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6월 2010-06-01   1412

참여사회가 눈여겨본 일-희생의 숨겨진 두 얼굴



희생의 숨겨진 두 얼굴


이기찬 영국 랭카스터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전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활동가


호국의 달 6월에 어디선가 들려올 만한 질문이 있다. 당신은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가?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보자. 나는 삼성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에게도 이 질문은 다소 어이없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스스로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라고 말하는 시대에, 그리고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이 고용, 생산 및 수출에서 차지하는 막대한 비중을 생각해볼 때 그 어느 개인, 집단보다 ‘애국’하는 기업인 삼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삼성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하는 것이 조국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이처럼 다소 도발적으로 이 글을 시작한 이유는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문제를 상대화시켜 보다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다. 다시 위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국가를 위한 희생과 삼성(자본)을 위한 그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라는 반문이 당연히 따라온다. 첫 번째 반문의 내용은 아마도 국가와 삼성이 어떻게 동등한 희생을 위한 대상이 될 수 있냐는 것이지 않을까. 삼성은 일개 기업일 뿐이지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우리가 피와 땀으로 지키고 세우고 일군 삶의 터전이라는 생각에서다. 과연 그럴까? 요즘 유행어가 명쾌하게 논박하고 있지 않은가?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 민주공화국인 이 나라는 삼성 총수 1인만을 위한 사면이나 단행하고 있는데.

사실 이 글은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문제에서 국가보다는 희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 희생의 논리는 그 어느 집단보다 국가에 의해서 그리고 그보다 먼저 국가를 위해서 조장되었기에 희생과 국가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모든 개념이 그러하듯 희생도 현실적 맥락과 분리해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누가 무엇을 위해 희생하는가? 아니 누가 어떤 명분으로 희생되는가?



하나, 폭력적 책임의 전가

희생은 원래 자연·신에게 순결한, 즉 죄 없는 동물을 바치는 행위나 그 동물 자체를 뜻한다. 여기서 즉각적으로 희생의 숨겨진 얼굴 중 하나가 드러난다. 희생이란 결코 자발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 동물이 스스로 제 발로 제단에 올라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의 의미를 깊이 있게 분석하여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개념화한다. 소수자·약자가 다수자·강자의 잘못이나 죄를 대신 덮어쓰고 죽는 것이다. 또는 천재지변 등이 일어나거나 사회불안이 생겼을 때 그 배후로 지목되어 박해를 당하기도 한다. 멀리 중세 유럽의 마녀재판이 그랬고 가까이는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간토 대진재가 일어났을 때 재일조선인이 학살당한 것도 이에 해당한다. 또 1980년 5월 광주는 어떠했나.

지라르는 이를 ‘좋은 폭력’이라고 표현하는데 더 큰 전사회적 폭력과 혼란으로 치닫기 전에 작은 폭력을 통해서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종종 보게 된다. 밀실의 어두운 조명 아래 모인 정치, 군사 최고결정권자 등이 다수의 생존(안녕)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선택하는 장면은 소위 좋은 폭력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그리고 사태가 수습되고 나면 마지막으로 남은 절차는 희생자(실은 피해자)를 위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의례조차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지만…….


둘, 폭력의 대가

하지만 이와는 성격이 다르게 보이는 희생도 존재한다. 소위 ‘자발적 희생’이다. 대게 숭고한, 거룩한 희생이나 값진, 참된 희생이라 말할 때 이는 희생자의 자발성을 기리는 것이다. 이 자발적 희생에 우리는 익숙하다. 어려서부터 배운 제방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제 팔을 물이 새는 틈에 밤새 끼운 채 숨을 거둔 네덜란드 소년도 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고 희생된 이승복 어린이도 있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네덜란드 소년은 얼른 집으로 뛰어와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했고 이승복 어린이는 숨죽이고 가만히 있어야 옳았다. 사람들에게, 그것도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희생을 권하는 사회는 과연 바람직한 사회일까?

무엇보다 전사戰死는 국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것의 전형이다. 군인계급 또는 용병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은 혁명전쟁 시기 프랑스 인민들이 처음이었고 이후 프러시아(독일)에서 국민개병제를 실시하게 된다. 이후 유럽 국가들이 징병제를 채택하기 시작하고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자발적 참전이 유례없이 일어나게 된다. 독일계 미국 역사학자인 모세는 당시 청년들 사이에 널리 퍼진 애국심,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갈망, 모험심, 이상적 남성성의 추구 등을 이러한 자발적 참전의 동기로 보았다. 그러나 모두 인정하듯이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은 국가의 강력한 동원기제와 참전의 대가로 주어지는 시민권의 획득이었다. 손에 피를 묻혀야 비로소 국가의 일원으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상당수의 근대국가에서 시민의 필수적 의무로 되어 있는 병역은 만약에 있을 타국과의 전쟁을 위한 것이다. 참전, 즉 전장에 나서는 것은 위의 유럽 청년들 사이에 공유되었던 동기들 중에서 모험심, 이상적 남성성이란 ‘덕목’이 말해 주듯이 당시 낭만주의적 흐름과 더불어 국가에 의해서 끊임없이 미화되었고 전쟁의 참혹함과 죽음은 사소한 것으로 취급, 재현되었다. 우리사회에서도 하나의 상투어로 자리 잡은 ‘꼭 가고 싶습니다!’라는 광고 문구는 이와 꼭 들어맞는다. 군대문화의 폭력성, 분단의 모순 등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군 입대는 그야말로 건강한 청년 남성의 덕목으로 찬양된다.

