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6월 1999-06-01   871

DJ정권의 이데올로그 한상진 정신문화연구원장

개혁평가, 최대주의 노선을 버려라

조희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1년여의 김대중정부의 개혁정책에 대해 상이한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김대중정부의 최고 이론가로 인식되고 있는 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쟁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덧붙인다면, 재벌개혁에 대해서는 어차피 글로벌 경제시대에 재벌이 기왕에 하고 싶었던 개혁을 정부지원 받으면서 하는 것 아니냐,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 식으로 밀어준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상진: 그간 정부가 추진한 개혁에 대한 평가에는 양면성 또는 분절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김대중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그동안,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넓은 의미의 평화운동, 그런 면에서 국제적인 신인도가 높은 분이 아닙니까? 그런 것도 중요한 자원이 되어, 경제위기 극복에 큰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또한, 남북간의 긴장완화와 안보바탕 위에 선 화해협력에도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내문제, 특히 정치개혁, 지역갈등 해소,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불신과 대립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를 진정한 의미의 상생적인 어떤 파트너십 사회로 만드느냐, 이것이 대내적인 민주화의 핵심이 되는데 이런 문제에서는 상대적으로 개혁의 성과가 아직 빈약한 것 같고, 이런 의미에서 분절성, 양면성이 있다고 봅니다.

또, 재벌개혁에 대해서는 경제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울고 싶은 데 뺨 때려준다’는 표현은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년동안 진행해온 재벌개혁은 과거 40여 년간 굳어진 우리 경제관행을 놓고 본다면 거의 혁명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재벌이 이런 개혁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다만 개혁의 가시적 성과가 금방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재벌들의 재산을 환수하라’ 는 등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루어진 5대 개혁 등은 근본적인 구조개혁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 성과가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판단할 문제라고 봅니다.

조희연: 그러나 5대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더 심화됐고, 재벌총수의 독점체제는 오히려 더 강화된 게 아닙니까? 과연 이 정도가 국민의 정부가 할 수 있는 개혁의 최대치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가령, 5대 재벌 총수들 가운데 하나가 처벌되는 것은 불가능합니까, 예를 든다면 말입니다.

한상진: 그런 문제에 대해서 저는, 최대주의의 노선을 취하느냐, 최소주의의 노선을 취하느냐, 아니면 적정수준의 노선을 취하느냐, 이 선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평가하시는 분의 기준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50년만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룩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권의 사회적 기반은 과거 어떤 정부보다도 약한 편입니다. 이 정부의 개혁을 평가하는 데는 현실에 대한 좀더 분별있는 분석과 판단이 필요하다고 봐요. 현실은 굉장히 다양한 세력들의 역학관계로 이뤄져 있으니까요. 우리의 경험에서 보자면 최대주의로 가면 반드시 스윙이 옵니다. 역스윙이 있어요. 때문에 개혁은 적정수준에서 일관되게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재벌기업의 투명성, 책임성, 전문성, 개방성 등은 앞으로 많이 개선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희연: 김대중정부의 정책기조가 신자유주의적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상진: 전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과거 우리의 관행에서 보자면 신자유주의적으로 보이는 게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시장경제를 중요시하고 경쟁과 효율을 강조한 점, 특히 노동시장 유연화정책, 고용조정정책, 정리해고, 공무원 개방형 임용제도 등을 제대로 도입했기 때문에 과거의 보호주의적인 관행에서 놓고 보면 신자유주의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의 평가는 아마도 매우 다를 겁니다. 구조조정의 문제들을 노사정위원회같은 사회적 협의를 통해 해결하려 노력한 점도 독특하구요. 아무튼 저는 현정부가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고 고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대처정부 같은 정부는 아니지요.

