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칼럼(pd) 2005-06-23   1216

<안국동窓> 남북 민간이 놓은 평화의 다리

615공동선언 5주년 기념 평양 민족통일대축전에 다녀와서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평양으로 곧장 날아가지 않았다. 한참을 서쪽으로 날아간 후에야 북으로 기수를 돌렸다. 공해 상을 통해 북으로 올라간다는 거였다. 서해직항로라는 말이 무색하게 하늘에도 휴전선은 있었다.

▲ 월 14-16일 평양에서 6.15 5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이 성대하게 열렸다. 김일성경기장에서 개막식을 갖고 있는 남북해외 대표단과 5면여 평양시민들.

▲ 류경 정주영체육관에서 체육유희경기가 열려 남북해외 대표단과 7천여 평양시민이 한데 어우러졌다.

14일 오전, 평양 순안공항 도착. 하늘은 비를 안은 먹구름으로 흐려져 있었다. 생전 처음 밟아보는 북녘 땅, 가슴이 설렐 법도 하건만 마음속은 구름 낀 하늘처럼 막막하고 무거웠다. 문건 초안 작성 때문에 연 이틀 밤을 샌 탓이었을까? 몸 상태 때문만은 아니었다. 5월 이후 북미 간에 가파르게 이어진 논쟁과 정치군사적 갈등도 묵직하게 머릿속을 짓누르고 있었다. 축전 일주일을 앞두고 북측으로부터 “군산에 미 스텔스 전폭기 편대가 배치된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축전을 치를 수 없으니 남측 민간대표단 수를 615명에서 200명 내외로 축소해 달라”는 갑작스런 전통문이 날아와, 남북간 논란 끝에 300명 선으로 대표단 규모를 합의해야만 했던 ‘소동’도 있었다. 여러모로 간단치 않은 방북행이었다.

“북이 어떻게 나올까?”

나를 비롯한 많은 방북단의 관심사였다. 최근의 긴장국면을 이유로 북이 정치적으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다면 축전은 순탄치 않을 것이고 좋은 평가도 얻기 힘들 것이다. 모처럼 마련된 남북간의 민간-당국 합동교류 공간에서 북이 그간 고조되어온 한반도 주변 정세를 타개할 모종의 보따리를 풀어놓을지도 관심사였다. 고백컨대, 당시 후자의 선택을 할 것으로 예측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은사시나무들이 좌우로 늘어선 대로를 따라 나지막한 구릉들을 지나 평양 시내로 향했다. 평양은 들었던 대로 잘 정비된 계획도시였다. 건물과 조형물들, 숲과 강이 구릉들과 함께 맞춤한 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다만, 간간히 눈에 띄는 새로 페인트를 칠한 고층건물들과 그 건물들 위의 붉은 글씨의 구호들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외장을 하지 않은 온통 회색건물들로 도시전체가 어두워보였다. 평양 시내 한복판에 바벨탑같이 서있는 짓다 만 유경호텔의 거대한 잿빛 삼각형도 구름 낀 하늘과 함께 마음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 6월15일 4.25문화회관 민족통일대회에서 민족통일선언이 발표됐다.

낯선 구호들이 그럭저럭 자연스럽게 느껴질 무렵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차림새에 눈길이 갔다. 평양시민들이 길을 가다가, 혹은 길목 어귀에 삼삼오오 모여 있다가 버스를 행해 손을 흔든다. 우리가 흔드는 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만 간간히 손을 흔드는데, ‘열렬히’ 환영하는 것보다 도리어 마음이 편안했다. 길거리를 뛰어가던 한 무리의 아이들이 버스의 행렬을 호기심어린 눈웃음을 지으며 쳐다본다. “어디가나 아이들이란!” 희미한 미소가 지나갔다.

숙소인 고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낯익은 북측 실무자가 나를 맞았다. 간단한 수인사를 나누고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가 행사에 필요한 남북 측 문건 초안을 주고받았고 문건협의일정을 정했다. 북측이 전달한 북측 연설문안은 몇몇 단어 사용을 제외하고는 ‘우리민족끼리 공조하는 것’을 강조하되 논쟁의 여지를 최소화한, 상대적으로 평이한 문장들이었다. 북이 행사의 원만한 성사에 중점을 두고 있음이 읽혀지는 것이어서 일단 안심이 되었다.

