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쟁점 하나-대선전략

후보전술이냐, 정책선전이냐

올겨울 들어 처음으로 큰 눈이 온 지난 11월 30일 저녁, 연세대 동문회관에선 통일시대국민회의 창립 2주년 기념 공개토론회가 있었다.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성난 눈발을 헤치고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의 꽤 명망있는 활동가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토론회 주제는 ‘97년 대선과 민주진영의 선택’. 이날 주최 측인 통일시대국민회의 발제자로 나선 나상기 씨(통일시대국민회의 대선대비모임 대표)는 「97년 대선과 민주진영의 과제」라는 제목의 발제문을 통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보진영 내 대선 논의를 크게 다섯 가닥 정도로 나눠 정리했는데, 새정치국민회의 지지론, 여당 내 비지역주의 개혁후보 지지론, 제3의 개혁후보 지지론, 독자후보론, 대선 불개입론 등이 바로 그 가닥들이다.

‘신종’ 비판적 지지론들

우선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한 것은 바로 ‘새정치국민회의 지지론’, 즉 김대중(DJ) 총재 비판적 지지론이다. 김영삼 정권 초기의 개혁이란 게 결국 한계에 부딪히고만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권의 태생적 한계 탓이었다. 그런 만큼 대한민국 역사상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선거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만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의 획기적 진전을 이룰 수 있으며, 그렇다면 결국 가능한 대안은 DJ 지지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지난 92년 대선 때와 마찬가지로 이 입장에는 너무나 커다란 암초들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 DJ의 보수화. 92년의 ‘뉴DJ플랜’이 단지 분칠 수준이었다면 아무래도 이번의 보수화는 돌이킬 수 없는 환골탈태로 봐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이보다 더 심각한 암초는 DJ의 단독적 집권 가능성에 대한 회의섞인 전망들이다.

물론 DJ 자신이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그가 현재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게 바로 자민련, 대구-경북(TK) 등과의 연합을 통한 부산-경남(PK) 포위 지역연합 집권전략이다. 그런데 이 경우, 진보세력에게는, 수구잔당들의 결집체인 자민련을 어떤 식으로든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 보수화한 DJ를 지지한다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고육지계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진보세력 일각에서 예전에는 보기 드물었던 ‘여당 개혁후보 지지론’ 같은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이번에도 DJ를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의 이런 맹점들 때문이다. 보수화한 DJ를 지지할 바에는 여당의 비교적 개혁적인 후보를 지지해서 뚜렷한 개혁지향을 지닌 차기정권을 구성케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현재로선 누가 집권당 대통령 후보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저 물 밑에 잠복해 있는 것처럼만 보이지만 일단 이회창 고문이나 김덕룡 의원 같은 비영남 출신 중도성향 후보가 신한국당 후보로 확정되면 예상 밖의 커다란 세를 업고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기자가 만난 대다수 시민사회운동 활동가들은 이 신판 비판적 지지론이 오히려 구판보다 더 많은 허점을 가지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우선, 이회창 고문이나 김덕룡 의원이 DJ보다, 혹은 DJ만큼이나마 개혁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서 대부분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개혁후보 1순위로 올려지는 이회창 고문의 경우만 해도 결코 DJ보다 더 개혁적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의 주장과는 약간 궤를 달리 하지만 ‘제3의 개혁후보 지지론’이란 것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지역통합추진위원회(이하 통추)가 진원지로 알려져 있는 이 주장은 여당의 대선 후보 향배나 국민회의-자민련 연합의 향배가 어떻게 되느냐를 주시하면서 지역통합과 개혁을 앞세운 민주세력의 ‘제3후보’를 내세우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결국에는 ‘여당 개혁후보 지지론’에 합류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독자후보는 가능한가?

결국 남는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진보세력의 독자적인 후보를 내세우는 것, 혹은 아예 대선에 후보전술과는 다른 방법으로 개입하는 것. 현재의 제도 정치권 일부와 연결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정치상황을 만드는 게 어떤 식으로든 난망한 것이라면 시민사회운동세력이 선택해야 할 길은 그 제도 정치권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시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로서 가장 적극적인 것은 아무래도 진보세력의 독자적인 후보를 내세우고 독자적인 이념과 강령의 정치조직, 즉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일일 것이다.