조희연: 그러나 지난 1년동안 정말 복지나 사회보장제도나 사회안전망, 이런 면이 실질적으로 진전된 게 있느냐, 소득구조는 더 양극화되고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태도가 결국 노사정위원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한상진: 한동안 금리가 매우 높았고, 자산계층의 소득이 많이 늘어난 반면 대부분의 노동자 소득은 오히려 줄었고 더 나아가서 대량 실업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에 자연히 소득상태가 열악해졌습니다.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지적은 옳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그동안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7조 원을 투여했고 금년에도 그 이상 더 투입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처럼 경제성장=고용창출=복지라는 신화에 매료되어 사회안전망 시설이 전무한 나라도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IMF위기를 맞이하여 이렇게 빨리 사회안전망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노력한 나라는 사실 별로 없습니다. 다만, 충분한 준비 없이, 빨리 서두르는 과정에서 실직자들에게 과연 양질의 서비스를 제대로 전달했는가 하는 점은 반성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노사정위원회가 지난 1년간 거둔 성과와 미래 과제 대해서는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과가 다소 미흡하더라도 이걸 버리자고 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입니다. 노동자들이 이걸 빼놓고 어디서 뭘 하겠다는 것인지 불확실하니까요. 이 제도를 잘 살리는 것이 노동자들에게도 이롭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희연: 지하철파업 이후 국민정부의 대응방식을 보면 파업을 중단한 것을 지하철이 무릎꿇는 것으로 간주하고 차제에 확실히 때려잡자는 식으로 진행된 것 같습니다. 정부가 구 관료들의 관성적 대처를 방치하고 있는 점이 분명히 있는 거고, 그러다 보니까 새로운 노사정 관계를 가능케 하는 신뢰가 쌓일 틈 자체가 없는 것 아닙니까. 결국 책임은 정부에 있다고 보여지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상진: 지하철파업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은 지하철공사와 서울시에서 심사숙고를 하겠지만, 차제에 원칙을 정립하겠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에요. 공공부문이 파업에 돌입했을 때 피해가 불특정 다수 시민들에게 직접 가니까 시민들의 기대나 요구, 불만에 초연한 정부는 아마 없을 겁니다. 노조도 충분히 그걸 감안하고 행동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죠. 그랬을 때 파업의 결과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묻는 그 행위를 노사간의 신뢰부족으로 몰아붙이기는 좀 어렵다고 봅니다. 어차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사람은 져야 되는 것이지요. 그것과는 별개로 노사간 서로간에 지켜야 할 원칙, 상호존중의 정신, 그것이 훼손돼선 안되겠죠.

조희연: 최근 김대중정부의 정책자문집단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수정해서 신중도노선으로 전환할 것을 건의하는 정책자료집을 제출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수사학적 변화인지 정말 지난 1년동안의 개혁에 대한 성찰적 기조를 담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한상진: IMF위기 극복 과정에서 파생된 부의 양극화 현상을 새로운 눈으로 좀더 경각심을 가지고 조명해야 하지 않느냐, 이런 논의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국제적으로도 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IMF위기를 극복해 가는 데 가장 선두에 서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보고 있어요. 가장 성공적인 모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제에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지만 동시에 부의 양극화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안목이 필요하다, 그런 논의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을 신중도노선이라고 언론이 표현한 것 같아요.

조희연: 김대중정부의 지난 1년여를 보면, 국내적으로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민중적인 요구 사이에서 보수세력의 저항을 과도하게 고려한, 지나치게 ‘신중한’ 노선으로 경도되고, 국제적으로는 IMF의 요구에 지나치게 순응적인 탈민족주의 노선으로 기운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상진: 글쎄요. 흥미있는 주제입니다. 그런데, 탈민족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조희연 선생과 아주 반대의 생각을 합니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등에서 나온 주장들이 민족주의적인 취향이 강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일까요? 저는 여기에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고 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기 이전과 이후의 언어를 볼 때 가장 현저하게 변화된 내용이 ‘보편적 세계주의’라는 말이에요. 예전에는 그런 용어를 쓰지 않았어요. IMF위기를 헤쳐가면서 보편적 세계주의라는 용어가 중요한 화두가 됐어요. 그런데 중요한 점은 세계주의가 단순히 우리를 버리고 서양을 쫓아간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시아도 서구와 함께 보편주의 세계주의로 가되 서구의 패권이 작용하는 세계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비전과 발전방향을 아시아에서 찾는다고 하면 굉장히 흥미로운 논쟁적 지형이 생깁니다. 서구의 담론으로 서구의 한계를 돌파하는 전략은 매력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아시아의 가족제도를 새롭게 볼 수 있고 노사정 협력모델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가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조희연: 정부 개혁의 혼란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인권법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인권법이나 국가인권기구 설립이라고 하는 것은 국민정부의 개혁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민정부에서도 단식투쟁을 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는 게 없구나 하는 탄식을 준 주제가 됐습니다. 이것도 국민의 정부가 관료적 저항을 과도하게 고려한 결과 아닙니까?