오후 소년문화궁전을 참관할 때 오락가락하던 빗발이 개막식 장소인 김일성 경기장으로 향하는 시가행진이 시작될 저녁 무렵에는 본격적으로 퍼붓기 시작했다. 행진과정에서 대열은연도 변에 가득 늘어선 수 만 명에 달하는 평양시민들의 환호와 만났다. 빗속에서도 평양시민들은 꽃술과 손을 흔들며, 일부는 춤을 추고 북을 치며 반도 남녘을 비롯하여 지구촌 곳곳에서 찾아온 동포들을 ‘열렬히’ 반겼다. 그들의 환영은 진심어린 것이었을 터이지만 손을 흔들며 빗속을 걷는 마음속이 편치만은 않았다. 남과 북, 해외의 대표단이 김일성 경기장으로 입장하는 순간 경기장을 가득 메운 7만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잠시 압도되었다.

대열이 평양시민들의 함성에 손을 들어 화답하며 트랙을 돌 때, 나는 가급적 평양 시민들과 눈을 마주치려 애썼다. ‘북측 사람들’이 아닌 아저씨 아줌마의 얼굴들이 스쳐지나갔다. 매스게임을 위해 빗속에 열을 지어 서있는 소녀들 중 유난히 얼굴이 검은 예민해 뵈는 아이가 부동자세로 울먹이고 있었다. 감정이 복받친 탓인가? 아니면 힘들어서였을까? 조회 때마다 쓰러지곤 했던 옛 짝꿍이 생각났다.

북측 안경호 위원장의 개막사와 백낙청 남측 상임대표의 개막연설을 비롯한 축하연설이 끝나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녀들과 여성들, 아이들의 매스게임이 이어졌다. 잘 훈련되고 세련된 원색의 향연 앞에서 북을 찾은 손님들은 입을 닫지 못하였다. 공식행사가 끝난 후에는 모두들 운동장으로 몰려나가 기차놀이와 포크댄스를 하며 한 데 어우러졌다. 남측 해외측 대표들은 호기심과 수줍음이 섞인 평양시민들의 시선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어색한 몸짓으로 그들에겐 익숙한 스텝을 따라가느라 진땀을 흘렸지만 가슴만은 이내 뜨거워졌다.

밤에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북측과 해외측 실무자와 문건조정 협의를 시작했다. 6.15공동선언 5주년을 기념하는 ‘민족통일대축전’의 핵심행사인 15일 민족통일대회 연설문을 점검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측 연설문들의 주된 기조는 “6.15선언이 제시하는 ‘우리민족끼리’ 이념에 따라 외세의 전쟁위협에 맞서 민족자주, 반전평화, 통일애국 공조를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준비해 간 남측 연설문들의 기조는 “6.15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실현하되, 실질적인 각계각층의 참여를 보장하고, 군사적 문제해결방식에 대해 반대하는 국제적 평화 공조도 함께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요컨대 북은 ‘반외세 민족공조’를, 남은 ‘민족공조와 국제평화공조 병행’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각 자의 차이는 비교적 명확하였고 이견이 없지 않았지만 자극적인 표현이 없는 한 상대의 연설기조를 양해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4월 실무접촉에서 남측이 주장했던 ‘한반도 비핵화’는 북측이 난색을 표해온 터였으므로 남측은 아예 초안에서 관련 용어를 배제하고 다만 ‘동북아 평화와 우호협력’을 강조하는 수준으로 양보한 상태였다. 반면, 북측 연설문에 포함된 “우리가(북)이 21세기 이후 확보한 전쟁억지력이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힘이므로 온 겨레가 이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요지의 문장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북의 핵개발을 겨레가 지지해야 한다”는 뜻의 이 문장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자 북측은 핵개발의 정당성을 역설하였고 1시간여의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해외 측 연설 문건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연설문은 북측의 기조와 유사하면서도 남측의 대미종속에 대해 매우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비판을 가하는 문장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다. 북측 실무자를 앞에 두고 해외 측에 북체제와 남체제에 대한 비판의 균형을 주문하거나 한국전쟁을 비롯한 한반도 냉전체제의 역사적 복잡성을 거론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해외와 북측 모두 매우 날카롭게 맞섰다. 결국 1차 문건실무접촉은 15일 아침 약속을 잡은 채 결론 없이 마무리되었다.

