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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09월
  • 2010.09.01
  • 957

사랑에 빠진다는 것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엘비스 프레슬리는 노래한다. “현명한 이들은 바보들이나 돌진한다고 말하지요. 그러나 당신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나는 어찌할 수 없어요.”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사랑에 빠지다’fall in love라는 영어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사랑은 기본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사랑은 이리저리 따지고 계산해서 결정하는 합리적 행위가 아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행위가 아니기에, 현명한 이들은 사랑에 빠져드는 열정에 몸을 맡기는 일을 바보들이나 하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얘기했을지 모른다. ‘돌진’하고 ‘빠지는 일’은 이성을 벗어나는 일이므로, 그것은 위험하고 때로 치명적이다. 사랑에 빠져 죽음을 선택하고야 마는 연인을 그린 고전인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바로 그런 치명적인 사랑의 힘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치명적 사랑은 결국 적대와 반목이 지속되던 베로나의 두 집안을 화해시키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첫 눈에 사랑에 빠져서 그 강렬함 속으로 돌진했다는 그 사실, 그 어리석음이 수 십년간 이성으로는 풀지 못했던 두 집안 사이를 일거에 풀어버리는 근본적인 힘이 된다. 그런 점에서, 치명致命적인 것은 그 뜻에 새겨져있듯 ‘죽음이나 멸망’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고, 어떤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세계를 탄생하게 만드는 생성生成의 역할을 동시에 가능케 한다.


사랑이라는 사건

미조구치 겐지의 <츠카마츠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유한 상인의 부인 마님과 가난한 점원 모헤이 사이의 사랑 역시 치명을 통해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의 힘을 말하고 있다. ‘불륜’이라는 딱지와 함께 결혼 제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관계를 맺게 되는 이 영화 속 남녀는 자신들의 사랑을 끝까지 관철시킴으로써 결국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는 운명을 맞게 되지만 형장을 향해 가는 두 주인공의 얼굴엔 오히려 미소가 번져있고, 군중들은 “마님께서 저렇게 행복한 얼굴을 하시다니. 모헤이 씨도 얼굴이 밝아. 정말 죽으러 가는 게 맞는 걸까?” 하며 의아해한다. 마님과 모헤이는 곧 죽겠지만, 군중들의 의아함, 즉 이들의 ‘감각’은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그 감각은 곧 ‘사랑은 죽음 앞에서도 행복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마님과 하인의 사랑이라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새로운 감각의 생성은 단숨에 결혼을 둘러싼 법을 무너뜨릴 수는 없겠지만, 그 법이 그리 견고하지만은 않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면서 법 주변을 영원히 맴돌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이러한 사랑의 힘을 ‘사건’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사랑은 기존의 질서에 동조하지 않으며, 그 속에 균열을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사건’이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이라는 사건은 ‘혁명’과 일맥상통한다. 기존의 질서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혁명처럼, 사랑 역시 근본적으로 그러한 혁명적 변모를 생성시키는 힘이다. 사랑에 ‘빠진다’고 할 때, 이미 그 사람은 기존에 자신이 서있던 곳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는 자신이 빠져버린 새로운 공간, 즉 사랑의 대상이자 또 하나의 사랑의 행위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 위에 있는 것이다. 그 공간은 판타지 세계 속에나 등장하는 환상의 공간은 아니다.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 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라는 노래 가사에서처럼 사랑의 공간은 매우 현실적이고 때로 비참할지라도 사랑하는 ‘고운 님’과 함께함으로써 완전히 새롭게 변모한 공간이다. 또한, 사랑하는 이들의 시간은 일직선상에서 흘러가는 일상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벗어나 둘만이 새롭게 구축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십년의 기다림도 하루만큼 짧을 수 있고, 하루의 시간도 십년의 밀도를 가지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이라는 홈이 패인 시공간은 사랑의 사건을 통해 어느 순간 가능성으로 충만한 매끄러운 시공간으로 변하는데, 바로 이렇게 기존의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것으로 변모시키는 사건이 곧 혁명이기도 하다. 사랑이 가진 근원적인 정치적 힘은 여기서 나온다.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시간, 공간, 그리고 주체가 사랑 속에서 탄생한다. 사랑을 통해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문의 원수마저도 품을 수 있고, 사랑을 통해 모헤이는 자신의 출세길을 마다할 수도 있으며, 사랑을 통해 레이디 채털리는 자신이 얼마나 억압당해 왔는지를 깨닫고 새출발을 결심할 수 있다.


혁명적 에너지로서의 사랑

사랑은 시장과 자본의 법칙을 가볍게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더욱 혁명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 주면서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거래규칙 아래서 움직이는 시장과 축적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흡수하고 착취하는 자본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된다. 시장과 자본이 ‘이익’을 위해서만 오로지 존재한다면, 사랑은 이익을 모르기 때문에만 오로지 그 이름에 값한다. 이러한 사랑의 힘은 공감능력에서 나온다. 타자와 하나가 되려 하는 사랑의 속성은 타자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타자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느끼게 만든다. 이 ‘공감’의 힘으로 인해 거래는 선물로, 축적은 베품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공감의 능력을 인류전체로 확산함으로써 사랑을 통해 구원이 가능함을 설파한 이가 예수다. 이런 점에서,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공유할 줄 아는 연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다. 작은 예수들이 세상에 가득 찬다면, 즉 세상 사람들이 사랑의 혁명적 가능성을 제 것으로 실천할 수 있다면, 그 즉시 세상은 천국이 될 것이다. 예수가 예배당 앞의 시장판을 뒤엎었던 행동은 그래서 사랑이 가진 반자본주의적 속성을 드러내는 사례이기도 하다.

  사랑이 가진 이 혁명적 에너지야말로 모든 것이 경쟁과 소비와 축적을 향해 치닫는 자본주의의 무차별 폭격 속에서 사는 우리 각자가 가진 어쩌면 유일한 방공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의 사건은 단순히 선언한다고 해서 가능하지 않으며, 사랑의 힘은 통속적으로 노래한다고 해서 강해지지 않는다. 사랑은 타자와 공동체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과 실천과 실패 속에서만 배양되는 주체의 면역력이다. 당연히 나 하나의 사랑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나 하나가 사랑의 위대한 힘을 경험하지 못하면, 세상이 바뀐다한들 아무 의미가 없다. 일상의 틈을 비집고 다가오는 사랑에 빠지자. 바로 거기서부터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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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입니다.
    저의 블로그로 모셔놓으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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