한상진: 인권법은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이 녹아 있는 법안이고 개혁이기 때문에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처음부터 접근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얘기는 옳습니다. 인권법에 관해서만은 좀 저명한 민간, 재야, NGO 법률가들, 지도자들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되고 법무부가 여기에 협력하는 방식으로 추진했으면 모양도 좋고 내용도 좀더 알차지 않았겠느냐 하는 말을 사후적으로는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내막을 보면 대통령 선거공약 사항이었기 때문에 인권법에 대해 법무부가 그것을 준비하겠다는 보고를 일찌감치 하고 추진했어요. 일단 법안은 그렇게 마련이 됐습니다. 그걸 확정하기 위해 인권 NGO와 함께 공청회도 열고 이런저런 토론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핵심은 인권위원회가 법무부로부터 완전하게 독립 자율적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법무부도 어느 정도 그 점을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인권단체들의 기준으로는 미흡한 거죠. 아울러 여기에는 다소 최대주의적인 시각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인권위에서 수사도 하고 강제시정 명령권도 갖겠다는 얘긴데 그 부작용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리나 현실은 100% 이상사회는 아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의견차이는 충분히 조절할 수 있으리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렵다는 것이 아쉽게도 우리 현주소입니다.

조희연: 지역주의 극복을 사명으로 한 국민정부에서 오히려 지역주의가 더 심화되고 있는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상진: 그동안 정당이나 정치인이 정치적 목적으로 가장 잘 활용해온 자원이 바로 지역감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불행했던 우리 정치사를 그대로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지역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김대중정부는 그 해결책을 선거제도와 정당구조의 개혁에서 찾아보자는 취지로 정치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적으로는 근대화과정에서 제 것만 챙기는데 급급하다보니 역지사지하는 마음이 허물어지고 자기주장만 늘어놓게 되어 지역감정도 점점 늘어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희연: 집권여당이 정치개혁안으로 내놓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 대해 일본식의 변종이 되고, 위헌적 요소도 있고, 3석을 얻거나 5%를 얻어야 되는 진입장벽도 너무 높아서 새로운 정치세력 진입이 어렵지 않느냐 그래서 결국 정당질서의 개방화라는 차원보다는 국민회의의 다수당화를 지향하는 정략적 요소가 너무 강한 게 아니냐 하는 비판도 있지 않습니까? 한상진: 비례대표제를 하면 어느 나라나 진입벽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러나 진입벽이 너무 과도하게 높으면 안되겠죠. 진입벽을 허물 수는 없는 거고 낮출 수는 있겠죠. 그리고 진입벽을 통과했을 경우에는 오히려 복수 정당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요소도 충분히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진보정당이 서면 오히려 비례대표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원내에 진출할 수 있는 이점도 가질 수 있을 것 같구요.

조희연: 정당정치 혁신과 관련해서 통일 전까지는 민주화세력이 중심이 되면서도 좀더 폭넓은 세력이 가세된 합리화된 자유주의적 정당과, 과거의 산업화 세력이나 독재세력이 기반이 되지만 합리화된 보수적 정당, 그런 양당제도가 불가피한 게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황태연 교수의 주장도 이에 속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진보정당과 같이 지역주의와 전혀 무관한 새로운 정치세력이 포함된 구도가 바람직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의 국민회의나 한나라당을 확대개편한다고 지역주의가 탈색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니까요.

한상진: 정치의 기본 축을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보려는 것을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만, 저는 이런 사고방식이 19세기나 20세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서구의 패러다임으로만 우리를 자꾸 유추하는 것 같아요. 조만간 21세기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사고방식이 조금 유연해지고 우리의 전통이나 문화와 맥이 닿는 새로운 발상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도식적인 진보·보수 식의 패러다임만으로는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남북문제, 동아시아 속에서의 한국, 한국의 미래를 포착하는 데 불충분해요. 그런 의미에서 요즘 거론되는 ‘제3의 길’도 흥미있는 화두입니다.

