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6월 1999-06-01   934

나눔의 이야기방식, 수다예찬

처녀들의 저녁식사

‘얘 나는 말이야, 음…, 뭐라 할까, 막 꽉 차는 느낌 있지. 밑으로부터 말이야….”기억이 분명치는 않지만, 아마도 대사는 이랬던 것 같다.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보여준 세 여자의 이야기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그저 그런 이야기들이 세 여자의 입을 통해 주절주절 끊임없이 이어지고,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깔깔거리며, 별것도 아닌 일에 눈물을 훌쩍인다. 세 여자는 상대의 눈빛, 마음, 느낌 이런 것들을 서로 조근조근 다듬고, 여며준다. 그 매개 방식은 ‘수다’이며,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다’로 일관한다.

‘수다’는 분명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파시즘적으로 제패한 오늘, 주목할만한 새로운 이야기방식이 아닌가 싶다. ‘수다’를 굳이 남성적 표현으로 하자면 ‘노가리’일 터이다. 그러나 수다와 노가리는 분명 다르다. 노가리는 쓸데없는 이야기, 또는 농담이나 허튼소리를 일컫는 말로, 그 자체가 목적지향성이나 파시즘적인 일체성을 의미하는 말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수다는 그 자체로서 독립적이며, 평등하고, 평화롭다. 효율을 따지지도 않으며, ‘모으는 이야기’방식이 아니라 ‘나누는 이야기’방식이다. 굳이 한 사람의 이야기에만 집중할 필요도 없으며 말하고 싶은 모든 이들이 다 이야기마당의 주체가 된다. 여기에선 배운 이나 불학무식한 이간의 차별이 없다. 그러면서 이야기 주체간에 따뜻한 마음의 위로와 선린, 우호가 교호된다. 수백 마디 ‘쌈빡’한 논리보다 훨씬 더 많은 공유가, 말의 양을 뛰어넘는 질적인 교류가 일어난다. 이제껏 한낱 ‘열등한 여성’들의 ‘천박하고 열등한 이야기방식’으로 치부돼온 ‘수다’는 이제 정당한 자기자리를 찾을 때가 됐다. 논리와 효율로 표상되는 가부장사회의 남성적 이야기방식은 더 이상 감동과 나눔의 소통을 주지 못한다. 더구나 강압과 당위의 험악한 과거를 살아온 우리들에게 사실 이야기라고 해봐야 고작 상대를 설득하는 것, 나의 의사를 관철시키거나 동의를 구하는 것, 일체를 형성하기 위한 목적의식적 제의(祭儀) 따위 외에 그 어떤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선전·선동의 이야기에만 익숙해온 우리에게 ‘나누는 이야기’란 애당초부터 낯설거나 혹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닐까? 논의니, 논리니, 논쟁이니, 설교니, 설득이니 하는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야기로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은 단지 언어영역에서 벌어지는 위로부터 아래로 하향식으로 관철되는 권력의 또다른 발현형태였다.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이나 평등문화, 민주적 소통이라는 거룩한 언사와 개념들은 오직 목적과 결론을 위해 예비된 레토릭일 뿐이다. 불순한 시대에는 고급문화를 표방한 모든 소통행위가 운명적으로 지배종속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이 있다. 적지 않은 독립문화·예술인들이 온갖 상위문화를 배격하고 하위문화에 천착하려는 것도 아마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진짜 이야기, 허위와 불순을 넘어서는 평등의 소통체계를 하위문화에서 갈구하는 것은 이제 어쩌면 당연한 일이 됐다. 천박한 하위문화 가운데 놓여 있던 ‘수다’가 이 시대의 유력한 반란의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엿본다. 수직적 이야기체계를 전복하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전혀 다른 이야기방식이 바로 ‘수다’이다. “수다로 파시즘적인 소통체계를 전복하라!” 내가 <처녀들의 저녁식사> 이 영화를 보고 인상적으로 느낀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김형완 참여연대 연대사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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