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칼럼(pd) 2010-08-30   2474

[기고] 마침내 끝난 이라크전, 미군은 무엇을 남겼나




다음 글은 한겨레 21 제 82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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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대량살상무기 때문이라는 거짓말로 시작된 7년의 전쟁,
수많은 난민과 테러와 갈등의 소용돌이를 남겼다
 
미국의 이라크 탈출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라크 주둔 미군은 2010년 8월31일까지 이라크에서 전투병력을 철수할 예정이다. 2002년 3월20일 시작된 이른바 이라크 작전은 7년5개월여 만에 종료된다. 하지만 미국은 5만여 명의 군사훈련 요원과 대테러 특별요원들을 남겨둘 예정이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2011년 말까지 임무를 마치고 철수할 계획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미국은 미-이라크 안보협정을 바탕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큰 미 대사관과 영사관, 경찰 훈련 지원 인력, 전쟁 기업의 용병들을 두고 이라크를 간접 통치할 예정이다.



유엔 사찰단도 못 찾아낸 대량살상무기


미국과 다국적 연합군이 이끈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패권주의와 군사주의를 여과 없이 보여준 반인륜적·비도덕적 전쟁이었다. 그 결과로 미국은 세계에 대한 군사적 패권과 외교적 영향, 그리고 경제적 여력을 모두 잃게 됐다. 하지만 미국 제국주의의 쇠락은 이라크 전쟁이 지닌 하나의 측면에 불과하다. 거짓말에 기초한 패권적 침략전쟁이 이라크와 전세계에 야기한 재앙은 미국의 성쇠와 상관없이, 미군의 철수 여부와 상관없이 세대에 걸쳐 지속될 터다.


이라크 침공과 점령 7년5개월이 남긴 논란거리들, 그리고 이라크와 전세계가 입은 상흔을 중요한 사건들과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통계와 문서들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라크 침공은 9·11 직후 사담 후세인 정권이 테러리스트와 연루돼 있고, 핵무기·생화학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미국 쪽의 일방적인 주장과 더불어 준비돼왔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공공청렴센터(Center for Public Integrity)는 부시 행정부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이라크가 미국에 위협이 된다는 잘못된 입장을 발표한 횟수가 935건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부시 행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예방 전쟁(Preemptive war)은 일종의 정당방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에 대한 유엔 사찰단장인 한스 브릭스는 이라크 전쟁 개전 직전인 2003년 2월14일 유엔 안보리에 사찰 결과를 보고하면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 혹은 그와 연관된 아이템이나 프로그램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유엔 사찰단은 그러한 무기를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완곡하지만 아주 강하게 미국의 주장을 부인한 것이다. 결국 미국은 유엔 안보리로부터 침공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결의를 얻지 못한 채 3월20일 이라크를 침공했다.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2004년 “이라크 전쟁은 유엔헌장에 저촉되는 불법행위”라고 규정했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점령 직후 미군 정보부와 무기 전문가 1천여 명으로 이라크 서베이 그룹(ISG)을 구성해, 이라크 전역을 돌며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의혹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증거를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2004년 7월 발표된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에 관한 국가위원회’ 최종 보고서 역시 “9·11의 주모자로 알려진 알카에다와 사담 후세인의 협조관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 이후 밝혀진 여러 다른 증거자료들은 이라크 침공이 당시 정황에서 위협의 해석을 잘못한 까닭에 발생한 단순한 혹은 이해할 만한 실수(reasonable mistake)가 아닐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의도된 조작의 증거로 제시되는 2개의 대표적 비밀 회의록은 다음과 같다.


거짓말,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조작


다우닝스트리트(Downingstreet) 메모
영국 노동부, 국방부, 정보 관계자들의 2002년 7월23일 비밀 회의록이다. 이 회의에서 이들은 이라크 전쟁 명분을 어떻게 축적할지 논의하면서 당시 미국의 비밀 정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영국 관료들은 미국의 입장에 대해 “(부시 대통령을 만나보니) 군사행동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부시 대통령은 군사행동을 통해 사담을 제거하길 원했는데, 테러와의 연계와 대량살상무기를 근거로 내걸고 싶어했다. 정보와 사실관계는 정책에 꿰맞춰지고 있었다(intelligences and facts were being fixed around the policy). 미 국가안보위원회는 유엔의 절차를 기다리거나 이라크 체제 관련 증거의 공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정리하고 있다. ‘다우닝스트리트 메모’라는 닉네임은 영국 총리 관저가 있는 다우닝스트리트 10번가에서 따온 것이다. 2005년 5월 영국 <더 선데이 타임스>에 폭로됐다.


