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2007-06-09   1875

<안국동窓> 6월의 광장, 열림과 닫힘

다시 “모두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올 해로 ‘6월 항쟁’ 스무돌을 맞는다. 정부는 항쟁 스무돌을 맞아 6월 10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다. 매우 당연하고, 또 잘 한 일이다. 곳곳에서 기념사업이 추진되고 있고, 학술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6월 민주항쟁 20주년 사업 추진 위원회’가 추진하는 ‘6월 시민 축제의 광장’ 프로그램이 참 좋아 보인다. 남도의 해남 땅끝마을과 제주, 마산에서, 통일의 염원을 안은 임진각까지 걷고 뛰고 달려서, ‘대한민국 하나로 잇기’ 국민대행진 대회를 연다고 한다. 6월 9일에는 시민축제와 함께 ‘고 이한열 열사 20주기 추모제’도 열렸다

대한민국 구체제의 억압의 그늘이 짙었던 만큼이나, 그 후발 민주화 시민혁명의 빛 또한 찬란하고 눈부신 것이었다. 거의 모든 반독재 민주세력이 이 혁명에 참여하고 연대했다. ‘국본’으로 약칭되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전 국민적 항쟁을 주도했는데, 이 국본이 주도한 ‘6. 10 대회’를 시작으로 6월 항쟁의 막이 올랐던 것이다. 6월 26일 전국적으로 일어난 평화대행진에 180만 명이 참여하는 등 약 20일에 걸친 항쟁 기간 동안 500만 명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20년 후인 올해 시민축제는 20년 전의 국민대행진, 그날 6월의 광장을 다시 복원해 낼 수 있을까? 아니, 단지 복원을 넘어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시민광장을 열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 민주주의 공동의 광장으로서 6월 항쟁

6월 항쟁의 광장이 열고 높이 세운 시대정신은 민주주의, 즉 민(民)이 참여하고 서로 소통하고 연대해 나라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정신이다. 이 시대정신으로 20년 전 6월 우리는 하나로 이어졌고, 여럿이면서 더불어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억압이 있는 곳이라 해서 반드시 저항과 투쟁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세계사는 억압과 비굴한 굴종이 공생하는 곳이 허다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웃 아시아 나라들만 보더라도 정치적 민주화는 크게 지체돼 있다.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인내와 끈기로 살아 온 대한민국인은 억압과 야만의 그 슬픈 역사만큼이나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억센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가졌다는 데서 큰 자부심을 갖는다.

6월 항쟁은 그 투쟁의 문명력과 참여,소통, 연대의 힘으로 민주주의 시대정신을 대중화하고, 전국민화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마침내 민주화의 시대를 열어 제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 걸음 한 걸음 절차적 ‘공고화’의 길로 나아갔다. 2000년 6월에는 남북한이 ‘대결’에서 ‘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

광장이란 무엇인가. 광장은 열림이다. 그것은 닫혀 있고 막혀 있는 것, 즉 억압의 장벽을 허물어 열어 제치는 것이다. 광장은 홀로에서 서로가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여럿이면서 하나가 되어 참여하고 소통하고 인정하고 연대함으로써 공동의 세계를 세우고 가꾸는 것이다. 광장은 의무와 책임을 넘어서 놀이이자 축제이고 신명이다. 그렇지만 광장은 또한 무엇보다 상처에 대한 애도이다. 광장은 공동의 경험이고, 학습이며, 기억, 즉 역사의 생환이다. 그것은 공동의 삶의 양식이자 문화이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6월 항쟁이란 공동의 광장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97년 체제’가 ’87년 체제’를 제압하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에는 구심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심력도 작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오늘의 우리에게 6월 항쟁은 대한민국 구체제에 항거하고 공동의 세계를 키우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원지이자 수렴점으로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의 발산점이기도 하다. 즉, ‘가진 자, 강한 자의 밀실에 갇힌 당신들의 엘리트 과두제 민주주의인가’ 아니면 ‘다수 민중의 참여와 복지, 사회경제적 삶의 요구를 실현하는 모두의 민주주의, 광장의 민주주의인가’를 둘러싼 투쟁의 발산지이기도 하다.

6월 항쟁은 민주화 최대연합의 봉우리를 높이 쌓아 올렸던 만큼이나 그 반대로 가는 내리막길 또한 대단했다. 이는 ’87년 혁명’의 큰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역설을 밝히고 여기서 교훈을 얻어, ‘모두를 위한 광장의 민주주의’라는 새 길을 찾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6월 항쟁의 정신을 오늘 여기서 되살리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가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라 하겠다.

