딴짓하려고 그런다더니 미국 갔다와서 그냥 방송하니까 이번에는 왜 딴짓 안하느냐고 한다고 썼다. 그 글을 읽으면서 그가 참 경쾌해졌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유례없이 같은 사람을 한 지면에 다시 다룰 생각을 했던 것도 그 변화의 저간이 궁금해서였다.

“그 ‘딴짓’이 구체적으로 뭐예요?”

“정치권 진출을 말하는 거지요.”

“할 건 가요?”

대답 대신 그는 고개를 부르르 가로저었다. 그의 입에서 “으으으” 소리가 났다.

“왜요?”

“무슨 욕을 먹으려구요.”

“대학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하면요?”

“그건 하고 싶어요.”

“앞으로 더 공부?”

“기회가 닿으면 하고 싶어요.”

“원래 학구파였나요.”

“해보니까 재밌어요. 현업에 있다가 들어가니까 제가 별 생각없이 해왔던 것들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정리하는 재미가 있어요.”

그는 이번에 귀국해서 민언련 정책위원을 맡았다. 언론학교에서 강의하고 토론회에 참여하자면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론노동운동가라는 표현을 사양했다. ‘거창하게 표현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그의 딴짓은 그야말로 우리의 예상 메뉴 밖일지도 모른다 싶었다.

그가 먹은 미국물

그를 기다리면서 나는 그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싱거울 정도로 그는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긴 2년 세월이란 그리 긴 것이 아니다.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2년 동안 안 보고 사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은데도 마치 2년이 20년이라도 되는 듯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손석희라는 인물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가는 미국이지만 그가 미국을 간다고 했을 때 나는 좀 의외라고 여겼다. 내가 보기에 그는 부르주아 성향에 대해 강박증적 경계심을 가진 데다 남들이 유행처럼 다 하는 것에 대해 냉소적인 반골성향이 있어서 아메리칸 드림 대신 반미감정을 가졌을 거라고 지레 짐작한 결과였다. 그런 그가 미국을 갔다왔다니 나로서는 뾰족한 변화를 기대할 수밖에. 미국사회가 어떻더냐고 물었다.

“사회기반시설이 잘 되어 있었어요. 주거지에서 여섯 정거장 내에 공원이 있어요. 도시계획을 그렇게 짠 거지요. 그 공원에는 축구장 농구장 야구장이 다 있고. 그걸 이용하려면 서류내는 게 아니라 비었을 때 가서 하면 되는 거예요. 야구장 타자석에 서면 호수가 쫙 보여요. 환상적이지요. 그렇게 살려니까 제3세계 괴롭힐 수밖에요. 경치 좋은 데는 관광지로, 황무지에서는 기름이 나고, 다니다 보면 짜증이 나요. 차로 여행하며 욕을 입에 달았어요.”

이런 그가 미국사회에서 배운 게 몇 가지 있다. 우선,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교육이 체질화되어 있는 것. 자연사 박물관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을 때 이야기다. 동물학 전공하는 아르바이트생이 가이드였는데 코끼리 머리 뼈 앞에서 아이들에게 묻더란다. “너 여기 이 부분에 뭐가 있었을 것 같니?” 틀려도 바로 안 가르쳐주고 계속 물었다. 그러다 아이가 맞추면 대단하다고 한껏 추겨 세워 주었다.

“코끼리 두상 뼈 하나로 40분이 흘러갔어요. 애 엄마랑 나는 지겨웠지. 그 학생은 자기가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창의력 훈련, 이런 저력은 따라 잡을 수 없겠다 싶었어요. 어려서는 우리나라 애들이 잘하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처지기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거예요.”

귀국해서 그는 이것이 교육계만의 문제가 아님을 절감하고 있다.

“무슨 작은 것 하나라도 개선해 보려고 하면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열심히 일하는 놈은 ‘또라이’ 취급에 패배주의와 비아냥이 만연해 있어요. ‘자식, 뭐 좀 배워왔다 이거지. 놔둬, 저 좋아서 하는데’ 식이에요. 이게 군대조직이라서 그래요. 개인의 창의성이 전혀 존중되지 않으니 뭐가 되겠어요.”

