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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년 05월
  • 1999.05.01
  • 507
공익소송으로 시민단체와 연대하겠다
지난 해, SBS에서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강기훈 씨 유서대필 사건’을 본 적이 있다. 이른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91년 열화와 같았던 ‘5월 정국’의 와중에서 돌출된 사건으로 부정한 권력이 자행한 대표적 공안 망령 중의 하나였다. 정의와 진실이 도도한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갈망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의 전말을 보며 절망과 치욕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변론을 맡아 진실을 위한 눈물겨운 법정투쟁을 벌였던 15명의 변호인단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치욕감은 더욱 크지 않았을까. 당시 주심변호사를 담당한 이석태 변호사가 이 사건을 회상하며 울먹이는 장면을 보며 뭉클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변호사의 눈물은 자명한 진실을 지키지 못했다는 법조인의 양심에서 우러나온 것 아니었을까. 대법원 판결이 난 후 김창국 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창간호의 권두언에서 ‘판결의 판결’을 적은 바 있다. “이제 사법적 판단은 끝났다. 그러나 역사적 판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사적 판단 작업은 계속돼야 한다.”80년대에는 ‘학살의 원흉’이 옥좌에 앉아 있었다. “학살에 치를 떨며 들고 일어선 사람들은 지금/ 죽어 잿더미로 쌓여 있거나/ 감옥에서 피를 흘리고 있”(김남주 「학살3」 중에서)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부정한 권력은 자신들의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과의 ‘추악한 전쟁’을 서슴지 않고 자행했고, 그 결과 감옥은 양심수로 넘쳐났다. 80년대 후반(86년∼88년)에는 한꺼번에 대학생 1,600명이 구속되는 최악의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인권의 대량 실종사태는 양심적 법조인들에게 군사독재 정권에 희생된 양심수들의 보호와 변론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부름에 응한 변호사들의 모임이 바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회장 최영도)의 모태가 되었던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였다. 당시 정법회의 주요 멤버는 70년대 민청학련 사건 이후 80년대 중반까지 시국사건을 도맡아온 이른바 ‘4인방 변호사’(이돈명·조준희·황인철·홍성우)와 함께 다수의 젊은 변호사들이었다.

80년대는 정치적 민주화에 무게중심 둬

86년 5월 19일 정식 발족한 정법회는 이후 87년 6월항쟁 이후 법조계에 등장한 법조계 시니어그룹의 모임인 청년변호사회(청변)와 통합, 마침내 88년 5월에 51명의 변호사들이 모여 민변을 결성하게 된다. 민변의 조직 위상은 회칙 제2조 ‘목적’ 항목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모임은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연구, 조사, 변론, 여론형성 및 연대활동 등을 통해 사회의 민주적 발전에 기여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민변의 창립은 해방 이후 꾸준히 진행된 민주화운동의 소중한 결실이었다. 제3의 법조 실세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보수적인 법조계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지난 해 창립 10주년을 맞아 펴낸 『민변 백서』에서 민변은 창립의 의의를 세 차원에서 찾고 있다. “첫째,구조적으로 행해지는 인권침해에 대해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대응하며, 둘째, 법조 민주화와 여론형성 활동을 통해 변호사운동을 전체 민주화운동의 한 부분으로 위치지울 수 있게 되었고, 셋째, 전문가집단이 지닌 합리성과 전문성을 살려 법 제도와 이념에 대한 비판과 건설적 대안 제시에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민변의 활동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활동은 무엇일까. 민변 윤종현 사무총장(45세)은 “개인 차는 있겠지만, 민변의 회원들이 앞장서서 변론했던 부천서 성고문 사건(85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87년), 윤석양 이병 사건(90년), 강기훈 사건(91년)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부영 씨를 숨겨주었다는 혐의로 법정에 회부된 ‘피고인’ 이돈명 변호사를 대다수 민변 회원들이 변호인단을 구성해 변호한 사례도 꼽았다. 어쨌든 민변의 활동은 곧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의 역사였다는 평가가 가능할 법하다.

