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2000-02-24   524

[제47호 쓴소리] 뜻밖이었습니다.

대통령님,

지난 2월 19일 전국 40여개 도시에서는 총선연대가 주관하는 집회가 열렸습니다. 거기서 시민들은 부패무능인사에 대한 공천을 철회하라고 외쳤습니다. '바꿔 바꿔', 군중의 외침이 열기를 더해 가는 집회행렬을 따라가면서 이 함성이 전국 모든 도시에서 함께 울려퍼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총선연대의 낙천 낙선운동은 지금까지 냉소에 빠져있던 이 나라 유권자들의 마음 한 구석에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돋아나게 했습니다. 이 운동에 참여했던 한 사람의 실무자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저는 한편으로는 답답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여야 3당의 공천결과는 때문입니다. 결국 중이 제머리를 못깍는 이치가 여기서도 입증된 것인가요?

여야 각당은 총선연대의 공천반대자 명단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자 저마다 투명하고 민주적 공천을 통해 대폭 물갈이를 하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진짜 퇴출시켜야 할 사람들은 제대로 손도 안대고 평소 밉게 보인 인물들을 탈락시키는데만 교묘히 활용했음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치인들은 과연 정치인들이더군요. 국민이 정치개혁을 하라고 외치니까, "그래 생각해볼께" 해놓고선 그걸 교묘히 보스정치를 공고히 하는데 사용하다니… 이런 탁월한 능력을 가졌으니 국민들이 그렇게 혐오하는데도 아직도 금배지를 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대통령님,

그러나 저를 가장 답답하게 만든 것은 새천년민주당의 공천결과였습니다. 대통령님이 새해 들어 하신 말씀들을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정당하며 국민의 정치개혁운동이 필연적인 역사적 운동임을 역설하셨었지요. 그런 말씀을 어찌나 강력하게 자주 말씀하셨던지 야당, 심지어 공동여당인 자민련까지도 음모론이니 유착설이니 하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펼치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저희들은 총선연대의 중립성을 입증하느라 아주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새천년민주당의 공천결과는 대통령의 적극적 지지와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텃밭인 호남은 30%도 바꾸지 않으셨더군요. 총선연대의 공천반대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었고 지역 시민단체들도 강력하게 반대한 호남의 한 재력가의원도 그대로 공천되었구요. 민주당의 공천결과를 놓고 사람들은 당내 비주류로 알려진 사람들은 탈락된 반면 대다수 중진들은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공천되었다고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공천반대 명단을 아전인수격으로 선택적으로만 사용한 셈입니다.

게다가 민주당의 공천은 대통령이나 창당주체들이 공언한 것처럼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른바 가신 그룹들이 구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언론보도도 있구요. 따라서 저로서는 이번 공천이 대통령이 의중이 반영된 공천이거나 적어도 대통령이 가신그룹의 전횡을 제대로 막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과만 놓고 보면 대통령님의 이제까지 발언이 총선전략용이며 실제 개혁은 안중에도 없으면서도 총선연대의 개혁적 이미지만 정략적으로 활용하려고 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님,

대통령께서는 스스로 이번 총선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4.19, 5.18에 비유될만큼 역사적 정당성을 갖는 국민운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치개혁이 가장 우선해야 할 과제라고도 역설하셨습니다. 대통령이 스스로 하신 이 말씀이 진심이라면 민주당 공천을 다시 해야 합니다. 총재가 직접 공천결과를 뒤바꾸는 것이 민주적 절차에 맞지 않는다면, 적어도 공천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사표현이라도 분명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하신 말씀에 책임지는 자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총선연대는 이미 각 당의 공천이 정당법상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은 밀실정실공천이라 규정하고 공천무효확인소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공천철회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도 시작했습니다. 그 첫단계로 저희 총선연대는 각 당 공천심사위에 공천신청자 명단, 공천심사기준, 공천신청자 여론조사 결과 등을 공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3당 중 어느 당도 아직 이 당연한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상의 예비선거로서, 선거에서 국민참정권이 제대로 발휘되게 하기 위한 첫 관문입니다. 따라서 공천과정은 정당 고유의 권한이 아니라 국민이 참여하고 개입할 수 있는 참정권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국민의 의사가 내용적으로나 절차적으로나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여야 3당의 공천에 대해 유권자들이 그 내용의 공개를 요구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대통령님 ,

민주당 공천을 다시 하십시오. 공천기준과 여론조사 결과를 모두 공개하는 투명한 과정으로 새로운 민주적 공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새천년의 민주주의를 직접 몸으로 보이는 길입니다. 그러한 혁신이 없는 한 새천년민주당은 그 현란한 분칠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보스정치의 낡은 유산일 뿐입니다.

2000년 2월24일

참여연대 시민감시국장 이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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