현재 제도 정치권 전체의 보수화가 더욱 심화돼가면서 반사적으로 진보진영 내에서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에 대한 각성도 보다 높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이번의 경우 어쩌면 지난 87년이나 92년의 민중후보운동과는 달리 민중운동 대다수의 합의에 의한 독자후보운동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희망섞인 전망이 조심스럽게나마 대두되고 있다.

독자후보전술에 대한 논의가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수준에서나마 제기되고 있는 곳은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의 일부로 알려져 있다. 전국연합의 박홍순 조직국장은 “아직도 대중조직 내에는 민주대연합 입장을 견지하는 활동가들이 있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독자적 정치주체로서의 계획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아진 게 사실”이라고 전국연합 내부의 움직임을 소개했다.

그런가 하면 민주노총에서는, 이번 대선에서는 반드시 민주노총과 전체 진보진영의 입장을 선전할 수 있는 노동자후보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후보운동의 성과에 기초해서 진보적인 노동자 정치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아직까지 어떤 공공연한 대중적 논의로 불붙여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위’의 분명함을 흐리기에 충분한 ‘현실’의 엄혹함 때문이다. 일단 독자후보운동이 당장에 집권까지를 노리는 전략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이후 진보적 정치조직 건설의 기반이 되기 위해선 의미있는 수의 표를 얻어야만 할 텐데, 지난 두 번의 독자후보운동의 경험은 이에 대해 냉정한 비관을 강요한다. 더구나 김영삼 정권 이후 고착화된 진보진영 내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정서는 독자후보운동같이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운동이 과연 가능하겠느냐 하는 데 대해서 지레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게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해, 지난 4·11총선에서 관악지역에 전국연합 독자후보로 나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함운경 관악청년회 대표는 “도대체 조건이 다 갖춰지길 기다리고서 출마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진보진영이 다른 정치세력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정립되는 것은 결코 우회할 수 없는 과제”임을 역설한다. 진보진영이 얻을 수 있는 과실들이 보다 많다고 전망되는 98년 지방자치선거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대선을 통해 중앙정치의 대안적 세력으로 서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다가오는 2월에 있을 전국연합 대의원대회는 바로 이러한 주장이 공공연한 토론에 부쳐지는 장이 될 것 같다. 논쟁의 긴장이 없는 이 황폐한 시대에 이 논의는 논의 자체만으로도 전체 진보진영에 일정한 활력은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정책선전 등을 통한 측면개입

기자는, 민중운동으로 분류되는 운동진영의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시민운동단체의 활동가들 가운데에서도 독자후보운동의 의의나 독자적 진보정치조직 건설의 의의에 대해서 동의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역량 문제를 근거로 한 비관론 때문에 그 실현가능성에 대해선 다들 ‘안타깝지만 어쩌겠느냐’는 태도만을 보이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이번 대선에는 제도정치권 후보에 대한 지지·연합 전술이나 독자적인 후보운동 전술 등을 포기하고 정책선전이나 여론화 등의 측면개입을 주로 하자는 의견이 나름의 세를 이루고 있다.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중요한 과제라면 98년 지방자치선거를 그 현실적 기점으로 삼고 대선은 이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한 길목 정도로 생각하자는 의견도 있다.