선거 민주주의로 국민들은 직접 대통령을 뽑는 기본적 권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6. 29 선언 과 연이은 12.16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개발독재 세력이 ‘절반의 승리’를 획득하는 불행한 결과가 났다. 혁명의 성과는 유실됐다. 보수적 민주화의 성과는 이어 세 차례 집권에 성공한 ‘중도 자유주의’ 권력의 수중에 넘어 갔다.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른바 ‘공고화’의 길로 들어서고 남북 화해의 시대까지 도래했지만, 1997년 이래 신자유주의 보수혁명이 탈냉전 대한-민주 공화국의 앞길에 재갈을 물렸다. ’97년 체제’가 ’87년 체제’를 제압했다. 이제 다시 자유주의 세력이 주도하고 보수 세력이 연대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제2차 시장 보수혁명의 격랑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IMF 체제를 극복했다는 ‘신화’를 극복해야

오늘날 대한민국 6월의 풍경은 20년 전 그날의 6월과 판이하게 다르다. 당시는 민주주의가 상승하는 희망의 언어였으나, 지금 민주주의는 냉소의 대상으로 추락 중이다. 많은 국민들은 신자유주의 선진화를 내세우는 보수 세력의 능력에 기대를 걸고 있다.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의 성격도, 주체의 구성도 크게 변화됐다. “우리는 87년 이래 민주화가 가져온 공간 속에서 상당히 즐겁게 살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과 아주 다르다.

오늘날 우리는 기념하고자 하는 것은 1987년 6월 항쟁이지 결코 6.29 선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12.16 대통령 선거를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한국 사회에서 저항적 자유주의 세력의 수장으로 통했던 YS, DJ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권력에 눈이 어두워 분열됐던 사실, 그 분열에 민주화 세력 전체가 끌려들어 갔던 사실, 이것이 6월 항쟁의 활화산에 찬물을 끼얹고 ‘운동으로서 민주주의’를 ‘제도로서의 민주주의’와 단절시켰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6월 항쟁이 곧 이어 일어났단 7~8월 노동자 대투쟁과 단절됐던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한다. 1987년에서 1997년에 이르는 민주화 10년이 YS의 무분별한 세계화 노선으로 인해 ‘외환위기’로 귀결됐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97년 IMF(국제통화기금) 체제 아래,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로, 그리하여 절차적 민주주의 공고화와 신자유주의 보수 혁명이 중첩되었으며, 나아가 전자가 후자를 정당화하는 ‘외피’ 역할을 수행했던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의 ‘두 국민’ 분열 상황, 즉 ‘두 개의 대한민국’의 원점은 1997년 IMF 체제다. 따라서 IMF 체제를 극복했다는 신화를 극복해야 한다.

세계화 시대 6월의 광장은 ‘진보의 진보’ 기다린다

6월 항쟁을 기념하는 일이 단지 20년 전 과거 ‘여럿이면서 함께 하나가 되었던 그날’을 기념하는 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 다가올 새 6월’의 미래를 구상하고 이에 대한 희망을 키우는 일로 승화돼야 한다.

무엇보다도 절차적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함께 이를 지속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도 실질적,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 민주주의는 삶의 양식으로서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 생태 민주주의로 보다 넓고 보다 깊게 심화돼야 한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는 그 자랑스러운 역사적 저항의 문명화 힘을 잃지 말되, 구성과 대안의 민주주의로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운동은 제도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제도는 운동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1953년 반공보수주의 체제로까지 소급되는 보수 독과점의 한국 정당 정치에서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대안과 구성의 민주주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제도는 운동과 광장으로서 민주주의 저수지로부터 부단히 그 힘을 길러 와야 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문제는 단지 제도와 운동의 경합 또는 보완에만 있지 않다. 대안과 구성으로 가는 우리들의 민주주의의 새 길은 공공성에 대한 국민들의 근본적인 발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우리 역사와 함께 뿌리 깊은 공(公)에 대한 불신을 청산해야 한다. 공을 ‘위로부터의 시혜’로 간주하는 국가주의적, 관료독점적 공의 관념을 넘어서야 한다. 모두 함께 공을 키우고 가꿈으로써 공과 사가 상생할 수 있는 활공개사(活公開私), 활사개공(活私開公)의 민주 공화국의 정신을 활성화해야 한다. 이 공공의 시민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가진 자와 특권층에 대항하고 공화국의 번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공평한 ‘무기’를 쥐어줘야 한다. 그렇게 해서, 갈등이 공멸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나라로 가는 발전의 활력이 되게 해야 한다.

가진 자의 밀실에 갇힌 당신들의 ‘두 개의 대한민국’을 넘어서, 다수 민중의 참여 연대와 삶의 요구를 실현하는 모두의 민주주의, 공공의 광장의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 세계화 시대, 새로운 6월의 광장은 새로운 진보의 진보를 기다리고 있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 참여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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