비록 휴전상황이지만 전선에 나선다는 것은 살육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으로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하나인 마크 트웨인의 반전 우화 『전쟁을 위한 기도』는 남한과 북한에서 자식을 군대로 보낸 부모들의 기도가 유사시 반대편에게는 어떻게 들릴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오,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의 포탄으로 저들의 병사들을 갈기갈기 찢어 피 흘리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포화로 저들의 누추한 집들을 잿더미로 화하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의 죄 없는 과부들이 비통에 빠져 가슴 쥐어뜯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이 집을 잃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흙바람 이는 황폐한 땅을 의지가지없이 떠돌게 하소서. (생략)

– 『전쟁을 위한 기도』(돌베개, 2003) 중 일부


이와 같이 자발적 참전이란 대가를 바라고 적극적으로 폭력에 가담하는 것으로 상대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폭력에 폭력적으로 내몰린 사람들

그렇다면 현역 군인들은 모두 적극적 폭력의 가담자이고 전쟁의 협력자일까? 대부분 그렇지 않다. 이번 천안함 참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천안함 46명의 사망자 대부분이 중간계급 이하 서민계층이다. 모두가 소수자, 약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결코 이 사회의 특권층 또는 기득권층은 아니다. 이들, 그리고 군복무를 하는 남성 시민들이 분단의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 직접적 일차적 책임이 없고 분단으로부터 오는 특수이해관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분단의 책임과 병역의 의무가 과도하게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은 이러한 과도한 책임의 전가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대가를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국가가 이들에게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군가산점제와 같은 문제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책임 방기로 생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비 특권 계층의 남성 시민들은 보상심리로 그리고 현실적 필요로 군가산점제와 같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고 하다가 또래의 여성시민들과 갈등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앞서 지적한 희생의 숨겨진 두 얼굴, 즉 책임의 일방적이고 폭력적 전가와 이에 내몰린 사람들이 자신들이 당하거나 저지른 폭력의 대가를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되는 현상은 끊임없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게 된다. 힘 있는 남성은 힘없는 남성의 희생을 요구하고 그 다음은 여성이, 마지막으로는 장애여성, 외국인 이주여성들이 희생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근본적이고 구조적 책임이 최종적으로는 이렇게 희생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국가와 사회에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희생과 죽음에 대한 예의

희생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장치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국립묘지다. 3·15, 4·19, 5·18을 위한 국립민주묘지들은 그 성격을 달리 하지만 서울, 대전 등지에 있는 현충원과 호국원은 현재의 분단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정당화하고 전사자를 미화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희생을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이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약속도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과 그들 자녀들의 높은 병역면제비율을 보면 얼마나 허울 좋은 말뿐인지 금세 드러나고야 만다.

사실 이러한 약속에 대한 불신과 기만은 전혀 새롭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말들이 허언에 지나지 않음을 이미 체득하고 있다. 때문에 현충원 입구 안내문에서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단정한 차림과 경건한 마음을 당부하고 있지만 가까이 사는 주민들은 형형색색의 운동복과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와 선글라스 등을 착용하고 부지런히 아침, 저녁으로 현충원 경내를 빠른 걸음으로 누빈다. 이 운동객들은 주로 현충원 뒤쪽으로 형성된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몇몇 운동에 더욱 열심인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 묘역 바로 앞의 언덕, 현충원 안쪽 중심부의 전망 좋은 장군묘역에 올라 한강을 내려다보며 어깨와 팔을 들썩들썩한다.

한 폭의 초현실주의 그림 같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나도 우스꽝스럽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나는 이것이 바로 이 국립묘지를 만든 사람들이 자초한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희생은 결국엔 거부해야 할 것인지만 자신은 희생하지 않고 약자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기만, 죽음마저도 평등하게 여기지 않고 높은 지위와 계급에 있던 사람들에게만 가장 몫 좋은 자리에 넓은 묘지와 큰 묘석을 마련해놓은 특권의식의 한 복판에서 경건한 마음은 애초에 생길 수가 없다. 묘하게도 사람들은 이런 특권적이고 차별적인 공간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이들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툭툭 탁탁 팔, 다리를 두어 차례 털고 가는 것이다. 만약 전쟁에서의 희생과 죽음에 제대로 예를 갖추려면 모든 죽음을, 심지어 그 죽음이 전쟁에 반대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동등하게 취급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개인의 희생 없는 국가와 사회는 존재하는가?

개인의 희생 없는 국가와 사회는 존재하는가? 단언컨대 지금까지는 그런 국가와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희생은 폭력과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폭력이 일상화된 곳일수록 희생은 한편으로 강요되면서 다른 한편으로 찬양된다. 폭력의 구조가 단단한 국가라면 국가를 위한 죽음을 미화하는 방법과 양식도 더욱 세련되어 있다. 그토록 부러워하는 서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바로 그 세련된 방법 중 하나다. 모든 목숨은 평등한데 귀족 목숨 하나를 던져주고 평민 목숨 천 개, 만 개를 얻는 교활한 방법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유럽의 이름난 성당 그 어디에도 참혹했던 그 수많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석판 하나 없는 곳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성당들이 그 전쟁을 기획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람 또한 기리고 있으며 전쟁에 대해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는 곳은 드문 것같이 보인다.

다시 위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전망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 지금, 개인의 희생 없는 국가와 사회는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품고 있는 기대치를 약간 낮추어서 묻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소수자와 약자의 희생 없는 국가와 사회는 존재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도 대답이 머뭇거려진다면 그때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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