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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09월
  • 2010.09.01
  • 822

조지 오웰식의 정의를 읽는다

테레사 자유기고가

놀라운 일이다. 벌써 50만 부를 돌파했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저자인 마이클 샌덜도 놀랐다고 한다. 바야흐로 ‘정의’의 시대인가? 아니면 마치 지난 10년 간 진보니 개혁이라는 말이 그랬듯이 이것 역시 ‘트렌드’에 불과한 것인가. 마케팅의 위력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쏟아지는 한국인의 관심이 지금 현실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회적 분위기 “atmosphere”는 늘 당시에는 우리 의식을 압도하는 무언가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 그래, 그때는 그랬었지…’, ‘아니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식이다. 반성과 성찰은 뒤에 온다.

  폴란드에서 유대인 집단 학살을 수행한 101예비경찰대대의 구성원들은 모두 하층 계급 노동자 출신의 중년 남성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들은 대부분 군 복무 경험조차 없었고 나치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사회 계급 출신이었으나 몇 차례의 학살을 수행하면서 학살 임무에 익숙해졌고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역시 평범한 이웃이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한나(『책읽어주는 남자』)도 개인적 비밀을 감추고 있긴 하였으나 평범한 노동자였다. 80년 봄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도록 명령한 전직 대통령도 좋은 이웃이었고 의리 있는 상사였으며 자상한 아버지였다.

  “내가 독일에서 태어났다면 나 역시 나치당원이 되어 유대인과 집시와 폴란인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고, 눈더미 밖으로 장화만 삐죽 나온 시체들을 내버려두고 나 자신은 따뜻한 방에서 고결한 배를 두드렸을 것이다.”(『마더나이트』12p, 문학동네) 커트 보네거트의 이 말은 마치 평범한 사람인 나에 대한 경고로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임의적 유전자 결합과 환경의 산물인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라는 종족, 인간을 구별 지을 수 있을까? 상황에 따라 예측하기 어려운 다중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우리의 자아는 본질적인 어떤 것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을까? 선에 대한 의지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우리를 다른 무리들과 구별 지어 주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마음은 “자연선택이 우리 조상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식량을 채집하는 과정에서 특히 사물, 동물 식물,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정복하는 과정에서 직면했던 문제들을 해결해 주기 위해 설계한 기관들의 연산 체계”라는 스티브 핑거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인다.

  “정의”가 마치 유행어가 되어 버린 시대에 조지 오웰을 들춘다. 자유의지가 과연 우리의 본성인가 하는 의문에 내게는 그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지 오웰은, 먼저 『1984년』과 『동물농장』의 저자로 나에게 왔다. 그건 좀 오래된 이야기라,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듯하다. 아마 고등학교 논술 과제로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너무 많이 회자되어 마치 읽은 듯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별로 감동받은 기억은 없는 것을 보니 그런 게 분명하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그래서 최초로 읽은 조지 오웰의 책이라고 할 만하다. 나의 책읽기 이력으로는 드물게도 르포르타주다. <한겨레21>의 노동OTL 시리즈를 다소 감상적으로 읽었던 탓도 있겠다. 마음은 늘 생각의 기원을 좇는다고 하는데, 같은 지호에 실린 이 책 광고는 그래서 절묘하다. 르포르타주란 쉽게 말해서 심층 취재를 바탕으로 쓴 글이란 뜻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느 자의식 강하고 진실한 사회주의자가, 노동자의 적나라한 생활을 실제 취재를 바탕으로 담담하게 기록한 글 정도 되겠다.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고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저 아래 누가 석탄을 캐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 있는 줄 들어본 적 없이도 잘만 살아가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곳 얘기는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47p)

  바로 이 세상의 반쪽에 대한 묘사가 이 책이다.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약 두 달여간에 걸쳐 면밀히 조사한 결과보고서가 바로 이 책이다. 짐작했겠지만 우리 문명의 기반을 지탱하는 세상의 반쪽은 형편없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갱도에서 하루 7시간 넘게 일하더라도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의 임금, 화장실도 욕실도 없는 열악한 주거환경, 사회적 냉대가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의 전부이니 말이다.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오웰은, 말로만 이것을 주장하려 들지는 않는다. 실제로 실직한 광부와 그 아내가 2년 5개월 된 아이와 10개월 된 아이와 함께 한 주에 쓰는 생활비 목록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집세 9실링 반페니, 석탄 2실링, 밀가루 3실링 4페니, 마가린 10페니, 베이컨 1실링 2페니 등등.