그래서 그는 미국사회의 조직이 일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방송에 프로그램이 생기면 조직이 생기고 그 프로그램이 없어지면 조직도 해체돼요. 가끔 저렇게 게을러서 무슨 일이 되나 싶은데, 일 중심이라서 생산성이 아주 높아요. 미국 것이 최고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이런 식으로 일하는 게 좋다는 것조차 안 받아들여지니 조직의 효율성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그가 처해 있는 방송환경이 결코 녹녹치 않음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시청자들처럼 그에게 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님을 눈치챘다. 또 하나 배운 것이 남을 믿어주고 그 믿음 위에서 뭐든 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이다.

“예를 들어 도너츠를 살 때 열 개 넣고 다섯 개 담았다고 하면 확인도 안 해 보고 다섯 개 값만 계산해요. 물론 여유가 있으니 가능한 거겠지만 일단 믿어주는 게 대단해요. 그 대신 한 번 탄로나면 끝장이지요. 그게 신용사회지요.”

그런 믿음사회에서의 일상 생활은 스트레스도 상당히 줄어든다고 했다.

“우리는 뭘 하나 부탁하러 가면서 ‘보나마나 까탈 부릴 거야’ 생각하잖아요. 거기선 걱정이 안 돼요. 당연히 어떻게든 해주겠지.”

그 자신이 실제로 그런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 간 첫해 그는 거의 ‘거지’로 지냈다고 한다. 떠날 때 어떤 장학재단에서 받기로 한 장학금이 재단 사정으로 틀어졌고 회사가 1년 이상 외유를 허락하지 않아 휴직을 한 터라 본봉만 주는 것도 첫 해에는 안 나왔다.

“석사과정에 들어가기로 하고 나니 학과장이 물어요. 너 학비 어떻게 할 거냐. 마침 국제로터리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았는데 다음 학기부터 주기로 되어 있다고 말했어요. 며칠 뒤에 학과장을 만났는데 너 이번 첫 학기는 학과에서 돈 대주기로 했다 그래요.”

“생색도 안 내구요?”

“그런 거 없어요. 자기 책임범위에서 해 줄 수 있는 거 해 준다는 거지요.”

시민운동과 관련해서도 배운 게 있다. ‘Com-mon Cause’라고, 정치감시를 하는 전국 규모의 풀뿌리 시민단체를 예로 들었다.

“전국 각 지역의 지부에서 요구사항을 워싱턴본부에 보내면 의원에게 공식적으로 로비를 해서 법안, 정부안에 반영시켜요. 그런 게 실핏줄처럼 퍼져 있어요. 거기서 일하다가 정치권에 진출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비난의 대상이 아니에요.”

조직적 시민운동이 잘되는 이유가 무수한 개별적 시민운동, 곧 자원봉사에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자원봉사자가 많아요. 자원봉사 없이는 안돼요. 운동뿐 아니라 국가도 자원봉사가 있어서 제대로 돌아가요. 고속도로 청소를 보이스카웃이 하고 지역학교 교사도 자원봉사자가 해요. 우리는 그걸 국가재정으로 충당하려니까 안 되지요. 개인 슈퍼마켓에도 손님 짐 싸주는 자원봉사자가 있어요. 그만큼 남에게 도움주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는 거지요. 돈 받고 하는 것보다 자원봉사자가 더 열심이에요. 왜냐하면 동기가 있으니까요.”

자원봉사에 대한 의식이 어떻게 확립되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꼭 먹고 살기 넉넉해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을 시킨 결과가 아니겠냐고 했다. 우리나라 시민운동을 화제로 올렸더니 그는 단박에 자원봉사자 교육을 활성화시키는 일을 꼽았다.

“조직은 관료화되면 죽는 것입니다. 시민운동의 생명은 민의를 제대로 대변하느냐는 거지요. 그걸 제대로 하기 위해 얼마나 민의 속으로 들어가느냐가 관건인데 현재의 민도만 놓고 봤을 때 (시민운동이)일종의 엘리트주의가 아닌가 싶어요. 이 엘리트주의를 깨려면 더 많은 시민을 ‘엘리트’(사전적 의미의)로 만들면 되잖아요. 그런 작업을 더디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급할 거 없잖아요.”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나운서 손석희’라는 표현만으로는 그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다양한 이야기 가운데 융통성 있는 사고력이 엿보였고 비합리적인 조직은 망해야 한다고 단언하는 데서 선명함이 느껴졌다. 새로운 사회를 경험하면서, 젖어있던 일상에서 떨어져 봄으로써 자신이 그간 믿었던 것이 옳았다는 확신을 얻은 것 같았다. 그가 보인 여유는 연륜이나 휴식의 결과라기 보다는 중추가 튼실 할 때 사지가 부드러울 수 있는 이치 같았다. 버드나무가 그 갈기를 바람에 한껏 맡길 수 있듯이.

