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진단

97년 대선보도, 사운을 건 ‘줄서기’

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부 기자들에 대한 재배치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김영삼 정권의 등장과 함께 친YS계 기자들을 주력으로 짜여진 현재의 구도를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구조의 변동을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다는 부담이 있다. 따라서 YS계보에 중점을 두고, 호남출신 기자 1명을 배치해 국민회의를 담당하는 등의 현재와 같은 계파별 ‘정보수집’과 ‘로비인맥’ 확보전략은 당분간 크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 일간지 중견기자가 전하는 최근 편집국 동향이다. 대통령선거(이하 대선)가 1년 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언론의 ‘눈치보기’도 점차 치열해질 전망이다. 행정·입법·사법에 이은 ‘제4의 권부’라는 언론. 그러나 그 힘이 ‘제1의 권부’ 청와대에는 못미치는 것이 현실인 탓이다.

대선보도, 신문과 방송 모두 ‘한길’

97년을 여는 우리 사회의 화두는 대선이다. 언론계도 대선 보도를 둘러싼 논란으로 한 해를 보낼 전망이다. 하지만 그 논란은 어느 후보가 바람직하냐 차원이 아니다. 본질은 사운을 건 ‘줄서기’이다. 매체별 특성과 소유구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신문·방송 모두 ‘한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이어진다.

사실상 청와대에서 방송사 사장을 선임하는 현재와 같은 구조에서는 공정방송은 물 건너갔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선거 이후의 ‘논공행상’에 따라 앞날이 좌우될 경영진과 보도간부들이 어찌 편파보도를 아니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과거와 같은 ‘안정론’과 ‘색깔론’의 구도는 아니더라도 동원가능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4·11총선 때도 등장한 카메라 앵글조작으로 집회 군중 늘리고 줄이기 등의 수법은 ‘고전’에 속한다. ‘유세장 스케치’처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교묘한 편파가 가능한 아이템은 널려 있다는 지적이다. 언론을 전담하는 한 야당 당직자는 사석에서 대선보도와 관련 “이미 방송은 포기했다”고 말할 정도다.

96년에 방송은 권력에 지극히 약한 속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당정개편 예측보도에 화가 난 김영삼 대통령의, 이득렬 MBC 사장에 대한 ‘호통전화’ 파문은 단적인 예이다. 홍두표 KBS 사장이 ‘사운’까지 거론하며 중간간부들을 독려, 결사적으로 방송단일노조를 반대한 것도 청와대의 ‘고과표’를 의식한 때문이라는 게 사내외의 분석이다. ‘발암분유’ 보도에 정부당국이 취재기자 조사라는 본말이 전도된 대응을 보였지만 거의 침묵으로 일관해 기자들 사이에서 “청와대는 고사하고 검찰의 눈치까지 본다”는 자조섞인 한탄을 불러일으켰던, 건설회사 태영이 지배주주인 민영방송 SBS도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

신문은 방송보다는 나은 환경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보도행태에선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일단 신문은 이전과는 다소 다른 구도를 보이고 있다. ‘채찍’이 아닌 ‘당근’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미디어시장에서 신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뉴미디어의 등장은 광고시장 뿐만 아니라 판매시장에서도 인쇄매체의 ‘사양화’를 예고한다. 당장 케이블TV가 정상궤도에 올라설 것으로 전망되는 2~3년 후의 시계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다.

신문사의 뉴미디어 사업에 대한 ‘신앙’에 가까운 집착은 업종을 다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전략적 판세읽기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방송업계 진출이 주요 타깃이다. 그러나 지상파방송은 아직까지 물리적으로 숫자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위성방송 진출이 가장 현실성 있는 교두보라는 판단이다.

통합방송법이 97년에 어떻게 제정되든 신문사의 위성방송 참여는 허용될 전망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그럼 인허가권은 누가 갖나? 결국 정부당국이다. 좀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청와대의 ‘결심’이 좌우할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의 당면과제는 무엇인가? 정권재창출이다. 그렇다면 청와대의 눈치를 봐야하는 신문사의 논조는 어떻게 될까?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대목이다.

신문사의 아킬레스건은 단지 신규사업 문제만이 아니다. 김영삼 정부가 차기 정권으로 넘긴 ‘언론개혁’ 과제는 사주 입장에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신문사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와 대통령 일가에 대한 취재에 기반한 ‘X파일’로, 서로간에 공멸은 피하자는 제로섬 게임이론과 같이 절묘한 공존을 이루고 있다는 진단은 일단 접어두자. 그러나 신문전쟁 당시 이미 공론화됐던 경영정보 공개라든가 소유지분 제한 및 시장점유율 규제 등의 조치는 전근대적 언론질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다.

