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1년 05월 2021-05-01   641

[떠나자]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여행 – 태국 펫차부리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여행

태국 펫차부리

 

월간참여사회 2021년 5월호 (통권 285호)

 

히말라야 트레킹 중 만난 그이는 자신의 본명을 선뜻 알려주지 않았다. 나중에 ‘뽐 뭐라뭐라’ 알려주었지만 도무지 외울 수 없는 이름이었다. 멋쩍어서 머리를 긁적였더니 자기도 ‘끄룽텝 마하나콘 블라블라….’ 하는 도시의 이름을 외우지 못해 그냥 ‘방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름을 외우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돈므앙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이에게 제일 먼저 연락했다.

 

밝혀 두자면 나에게 태국은 ‘뽐’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그전까지는 태국 하면, 카오산 로드의 대혼돈, 수상 버스에서 느꼈던 차오프라야 강, 마사지숍의 어두컴컴한 조명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뽐을 만난 이후 달라졌다. 뽐과 그 친구들과 함께한 ‘엉망진창’ 태국 여행에서 나는 진짜 태국을 만날 수 있었다. 

 

태국 현지인이 준비한 서프라이즈 여행? 

뽐은 자신과 함께 특별한 곳을 여행하자고 했다. 차를 타고 3시간쯤 가면 멋진 산이 있다며, 방콕 사람들도 잘 모르는 장소라고 덧붙였다. “너를 위한 서프라이즈 여행이니 목적지는 나중에 알려줄게. 함께 갈 친구들과 다 준비해 갈 테니 너는 가벼운 긴소매 윗도리만 챙겨오면 돼!”

 

어딘가 미덥지 못한 여행의 시작이었지만, 현지인인 그가 모든 걸 커버해주리라 믿고 따라나섰다. 태국 고속도로를 처음 달려 봤다. 방콕 시내를 벗어나니 왼쪽에는 염전, 오른쪽은 대체로 논과 밭이었다. 외곽으로 빠진 게 분명한데 아무리 둘러봐도 뽐이 말한 ‘산’은 보이지 않았다. 

 

목적지를 궁금해하는 나의 눈빛을 읽었을 법도 한데 그의 친구들도 도무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저 신이 나서 하하호호. 뽐과 내가 가끔씩 나누는 영어 대화 말고는 전부 알아들을 수 없는 태국어. 그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나 역시 ‘태국 친구들은 이런 식인가 보지. 목적지 따위야!’ 하며 더는 알려고 들지 않았다. 저 멀리 드디어 산이 보이기 시작할 때 즈음 뽐이 내게 말했다. 

 

“숙소에 도착하기 전에 호수에서 멋진 일몰을 볼 거야. 사진 찍는 사람들한테 소문난 뷰포인트라고! 기대해도 좋아. 그리고 저녁 식사는 수키인데 진짜 태국의 맛을 보여줄게. 기대하라고! 참, 제일 중요한 일정은 내일 새벽 산 정상에서 운무를 보는 거야. 꽤 높은 곳이지만 차를 타고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 편하겠지? 태국 사람들 사이에서 평생 꼭 한 번 봐야 하는 일출 포인트로 소문난 곳이야. 기대해도 좋아. 말하고 나니까 내가 더 신나네! 하하하.”

 

그러나 우리가 호수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가 산머리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기대하라던 일몰을 볼 수 없게 됐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뽐과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어두운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묵는 숙소는 낚시터 방갈로가 생각나는 그런 캠프장이었다. 하늘에 별이 참 많았는데 숙소 내부에 조명시설이 없어 손전등을 비추면서 늦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이들이 준비해 온 도구라며 꺼낸 냄비와 수저는 어쩐지 출발 전에 급하게 챙겨온 거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릇이 부족해서 심각한 사람은 나뿐이었고, 그들은 부족한 도구는 웃음으로 채우면 된다는 듯 또다시 깔깔댔다. 능숙하진 않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어준 수키는 약속대로 훌륭한 맛이었다. 중간에 라면 수프 같은 걸 집어넣는 것을 보았지만 그냥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 

다음날 새벽,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픽업트럭이 숙소 앞에 도착해있었다. 산길이 험해서 산악 전문 차량을 예약했다고 했는데 뭔가 잘못됐는지 친구들과 운전기사는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엔 실랑이를 벌이는 듯하더니 나중에는 ‘하하호호’로 끝났다. 아마도 “사람은 다섯인데 좌석은 두 자리뿐이네요. 뭐. 셋은 짐칸에 타면 되죠.” 같은 말을 나눈 듯했다. 계획보다 1시간가량 지체된 탓에 우리는 서둘러 움직였다. 그런데 픽업트럭 짐칸에서 맞는 새벽 공기는 너무 차가웠고 절대 ‘가벼운 긴소매 윗도리’로는 막을 수 없는 추위였다. 처음 뽐을 만났던 히말라야의 새벽이 생각날 정도였으니까. 이 여행에서 유일하게 웃음이 없던 시간이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동안 저 멀리 동이 트고 있었다. 분명 일출을 보러 간다고 했는데…? 결국 8시가 다 되어서 정상에 도착했다. 뽐의 말처럼, 산 정상 발밑에 펼쳐진 운무는 장관이었다. 구름 속에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봤다면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이 됐을 텐데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우리의 태국 친구들은 일출 따위에 상관하지 않고, 또 웃고 떠들고 사진 찍고 놀기 바빴다. 

 

내 눈에 비친 태국 사람들은 미련이란 감정이 결여된 채 태어난 사람들 같아 보였다. 여행 계획이 틀어져도 ‘지금 이 순간이 즐거우면 됐지!’ 혹은 ‘친구들과 함께하면 충분한 거 아닌가?’ 하는 식이랄까. 결국 계획했던 어떤 목적도 이루지 못했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아 여러모로 헛웃음이 나오는 여행.

 

그나저나 우리가 다녀온 곳이 어디인지 물을 때마다 뽐은 그저 ‘마운틴’이라고만 알려줬다. 아마도 일행 중 운전했던 친구를 빼고는 모두가 몰랐던 거 같다. 그렇다면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수밖에. 정상에서 만난 다른 일행과 페북 친구를 맺은 덕분에 나는 그의 피드에서 그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콕에서 남서쪽으로 160km 떨어진 펫차부리 주 어딘가였고, 운무 사이로 일출을 보려고 했던 곳은 미얀마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카엥 크라찬 국립공원Kaeng Krachan National Park이었다. 

 

➊ 태국식 샤브샤브

➋ 구름과 안개를 아울러 이르는 말

 


글·사진. 김은덕, 백종민

한시도 떨어질 줄 모르는 좋은 친구이자 함께 글 쓰며 사는 부부 작가이다. ‘한 달에 한 도시’씩 천천히 지구를 둘러보며, 서울에서 소비하지 않고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실험하고 있다. 마흔 번의 한달살기 후 그 노하우를 담은 책 『여행 말고 한달살기』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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