▲ 체육경기에 참석한 남북 대표와 해외동포 배구선수들이 평양시민들의 무등을 타고 경기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 만수대창작사를 방문해 북측 예술인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다음날 아침 전달된 북의 문건에는 다행히 전쟁억지력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삭제되어 있었다. 수정된 해외 측 연설문은 북측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해외 측 연설문은 여전히 자극적이지만 일부 용어가 완화되어 있었다. 반면 북측 역시 우리 측 연설문 중 ‘내외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표현을 ‘삭제’하거나 ‘외부의 위협’으로 수정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타협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다.

15일 오전 통일대회에서 남과 북, 해외는 서로가 결이 다른, 그러나 한결같이 615정신의 계승과 민족화해를 강조하는 연설문들을 발표하고 공동의 ‘민족통일선언’을 채택하였다. ‘난산’이었고 남겨진 숙제도 적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 원만한’ 성공적인 대회였다. 나중에 모니터해본 결과 대회운영에 만족을 표시한 남측 대표들은 대체로 대회에서 발표된 연설들이 각자의 입장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서로를 자극하지 않고 최소한의 접점을 형성하려는 고려 속에 조율된 점을 평가했다.

민간대표단의 주요 일정이 일단락되고, 부문 상봉과 폐막식 준비, 남북이 준비한 공연일정이 이어지는 동안, 모든 관심은 함께 한 남북당국간 대화로 집중되었다. 민간방북단으로서는 ‘진인사대천명’의 심정이었다. 민간이 막힌 대화의 물꼬를 트고 멍석을 깔았으니 당국자간의 대화에서 남과 북, 그리고 한반도 주변 상황을 타개할 무언가 진전된 결론이 나오기를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 15년만에 공식적으로 마주앉은 남북의 정치인들.

▲ 천리마동상에서 김일성경기장까지 행진하는 연도는 퍼붓는 비에도 불구하고 수만의 평양시민들의 환영 열기로 뒤덮였다.

17일 오전, 정부대표단과 민간 대표단의 일부(2000년 정상회담 남측대표단 관련인사)가 김정일 위원장을 면담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공항 도착 직후에야 최근 모든 언론에 소개된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과 제안내용들을 접할 수 있었다. 기대 이상의 전향적인 제안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제안에는 남북간 이산가족 상봉, 철도연결 사업 재개, 서해 공동어로구역, 서해 직항로 개설, 남북경제협력 가속화 등 남북관계의 전반적인 확대발전이 지향이 명확히 표현되어 있었다. 이 논의가 구체화되어 남북간 신뢰와 협력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에 반비례하여 한반도의 간장과 위협은 줄어들 것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한반도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북의 6자 회담 복귀와 관련해서 전향적인 입장을 밝힌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당국자간 면담에서 김 위원장은 “미국이 북한을 인정ㆍ존중하고 그 것이 확고하면 7월에라도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며,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변화한다면 NPT에 복귀하고 사찰도 수용할 것이며, 장거리미사일 포기도 기능하다고 밝혔다. 물론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변화를 전제로 한 발언이어서 미국의 대응을 비롯한 이후 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터이지만 현 상황을 타개할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는 주목할만한 변화임에는 틀림없다.

▲ 해외대표단의 입장 모습.

한편, 민간대화채널에서 그토록 금기시 되고 날카로운 언쟁의 대상이 되었던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으로 해석되어 북의 최고지도자의 입을 통해 언급되는 것은 내게 약간의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내겐 김 위원장의 이같은 발언이 남쪽과는 매우 다른 북한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되었다. 최고 지도자는 유연하고 민은 경직된, ‘관-민 일체 사회’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그것이다.

6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 4일간 이루어진 민간방북단의 활동과 민족통일대축전은 같은 기간 이루어진 정부대표단의 활동 특히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위원장의 면담 소식에 가려져 변변히 알려지지 않았다.

유감은 없다. 6.15행사기간을 통해 남북 당국간의 대화가 재개되고 나아가 예상치 못했던 극적인 전기가 마련된 것이야말로 민간방북단이 간절히 원했던 일이다. 특히 지금처럼 한반도 주변정세가 갈등과 대결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는 ‘단비 같은 희소식’이다. 오히려 민간방북단은 우리가 한반도 평화의 교량 역할을 한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남북의 민간교류를 지속해야 한다는 남측위원회의 연초의 다짐이 소중한 옥동자를 낳은 것이다.

* 사진제공: 615남측추진본부

* 이 칼럼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드는 참여사회>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실장, 6.15 공동위 남측위원회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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