매닝(Manning) 메모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2003년 1월31일 비밀 회의록. 부시 대통령과 블레어 총리는 유엔 사찰단이 이라크 내부에서 대량살상무기 증거를 발견하든 못하든 이라크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이 메모는 부시 대통령이 거짓으로 전쟁 명분을 꾸며낼 계획을 구체적으로 논의했음을 보여주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메모에 따르면, 계획된 침공에 앞서 아무 증거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에 직면한 부시 미 대통령은 이라크 쪽의 적대행위를 촉발할 몇 가지 방안을 블레어 총리에게 제시했는데, 거기에는 미국 정찰기를 유엔의 비행기처럼 페인트칠해 이라크 쪽의 공격을 유도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매닝 메모’라는 별명은 회의록 작성을 위해 배석한 블레어 총리의 외교보좌관인 데이비드 매닝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2006년 6월 <뉴욕타임스>에 폭로됐다.


이 두 회의록의 폭로는 부시 대통령에 대한 미국 내 탄핵운동의 기폭제가 됐고,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은 2006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대패했다. 민주당은 중간선거에 이어 대선에서도 승리했다.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와 세계를 무장 갈등의 악순환에 깊숙이 연루시켰다. 부시 행정부는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패권적 태도로 동맹국의 침략행위 동참을 압박했다. 그가 주창한 ‘의지의 동맹’은 사실상 맹목적 추종의 동맹이었고, 미국 자신은 물론 전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자기파괴적 담합이었다.


전쟁 초반 미군과 다국적군은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부시 대통령은 전쟁 개시 40여 일이 지난 5월1일 임무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나 승리를 선언한 그날 이후부터 미군은 이라크에서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고 베트남전보다 더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이라크 전쟁이 테러리즘 확산시켜


2003년 3월부터 2010년 9월까지 미국은 약 9천억달러의 전비를 지불했지만 군사적으로 완전히 실패했다. 이는 한화로 약 1천조원이 넘는 천문학적 액수다. 전세계 54개국이 점령에 가담했고 최대 18만 명 이상의 점령군이 주둔했다. 이 밖에도 거의 같은 수에 해당하는 군 지원 인력과 민간 전쟁 기업체 직원들이 점령과 전투를 돕고 있다. 미군은 최대 17만여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했다. 한국은 3400명을 보내 영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한 나라라는 오명을 얻었다. 부도덕한 점령과 군사적 실패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정신적 손상을 가져다주었다. 이라크 파병 미군 장병의 30%가 귀환 3~4개월 안에 심각한 심리질환을 경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7년여의 점령과 저항, 그리고 강요된 내부 갈등 과정에서 이라크는 수세대에 미칠 극단적 파괴와 분열의 상흔을 입었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에 따르면, 2007년 최정점에 달한 이라크 난민 혹은 거주지 이탈자의 수는 총인구 2600만 명의 17.5%에 이르는 약 450만 명으로 집계됐다. 이 수는 현재까지 크게 줄어들지 않고 있다. 2007년 현재 이라크 어린이들의 28%가 만성적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전쟁과 무장 갈등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은 언론에 보도된 수를 집계한 최소치 10만여 명에서 최대 100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라크에 민주주의와 재건을 선사하겠다는 공약은 군사적 목적을 위한 사탕발림임이 점령 과정에서 여실히 확인됐다. 유엔 이라크지원단(UNAMI)은 2006년 7월 보고서를 통해 “이라크 전역에서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고문이 일상화되는 등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장기화되면서 인권유린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고 이라크 정부가 법과 질서의 총체적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2006년 9월 <뉴욕타임스>에 폭로된 미국 ‘국가정보평가(NIE) 보고서’는 이라크전으로 테러 위험이 되레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이 평가 보고서는 이라크 전쟁에 참여한 외국의 이슬람 전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국내 분쟁을 악화시키거나 급진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고 있으며 이에 따라 자원해 활동하는 테러조직이나 급진 단체가 급증했다고 평가하면서 “테러리즘 확산에 대한 더 많은 직접적 책임이 이라크 전쟁에서 비롯”됐다고 인정했다. 국가정보평가 보고서는 미국 내 전체 16개 정보기관이 정보 분석을 종합한 것으로 미 정보기관들이 특정 국가의 안보 상황과 관련해 만드는 문서 중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 국가정보위원회 의장을 지낸 로버트 허친슨 등 전문가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이라크가 차세대 테러분자들을 끌어들이는 자석과 훈련장이 돼버렸다”고 혹평했다.