사람 때문에 쉽게 ‘프리’할 수 없는 사람

그가 미국에 있는 동안 나는 딱 한 번 국제전화를 걸었다. 대통령선거 개표를 보다가 당선자가 확정되는 순간 전화를 걸었다. 그때 그는 유학생들과 모여 ‘막연히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었다고 했다. 미국에서도 전화가 한번 왔었다. 내가 재혼한다는 소문이 미국까지 들리던데 사실이냐고. 그의 막연한 기대가 파업으로 ‘꽝’난 것처럼 소문도 ‘꽝’이었지만 둘 다 사람 때문에 한 전화인 걸 보면 인생에선 사람이 가장 중요한 화제인 것 같다.

돌아오니까 뭐가 제일 좋으냐고 물었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 다시 본 거요.”

과연 사람이었다. 그 사람들이 달라진 거 같더냐고 물었다.

“안 변한 거 같더라구요.”

“한국은 뭐가 달라진 거 같아요?”

“누가 미국 갔다 오니까 노랑머리만 보다가 까만 머리만 보이는 게 이상하다고 하는데 한국에 와도 노랑머리가 많더라구요.”

그의 유머감각은 여전했다.

“쉬었다가 와서 보니 아나운서란 직업은 어떤 거 같아요?”

그는 요즘 아나운서의 정체성에 대해 헷갈린다고 했다.

“엔터테이너의 성향이 너무 강해진 것 같아요. 어느 정도 그런 성향이야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정칙이 있어야 변칙도 빛나는 거 아니겠어요.”

“뭐가 정칙이죠?”

“좋은 방송을 하는 거지요.”

“좋은 방송의 기준은요?”

“상식적인 수준에서 옳은 것이요. 힘 없는 사람, 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하는 거지요.”

그는 뉴스를 하면서 좋은 방송을 하려고 했지만 그렇지 못한 게 항상 갈등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앵커로서 무언가 계몽적인 토를 달려고 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라고 했다. 방송 경력 15년에 마음에 흡족한 방송을 물었다. 90년부터 92년까지 했던 장학퀴즈를 꼽았다.

“그때 고등학생들이 지금은 스물 예닐곱 됐지요.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해요. 교장선생님들은 싫어했지요. 학생들 의식화 시킨다고”

방송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순기능을 했다는 나름의 자부심 말고도 그가 이 프로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과 의기투합되었어요. 그게 아주 좋았어요. 저는 방송의 결과, 그러니까 시청률 보다도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 내 마음과 맞느냐가 더 중요해요. 그리고 맘 안 맞으면 결과도 안 좋아요.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역시 사람이었다.

그에게 두 해 전에 프리랜서로 전향할 의사를 묻자 ‘사람 속에 함께 있고 싶다’는 말로 그럴 뜻이 없음을 표현했던 게 기억났다. 또 다시 물어보았다. 그는 상당히 유연해져 있었다. ‘좋은 방송을 만드는 데 있어서 ‘프리’가 좋으면 그렇게 하겠다. 아나운서가 할 수 없는 방송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서 한계를 느끼면 그때 그러겠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한계를 선명하게 내다 보았다.

“저는 프리랜서가 돼도 돈은 못 벌 거예요. 이미지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이미지 변신이란 것도 있잖아요.”

“그건 한 때의 충격효과일 뿐 오래 가지 못해요.”

그러면서 그는 초심을 이야기했다. 초심이 옳은 것이라면 사람은 초심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그에게 초심은 좋은 방송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에게서 선비가 느껴졌다.

회의를 하다가 나왔다며 일어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아홉시 뉴스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아침잠이 많아서 그가 맡은 프로를 못 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나 하나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오한숙희 여성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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