사실 이런 의견이 대두되는 배경에는 그동안 그 외연이 나름대로 확장된 한국사회 대중운동의 본래적 고민도 섞여 있다. 소위 문민정권이 들어서면서 시민운동 혹은 신사회운동 부분이 전체 시민사회운동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등장한 사실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이들의 경우는, 사실 독자후보운동과 같은 정치운동을 조직적으로 공공연히 지지한다는 것은 ‘아직’ 혹은 ‘원론적으로’ 낯선 일이다. 독자후보운동이 실제 이루어지든 아니든, 이런 부분에선 어떤 측면개입의 필요성이 원래부터 제기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측면개입의 적극적인 상이 어느 정도나 가능하겠느냐 하는 문제다. 지난 92년 대선의 경우 시민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돼 공명선거감시운동이 활발히 벌어졌는데, 이번 대선에도 이런 공명선거감시단 수준의 활동이 시민사회운동단체 활동의 중심이 돼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많은 활동가들이 다 ‘그 정도로는 안 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공선협 활동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YMCA의 남부원 시민사회개발부장도 “대선에 대한 기존의 시민사회운동의 개입 방식, 즉 공명선거감시단식 활동에는 이제 반성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못박으면서 “보다 적극적인 정책선전을 통해서 차기 대통령에게 개혁과제를 제기하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난 4·11총선 당시 민주노총 등의 시민사회 8개 단체가 벌였던 개혁과제 제시 및 선전활동이 대선이라는 장 속에서 보다 발전되고 확장된 형태로 전개돼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정책선전활동에 커다란 의욕을 보이고 있는 단체는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이하 참여연대)다.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은 참여연대는 이번 대선에서 적극적인 정책선전활동을 벌일 계획이며 “이러한 선전활동을 각각의 시민사회운동단체가 개별적으로 추진하는 게 아니라 폭넓은 네트워크를 통해 추진한다면 단순한 선전효과 이상의 시민사회운동 재편 및 활성화 효과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자후보 결정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소속돼 있는 대부분의 대중조직들에 알맞은 수준의, 다른 형태의 개입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전국연합도 마찬가지의 포부를 가지고 있다. 박홍순 국장은 “독자후보전술과 무관하게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의 광범한 네트워크를 통한 정책선전, 여론화 등이 추진될 것”이며 “이러한 실천과정은 전국연합이 꿈꾸는 광범위한 시민사회운동 연합조직의 형성이라는 과제의 실현에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이렇듯, 수구, 보수 정치세력에 의해 휘둘려질 이번 대선을 진보세력의 기본토대를 다시 철저히 다지는 기회로 활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소위 ‘불개입-측면개입론’도 그 어떤 후보전술론에 못지 않은 나름의 적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뭘하든 ‘판’은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측면개입론이 뭔가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전술로만 보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우선 활발한 정책선전활동을 강조하는 활동가들 자신이 선거법이 강요하는 합법성의 좁은 한계를 뼈저리게 알고 있다.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을 기존 정당의 경쟁자로 생각하고 그 참여를 원천봉쇄하는”(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고계현 부장) 현행 선거법은 우리 사회의 또하나의 악법이다. 이 법이 제도정치권 내의 여,야의 담합 속에 전혀 개정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과연 어느 정도나 활발한 측면개입활동이 실천될 수 있을지에 대해 활동가들 자신이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지난 4·11 총선 당시에 느꼈던, 법적 한계라는 벽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여, 야 할 것 없이 보수화되기만 하는 현재의 한국정치상황에서 과연 대통령 후보들에 대한 정책적 압력이란 게 가능할 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시민사회의 진보적 목소리를 정치사회에 강제할 진보적 정치조직의 필요성이 다시 한번 절실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독자후보운동과 측면개입활동의 ‘동시전개’와, 이를 통한 정치조직의 건설 및 전체 시민사회운동의 재편이라는 그림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독자후보운동이나 측면개입활동이나 모두 제대로 실천될 수 있을지 의문시되는 판국이라 오히려 두 운동 다 그저 그렇게 흐지부지되고 마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형편이다. 하지만 일단 이 사회의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라면 이 옹색한 형편을 우회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애초에 임무를 완수하는 게 그대들에게 달려 있지 않았듯이 그 임무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그대들에게 달려 있지 않다.” 2천 년을 기다려도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가 이루어지지 않자 역사적 해방에 대한 허무주의에 빠져버린 유대인들에게 던져진 한 랍비의 이 말은 우리에게도 들어맞는 진리가 아닐까? 회피할 수는 없다, 함께 고민해야 할 뿐.

장석준 본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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