조희연: 현실적으로 그 지향은 맞고요. 일단 한국적인 성격들이 뭔가 새로운 정당의 지향이나 질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쟁점은 녹색당이나 사회민주당 노동당 같은 진보적 정당이 이제는 필요한 시점에 와있지 않느냐, 이제 한국도 고도 산업화 사회니까요. 그리고 한 선생님도 그걸 지지하는 얘기도 하신 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상진: 진보정당은 필요하지만 그건 결국 국민이 선택을 해야 되는 게 아닌가요? 국민이 투표를 통해 어디를 지지하느냐, 투표제도 선거제도와도 연관된 게 아닙니까. 한 표를 던지느냐 두 표를 던지느냐에 따라 굉장히 달라질 수 있고요. 어쨌든 국민의 선택이 중요하다 이겁니다. 결국 국민의 가치지향과 정당사이에 어딘가 일체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희연: 정신문화연구원 원장뿐만 아니라 노사정위원회, 제2건국위원회 등 여러 곳에 관여하고 계신데 가장 애정을 가지고 일하시는 데는 어디입니까? 또 정신문화연구원을 정치화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상진: 당연히 정신문화연구원에 애정이 많죠. 정신문화연구원이 내 주업이고 다른 것은 도와드리는 것이죠. 제 자신을 돌아볼 때, 제일 먼저 참여했던 곳은 노사정위원회입니다. 그건 정말 제가 자원했어요. 사회학자로서 이 분야에 대해서만은 도와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어디 뛰어들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의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 동기에 대해 오해도 있기는 하지만, 제가 한국학의 세계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래전부터입니다. 많은 국민은 우리나라가 앞으로 제대로 되려면 가치관 정립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그동안 무너진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데 앞장서 달라는 주문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연구원은 우리의 정신문화 유산을 미래지향적으로 재해석해서 사회발전의 기초로 삼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우리가 마치 무슨 통치이념을 만들려고 한다는 시비를 걸어요.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데 대해 저로서는 좀 아쉽고 야속하고 현실이 매우 척박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지난 2월말, 제주도에서 인권관련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유엔 인권헌장선언 50주년을 기념하는 국내 최대 인권전문가 관련 모임이었죠. 그 자리에서 유교와 인권의 관계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우리 전통 안에 인권을 떠받들어주고 인권을 지원해줄 수 있는 문화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걸 찾아서 우리 나름대로 서구와 대화할 수 있는 보편적 사상을 만들어 내야할 게 아니냐, 그런 관점에서 과거 권위주의와 유착됐던 유교를 해체하고 민본시대, 공론정치, 중용문화 등을 복원하는 새로운 독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동양과 서양의 대화를 위한 학문적 프로젝트일 뿐입니다. 또 이런 연구를 통해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문화적 뿌리를 확립할 수도 있죠. 이런 얘기를 했는데 어느 유력지 기자가 찾아와서 인터뷰를 하더니 무슨 통치이데올로기를 만든다, 이런 보도를 했어요. 나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언론이 가치관 정립을 도와주기보다 싸움붙이는 데 앞장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조희연: 제2건국위원회의 경우 초기 작업과정에서 그 순수성이 시민사회에서 의심받게 되면서 특별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게 되었고 지금도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에 대한 판단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한상진: 많은 오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래를 누구도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도 확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처해 있는 객관적인 상황에서 보면, IMF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고 21세기의 새로운 국가상을 만드는 데 특단의 자기반성과 개혁 노력이 없이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지가 제2의 건국이라는 것으로 녹아 있다고 판단하거든요. 우리의 일상언어에서 ‘제2의 인생’이 결코 과거 부정이 아니듯이 제2의 건국도 과거 부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불완전하게 되어 있던 것을 큰 틀로 완성시키자고 하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는 정치적인 오해도 많고 동기의 순수성에 대한 의심도 제기되고 있어 이에 참여하고 있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곤혹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관 주도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비판에 따라 김상근 목사를 새 기획단장으로 모시고 체질개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만일 제2건국이 정치적인 것으로 변질된다면 가차없이 비판하고 그렇게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조희연: 끝으로 시민운동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죠.

한상진: 우리나라 시민운동이 순수성과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문이 없어요. 그걸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는 시민운동이 국가발전, 민족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능력이나 기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3두 마차 체제가 필요해지니까요. 한 체제를 운영해가는 삼각틀에서, 과거에는 정부가 많은 일을 했고 70년대 후반부터 정부와 대기업이 중심이 됐는데 지금은 시민사회가 또 다른 축이 되거든요. 시민운동의 순수성, 도덕성, 자율성이 훼손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정부나 기업이 할 수 없는 어떤 순기능을, 사회발전을 위해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시민사회, NGO의 기능을 어떻게 활성화시킬 것이냐는 단순히 시민운동의 과제만은 아니고 우리나라 전체의 과제라고 봐요. 이런 생각틀을 잘 발전시키는 것이 제2의 건국의 길이라고 봅니다.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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