  이는 “일거리가 꾸준하고 벌이가 괜찮다면 ‘배운’사람보다는 행복할 가능성이 많다고 감히 말하겠다”고 한 오웰을 낙담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웰은 “노동계급의 가정에서는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따스하고 건전하고 인간적인 공기가 있다”(157p)고 쓴다.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는다면, 위선적인 중산층이나 부르주아보다 더 인간적이고 행복하다고 본 것이다.

  스스로를 하급상류중산층이라고 여겼던 오웰이 이 책의 주인공인 노동자계급에 경도되었던 것은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20대에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에서 제국경찰로 복무했던 적이 있다. 이 과거 이력에 대한 속죄와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환멸 그리고 나아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지식인 계급에 대한 실망은 이 책의 2부에 언급되기도 한다.

  이 책이 내게 소중하다면, 그건 내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작가의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그는 노동하는 인간의 소중함을 알고 그들이 그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받기를 원한다. 그는 자신의 기반이 무엇인지 자각한 인간이며, 실은 부르주아식으로 살고 싶어 하면서도 겉으로 그들을 경멸하는 척하는 위선을 떨지는 않는다. 예컨대 “스물다섯 살 때는 열렬한 사회주의이던 중산층 사람이 서른다섯 살 때는 거만한 보수주의자가 되는 한심한 현상”(227p)과는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생활』은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에서 막 돌아온 오웰이 파리의 빈민가에서 여관 생활을 하면서 목격한 밑바닥 사람들의 삶을 담담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돈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끼니를 굶고 물건들을 전당잡히고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오웰은 호텔 커피숍에서의 접시 닦기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린 체험과 이후 런던에 돌아와 역시 싸구려 간이숙박소와 부랑자 생활을 겪는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 최하층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전달하고 이 사회 밑바닥의 사람들도 실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듯 폭력적이고 기생충 같은 존재가 아니라 가난을 죄악시하고 일하기를 원하는 영국국민의 한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글에서 체험한 대로라면 부랑인이나 노숙인이 생각하기를 멈춘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늘 하루 어디서 무얼 어떻게 자고 먹고 담배필 수 있나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실직자가 기력이 없다고 하여 놀랄 일도 아니다. 요컨대 그들의 삶이 되어 보지 않고서 멋대로 소위 일반인의 상식의 프레임으로 밑바닥 삶들을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들이 겪고 있는 삶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이들이 의지가 없어서도 아니고 원래 천성이 게으르다거나 부랑아 기질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개선의 주체는 당사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들이 생각할 여유도 습관도 없다면, 사회의 불합리와 싸우거나 적어도 개선하는 일은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자기 문제라는 인식이 전제되지 않을 때 선뜻 부정의 또는 불합리와 맞서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 책이 이런 문제의식으로 쓰인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위건부두로 가는 길』과 함께 읽는다면 그 해답을 엿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함께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상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자유다. 허나 이런 이상은 거의 완전히 잊혀버려 ‘바탕’이란 말을 쑬 수도 없는 지경이다. 이 이상은 이론 일변도의 독선과 파벌 다툼과 설익은 ‘진보주의’에 층층이 묻혀 버렸다…(정의와 자유) 이 두 마디야말로 온 세계에 울려 퍼져야 하는 나팔소리이다.”(『위건부두로 가는 길』,290p)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일치를 꾀했던 사람, 끊임없이 성찰하고자 했던 자의식 강한 사람, 무엇보다 인간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지녔던 사람이었던 조지 오웰은 『위건부두로 가는 길』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 준 후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러 떠난다.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인 정의와 자유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였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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