‘공정보도’ 어렵게 하는 명예퇴직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독재정권 시절도 아닌데 사주나 경영진이 하란다고 기자들이 따라가는가?

언론은 주지하다시피 공기(公器)다. 그러나 “중앙일간지 중에서도 몇 년 안에 망하는 신문사가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가질 정도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기자들도 공(公)보다는 기(器) 쪽에 방점을 두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사이기주의’는 더 이상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노조 공정보도위원회 등이 앞장서 자사 불공정보도를 질타하는 ‘공보위 보고서’ 따위를 정기적으로 내는 신문사는 이제 한 손으로 꼽을 정도가 됐다. 그나마 사외에는 알려지지 않도록 한다는 방침을 정한 경우도 있다. “회사가 망하면 기자도 없는 것 아니냐”는 게 시원스럽게 내뱉지 못하는 기자들의 변이다.

또하나의 변수가 명예퇴직과 감원 바람. 96년에 기자들 사이에서는 명예퇴직이 단연 초미의 관심사였다. 더 나아가 연봉제 도입도 시간문제라는 진단까지 제기된다. 명예퇴직이나 감원의 문제가 유독 언론계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자들의 신분 불안은 곧바로 공정보도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여느 직종과는 다른 특성이 있다.

“명예퇴직 실시를 전후로 하여 특정 기사의 보도를 둘러싼 항의가 없어졌다. 간부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공식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기자 개개인의 ‘자기검열’ 경향이 내부화되고 공보위에는 ‘특정 사례’가 보고조차 되지 않고 있다.”

96년 11월 ‘언론사의 명예퇴직 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열린 기자협회 임원세미나에서 토론자로 나선 한 지방일간지 기자는 명예퇴직과 감원 바람이 휩쓸고 간 편집국을 이렇게 표현했다.

권언유착의 방정식은 언론의 짝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권의 원인 제공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언론에 자주 거론되는 한 신한국당 대권후보 진영의 참모는 “청와대에서 대통령후보 조기가시화론에 쐐기를 박고 나옴에 따라 거동에 조심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물 밑에서 개별적으로 언론사 편집간부나 논설위원 등을 만나는 일은 중단없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대권경쟁이 카운트다운에 돌입하는 ‘열전’의 그날을 대비해서 소리소문 안 나게 사전정지작업을 벌일 경우 대상 1순위가 언론이라는 지적이다.

‘OO장학생’ ‘△△계파’ 기자가 존재하는 현실은 공정한 대선 보도라는 97년 언론계의 최대과제를 회색빛 암울함으로 물들이는 언론기상도를 예고한다. 그렇다면 경제기상도는 어떤가? 정치기상도에 이은 경제기상도 역시 빛바랜 색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96년 상반기에 한 경제지 기자들이 만든 회보에 ‘신문 편집국인가 재벌 홍보실인가’라는 제목으로 실린 ‘적색경보’를 들어보자.

금권의 언론통제 ‘위험수위’

“어쩌다가 특정재벌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리면 기사를 쓴 해당기자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다른 기사로 대체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홍보담당 임원 등 경영진이 기사삭제를 요청할 경우 조금의 자존심도 없이 받아들이고 이를 생색내기에 바쁘다. … 특정기업에 비판적인 기사를 삭제할 때 흔히 바로미터가 되는 게 광고다. 경영진은 광고수익을 통한 매출증대에만 관심을 둔 채 신문의 지면은 재벌들에게 내맡기고 있다.”

전체 매출의 70~80%를 광고수입이 차지하는 현실에는 금권을 통한 언론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신문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한 일간지 기자는 “하반기에 불어닥친 광고격감으로 인해 광고주를 비판하는 기사를 싣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라며 최근 더욱 악화된 분위기를 전한다.

그럼에도 97년 언론기상도가 절망 일변도인 것만은 아니다. ‘국민주 방송’ 추진 가시화는 언론 제자리 찾기라는 장정에서 희망의 깃발이다. 언론수용자운동도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불공정 보도의 파고에 맞설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언론노동운동 역시 어떤 정권도 쉽게 꺽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언론단일노조라는 새로운 틀을 짜기 위해 첫 발을 내딛는 해가 될 것이다. 절망을 노래하기에는 이르다. 동토를 뚫고 나와 공정보도를 외칠 민주언론의 새싹은 내일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안영배 한국기자협회 편집부장·본지 편집부주간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