지난 80년대 민변의 활동은 ‘정치적 민주화’에 무게중심이 있었다. 그런 탓에 시국사건의 법정에는 항상 민변의 변호사들이 있었다. 전두환의 5공에 이어 권좌를 물려받은 노태우의 6공 또한 본질적으로 달라진 바가 없었다. 90년 1월 이른바 3당합당 이후 사회가 급격한 보수화로 회귀하면서 시국사건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사노맹 사건 등 각종 시국사건의 변론, 양심수 석방 촉구, 반민주악법에 대한 개폐, 법조개혁, 민주단체와의 다양한 연대활동은 해를 더 할수록 잦아졌다.

시민단체와의 연대활동 수위 높이겠다

92년 김영삼정부 출범 이후 민변은 활동의 폭을 더욱 넓히기 시작했다. 정치 중심의 변론에서 조금씩 탈피하여 ‘생활변론’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정치적 자유를 향한 민변의 활동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가령, 5·18특별법 제정을 위한 활동과 안기부법·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맞서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사회단체와 연계하여 조직적인 대응을 했던 것은 빛나는 사례였다. 어쨌든 90년대를 맞아 민변은 초기의 대표간사제에서 벗어나 94년에는 회장 체제를 갖췄고, 사법 내부의 각종 문제에도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사법개혁 문제에 대해 민변이 상대적으로 관심이 소홀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측도 로스쿨 도입 등 단편적인 문제 제기에 그쳐 진정한 의미의 사법개혁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사법개혁 문제는 워낙 방대한 데다 국민생활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종합적인 기획이 정말 필요하죠. 그런데 개혁의 우선 순위도 없고 너무 즉흥적으로 문제가 돌출되었다가 서너 달 지나면 흐지부지되곤 했습니다. 김대중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8월말까지 대통령 직속 사법개혁위원회를 구성한다는 것인데, 너무나 문제 의식이 얕아요. 적어도 4년쯤은 준비해야 되지 않겠어요?” 윤종현 사무총장의 언성이 다소 높아졌다. 윤 사무총장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인권을 강조하는 ‘국민의 정부’가 인권의 정치를 강조했음에도 별로 내실은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무엇보다 준법서약서 제도의 도입과 대표적 악법인 국가보안법의 잔존을 꼽았다. 대외적인 언표와 실제 내용의 불일치가 국민의 정부의 인권 현주소라는 것이다. “법무부 책임이 크죠.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선거 공약과 일반 국민의 기대 수준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인권정책이 나오는 것 아닐까요? 오죽했으면 우리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국가인권회 구성과 관련하여 법무부 안을 반대하는 신문광고를 냈겠습니까? 민간 인권단체의 의견을 수렴하지는 못할망정 정부가 배척해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윤종현 사무총장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룬 국민의 정부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산다. 그런데도 인권문제와 관련, 법무부의 유일한 치적은 법정에서 미결수가 사복을 입게 한 조처였다고 쏘아붙였다. 민변이 현정부의 인권정책을 다소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인권’이라는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인간의 권리를 지키려는 역사적 소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변은 법률실무단체이다. 그런 탓에 소송을 통해 사회의 변화에 기여하는 것은 단체로서 민변이 가지는 고유한 위상이다. 이와 관련 최근 민변은 환경·언론·남북관계·행형제도·경제민주화·형사소송 절차 등 국민들의 공공이익을 추구하는 ‘공익소송’에 더욱 관심을 갖고 실행에 옮길 계획이다. 그러나 이 일은 민변 혼자 힘으로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각 부문의 시민단체와 연대의 수위를 높이지 않으면, 각종 잘못된 제도개선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 아닐까. “시민단체들이 민변에 다양한 요구를 했으면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요구에 더욱 부응하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한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민변은 그런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줄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몫을 다하겠습니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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