미군의 비인도적 행위들은 이라크에서 저항과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고 전세계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결정적으로 훼손했다. 2004년 4월28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요커>와 은 미군이 장악하고 있는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벌어진 포로 학대에 관한 보고서와 사진을 공개했다. 이들은 점령 이후 2004년 사건이 폭로되기까지 그같은 고문과 상습이 ‘일상적’으로 자행됐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했다. 당시 이라크 전역에서는 1만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명확한 증거 없이 장기간 구금돼 가혹행위를 당하고 있었다. 미군은 헌병대원인 이반 프레더릭 상사를 비롯한 부사관과 사병 6명을 군법재판에 회부했으나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 국방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 등이 사실상 합법화한 고문에 대한 책임을 교도소 관련 실무자들에게 전가한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과거에 얽매인 오바마 정부


국제인권단체들은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행해진 가학적 행위들이 미 국방부와 법무부, 중앙정보국(CIA) 등이 아프간 전쟁 등 대테러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식화한 ‘법률적 기준’과 이를 위해 고안된 ‘강압적 심문 규정’에 근거한 것이라고 폭로했고, 이는 미국을 전세계 인권 상황 악화의 주범으로 지목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들은 고문을 합법화한 미 행정부 주요 인사들을 전범으로 고발하는 활동에 착수했다. 미국 헌법권리센터(Center for Constitutional Rights)가 주도한 이 고발건은 지금까지 미국과 몇몇 우방국 재판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라크 점령이 몰고 온 패배의 충격과 도덕적 회의는 미국의 리더십을 이라크 전쟁을 반대해온 인권 변호사 출신의 젊은 흑인 초선 상원의원, 오바마에게 맡기게 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는 취임사에서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그는 이라크에서의 전쟁도 완전히 끝내지 못했고, 아프간과 파키스탄에서는 더 심각한 늪에 빠져들고 있다. 오바마는 같은 날 “과거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점점 더 과거에 묶여가고 있다.




숫자로 본 이라크 전쟁

935
거짓말
부시 행정부가 2001년부터 2003년동안 이라크가 미국에 위협이 된다는 잘못된 입장을 발표한 횟수 935건 (the Center for Public Integrity)
 
900,000,000,000 전비
2003년 3월부터 2010년 9월까지 들어간 전비 약 9천억달러
2008년 월평균 전비 120억달러
2009년 월평균 전비 73억달러
2008년 5월 현재 매 초당 지출 5천달러 
2007년 7월 현재 이라크 파견 장병 1인당 1년 유지비 39만달러
 
183,000 파병병력
파병 연합군 수 최대 18만3천명(2005년 11월),
파병 미군 수 최대 17만4천명(2007년 10월),
파병 영국군 수 최대 4만6천명(2003년 3월),
파병 한국군 수 최대 3,600명(2004년),
이라크 다국적군에 파병한 국가 미국 포함 총 54개국
미군을 지원하는 민간계약자 18만명(사병포함, 2007년 8월 현재)



650,000 인명 피해
Iraq Body Count 이라크 보디 카운트 (언론에 보도된 민간인 사망 기준)
9만7,267명-10만6,146명(2010년 8월 현재))
Johns Hopkins school of public health 존스 홉킨스 공공보건대학
(이라크 전국 2000개 가구 방문조사 후 추정)
약 65만명 (2006년 7월까지)
이라크 사망 연합군 4733명 (미군 4415명, 2010년 8월 19일 현재)
이라크 부상 미군 1만3987명(2010년 8월 19일 현재)
이라크 난민(2007년 최정점, UNHCR) 인구의 약 17.5%, 국내 거주지 이탈 238만5,900명,
해외 난민 215만5,600 명 (전쟁 전 총인구 약 2천6백만명)
이라크 파병 미군장병의 30%가 귀환 3-4개월 안에 심각한 심리질환 경험
 
26,000 비인도적 행위
2003년-2006년 최대 2만6천명에 대한 무기한 구금과 가혹행위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고문학대 (2003년-2004년)
팔루자 1-2차 공격(2004년 4월, 11월)
탈 아파르 공격(2005년 9월)
라마디 공격(2005년 10월)
하디타 학살(2005년 11월)
이샤키 학살(2006년 3월)
함다니야 살해(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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