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2월 2010-02-01   1657

문강의 문화강좌_아버지의 이름을 넘어



아버지의 이름을 넘어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아버지’라는 이름만큼 우리의 애증을 자극하는 것이 또 있을까. 그것은 오랫동안 남성의 자격을 갖지 못한 이들에 대한 지독한 억압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서구에서는 6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대략 80년대 이후, ‘가부장제’에 대한 페미니즘의 비판과 공격은 ‘아버지’의 권위가 가진 억압의 측면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정신분석에서 ‘아버지’는 자식에게 어머니와의 동일시를 끊게 만드는 공포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머니의 품에 있던 자식이 사회의 법과 규칙을 수용하여 혼자 설 수 있게 만드는 이름이다. ‘아버지의 법’이라는 정신분석의 표현은 어머니 품 속의 ‘아이’가 ‘주체’가 되기 위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적 관습과 규칙을 가리킨다. 유교사상에서 ‘아버지’는 임금과 스승의 자리와 동격이기도 하다. 국가國家라는 말이 가정의 확장인 것과 마찬가지로, 가정의 기둥인 아버지가 확장된 존재가 임금이고, 이 모든 것을 회초리로 가르치는 이가 스승이다. 자명고를 찢어 국가를 배신하자 결국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는 낙랑공주 이야기는 아버지와 국가가 동일시되는 구조를 잘 보여준다. ‘아버지’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에서 신은 인간을 만들어낸 아버지였고, 자신과 동일자인 외아들 예수를 내려보내 대신 죽게 함으로써 자식들의 죄를 사랑으로 용서한다. 오늘도 기독교인들은 두 손을 모으고 ‘아버지!’를 부르면서 기도를 올린다.

이처럼 ‘아버지’라는 기표가 공히 포괄하고 있는 것은 가정(페미니즘), 사회(정신분석), 국가(유교), 신앙(기독교)의 수장으로서의 ‘권위’다. 모든 자식들은 이 ‘아버지’의 이름을 어떤 식으로든 안고 가야 하는 숙명 속에서 산다. 자신을 세상에 있게 만든 이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길을 결정하고, 억압하고, 결국 ‘또 다른 아버지’가 되게 만드는 이에 대한 증오를 품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식에게 살해되어야만 하는 존재


오늘 우리의 대중문화에서도 자식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겪어내는 과정들은 언제나 주된 주제가 된다.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가부장 순재는 무능한 사위 보석을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이름이고, 친딸 현경에게는 어머니를 죽게 한 트라우마의 시원始原으로서 양가감정의 대상이다. 이들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이 이 시트콤의 한 축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맥 맥카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더 로드>는 반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면서까지 아들을 살아남게 하려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는 종말 이후의 세상길을 걸어가는 동료이자 보호자로서, 어린 아들에게 끝까지 ‘좋고 나쁨’이라는 가치의 문제를 잊게 하지 않는다. 인디밴드 ‘눈뜨고 코베인’의 앨범 <The Tales>에서 묘사되는 아버지는 가문의 핏줄을 잇기 위해 납골묘를 만들려는 아버지, 어머니만 남기고 영국에 출장 간 아버지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 납골묘 아래에 내가 먼저 들어갈건데요’라고 말하고, 아버지가 출장 간 게 아니라 ‘벽장 속에’ 살아남아 끝내 자신을 억압하고 있음을 노래한다.

‘아버지’는 이처럼 권위와 보호, 억압의 기표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식으로부터 살해되어야만 하는 존재다. 문명비평가로서의 프로이트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야말로 인류 문명을 건설하게 만든 힘이었다고 쓰고 있기도 하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아버지를 공모하여 죽이고, 그 죽음을 추모하는 과정에서 종교가 생겼고, ‘억압하는 아버지’가 재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적 약속’이 생겨남으로써 원초적 인간들은 문명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굳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따르지 않더라도, 가정과 사회, 국가의 권위를 표상하는 ‘아버지’를 넘어서지 않으면 절대로 자식은 홀로 설 수 없다. 1968년 혁명의 주된 타도대상이 ‘아버지’였다는 것은 이 점에서 중요하다. 서구의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옥죄었던 가정, 대학, 자본주의, 국가를 때려 부수기 위해 투쟁했는데, 그것은 결국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일과 다르지 않다. 그 시도가 없었다면 현재 서구의 탈권위적인 문화적 환경은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야만 가부장제를 넘어설 수 있고, 교수의 말을 어기고 총장실을 점거할 수 있어야만 대학의 권위주의와 싸울 수 있고, 사장 앞에서 붉은 띠를 매고 일손을 놓아야만 자본주의의 포악함과 대항할 수 있으며, 대통령과 정부를 대놓고 거부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곧 ‘아버지’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고, 그 이름을 넘어섬으로써 자식들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기만적인 아버지들의 눈물


‘아버지’는 애증愛憎의 대상이지만, 진정 새로운 것은 ‘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변증법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사회가 보수화 될수록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기형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당연하다. <일요일 일요일밤에>의 ‘우리 아버지’라는 코너는 대표적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아버지들의 눈물은 토크쇼에서 넘쳐나는 연예인들의 눈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연예인들의 눈물보다 훨씬 이데올로기적이다. 그것은 요즘 ‘서민 행보’를 할 때마다 카메라 앞에서 흘리는 이명박의 눈물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와 흡사하다. 우리 아버지들의 눈물과 이명박의 눈물은 비교하기도 민망한 것이지만, 그렇다 해도 가정과 국가에서 각각 ‘아버지’로 표상되는 이들의 미디어 속 눈물은 모두 현재의 위기와 불안, 위험을 눈물이라는 감성적 장치로 넘어서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같다. 현실의 정치적 모순과 문제들을 ‘휴머니즘’으로 살짝 포장하는 것만큼 기만적인 것은 없다. 진실은 언제나 바깥에 있다. 아버지의 눈물에 통닭과 냉장고 따위를 건네는 일 말고 그 눈물을 빚어낸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의 확대와 복지의 축소를 비판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명박의 눈물이 아니라 없는 눈물을 짜내 자신의 신자유주의적 폭력통치를 가려야만 하는 그의 절박함이 중요한 것이다. ‘아버지’의 눈물을 지속적으로 노출하는 미디어의 보수적 ‘아버지 사랑’에서 벗어나 ‘아버지’를 진정 넘어서려 시도해야 한다.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우리 아버지”라고 앵무새처럼 말하는 자식들에게서는 창조를 기대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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