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칼럼(pd) 2006-09-11   663

<안국동窓> 9.11 사건 5주년과 부시의 실패

그때 나는 철학자 최종덕 선생과 원주의 상지대학교 부근 투다리에서 꼬치 안주를 놓고 청주 대포를 한잔 하고 있었다. 아내가 전화를 했다. 그런데 많이 놀란 목소리로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방금 무너졌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혹시 잘못 들었는가 싶어서 다시 물어봤다. 뭐라고?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졌어. 나는 놀라서 전화를 한 손으로 가리고 최종덕 선생께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주인에게 라디오를 틀어달라고 청했다. 라디오에서는 긴급뉴스라며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비행기 공격으로 무너졌다는 소식을 황망하게 전하고 있었다.

작년 8월에 8년만에 미국을 방문했다. 워싱턴으로 가서 필라델피아와 뉴욕을 거쳐 보스턴에서 들어오도록 일정을 잡았다. 그러나 뉴욕에 머물고 있을 때 집안에 큰 일이 생겨서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서둘러 들어와야 했다. 원래 일정으로는 그 다음날 ‘그라운드 제로’를 가 보려고 했다. 그라운드 제로는 바로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곳을 가리킨다. 세계무역센터는 아무 곳에나 들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무역센터를 지정하는 세계기구가 있어서 그곳에서 세계무역센터가 들어설 수 있는 곳을 지정한다. 그런 전세계의 세계무역센터들 중에서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는 세계무역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또한 그곳은 뉴욕의 상징이자 미국의 상징이었다. 그런 곳이 무너져서 ‘영점 지대’가 된 것이다.

1995년 2월에 처음으로 뉴욕을 찾았을 때, 밤에 친구와 뉴저지로 가는 배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 옆으로 지나가며 보던 세계무역센터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수많은 불빛으로 휘황하게 빛나는 그 거대한 쌍둥이 건물을 보면서 나는 현대 문명의 힘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나는 현대 문명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어마어마한 불빛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에디슨이 처음으로 전구를 밝혔던 곳이 바로 뉴욕이다. 그는 맨홀을 이용해서 지하로 전깃줄을 설치했는데, 지나가던 마차의 말이 감전되어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그 맨홀은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다. 뉴욕은 현대 문명의 상징이다.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는 현대 문명의 위험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잘 알다시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는 빈 라덴이 이끌고 있는 아랍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아 무너졌다. 미국은 이 공격을 극악무도한 짓으로 규정하고 있다. ‘윤리의 정치학’을 대대적으로 작동해서 빈 라덴 등의 아랍 저항세력을 우선 윤리적으로 제압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극악무도한 것은 미국의 중동정책이나 세계전략인지 모른다. 미국은 빈 라덴을 잡겠다며 중동에서 난리를 치더니, 괜히 이라크만 그야말로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다. 미군은 수만명의 이라크인들을 살해하고, 이라크 전역을 대대적으로 파괴했다. 올 여름에 이스라엘은 아름다운 레바논을 침공해서 수천명의 사람들을 악랄하게 죽이고, 수십만명의 사람들을 졸지에 피난민으로 만들었다. 잘 알다시피 그 배후는 바로 미국이었다.

9ㆍ11사건으로 가장 큰 득을 본 사람은 다름 아닌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다. 그는 멍청하지만 농담은 잘 하는 부자 술꾼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자가 주지사가 되고 대통령이 된 것은 미국의 지배세력이 어떤 자들이며 어떤 식으로 지배구조를 형성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9ㆍ11사건은 세계적으로 악명이 자자한 미국의 맹목적 애국주의를 강력히 촉발했다. 그 결과 부시는 졸지에 멍청한 술꾼에서 강력한 지도자로 성공적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그는 ‘테러와의 전쟁’을 내걸고 강력한 조치들을 잇따라 시행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이고, 국토안보부를 신설하는 등으로 감시정책을 강화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패로 드러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부시가 몰아냈다고 크게 자랑한 탈레반의 권력이 재강화되고 있고, 이라크에서는 부시가 이미 2년여 전에 종전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은 어떤 전쟁에서도 이기지 못했고 부시와 연관이 깊은 군수산업체들만 엄청난 돈을 벌었을 뿐이다. 미국 안에서도 부시가 9ㆍ11사건의 진실을 감추고 있다는 ‘음모론’이 널리 확산된 상태이다. 그 중에는 심지어 부시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빈 라덴의 공격계획을 알고도 방치했다는 충격적 내용까지 있다. 이와 함께 맹목적 애국주의를 선도한 기독교 근본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이나 혐오의 감정도 퍼지고 있다. 잘 알다시피 부시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충실한 신도로서 자신의 무모한 정책을 기독교 근본주의의 방식으로 합리화했다.

9ㆍ11사건은 미국이 너무나 강력한 힘을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빚어졌다. 마찬가지로 부시의 실패도 미국이 가진 너무나 강력한 힘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플래툰 등의 베트남전을 비판한 영화로 유명한 미국의 올리버 스톤 감독은 9ㆍ11사건 5주년을 맞아 이 사건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9ㆍ11사건을 인간적 비극으로 다루고 있는 모양이다.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빈 라덴 일당을 직접 죽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미국인이 맹목적 애국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는 마당에 올리버 스톤은 자신의 성취마저 스스로 짓밟기로 작정한 듯하다. 흥행을 위한 부적절한 발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올리버 스톤의 잘못은 더욱 더 커질 것이다.

9ㆍ11사건에서 우리는 미국이 세계 곳곳에서 연출하고 있는 숱한 인간적 비극을 떠올려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또 다른 9ㆍ11사건을 막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부시의 실패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미국의 패권주의와 이기주의의 실패이다. 그러나 미국의 지배세력은 도무지 각성할 것 같지 않다. 여기에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의 인간적 비극이 자리잡고 있다. 이른바 ‘제국’론자들은 ‘반미운동’을 시대착오적이라며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의 비현실적 주장은 정신병 의사들의 필요성을 보여줄 뿐이다. 미국을 포함한 이 세계의 안전을 위해 미국뿐만 아니라 그것이 대표하는 현대 문명의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고 바로잡기 위한 노력으로서 ‘반미운동’은 절실하다.

미국은 ‘그라운드 제로’에 ‘자유의 탑’이라는 이름의 초고층 건물을 짓고 있다. 그 자유는 ‘인류의 자유’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9ㆍ11사건과 부시의 실패는 되풀이될 것이다. 그 결과 세계는 더욱 더 부자유하고 불행해질 것이다. 미국은 이런 악순환을 해소할 능력뿐만 아니라 의무를 가지고 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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