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칼럼(pd) 2011-07-29   3071

[기고] 한국에서 군인은 사람인가?

 

한국에서 군인은 사람인가?

 

이대훈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실행위원)

 

 

최근 벌어진 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과 육군 등 군에서의 일련의 자살 사건은 군 내부의 폭력에 대해 전에 없는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군대 내 폭력’이 사회 의제로 부각된 것은 너무 뒤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문제를 이해하고 해법을 찾는 모습은 너무나 구태의연하고 혼잡스럽다. 군은 문제 병사를 찾는 방식으로 사태를 축소하느라 급급하다. 폭력 실태의 전체 모습을 알고자 하면 자료도 없고 조사도 없고 접근도 되지 않는다. 개별 사건별로 피해자, 가해자를 찾으려고 할 때 너무나 조심스럽고 민감하고 복잡한 상황이 발생한다.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에 큰 차이도 있고 원하는 해법도 다양하다. 몇 주 지나자 다른 이슈에 묻혀 또 그저그렇게 지나간다. 죽은 사람만 억울하고 말 못하는 사람들은 계속 침묵당한다.

  

결국 군 폭력은 국가의 책임

병영에서 지속적으로 비인격적인 모독과 폭력을 당한 청년이 동료 병사에게 해를 입혔거나 자살했을 때를 비롯해 많은 경우 누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묻는 것 자체가 고문이 된다.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으로 이러한 폭력 문제를 국방부 장관이 했던 것처럼 몇몇 ‘인성이 불비한 자’의 문제로 보거나 ‘관심사병’ 또는 ‘군 부적응자’의 문제로 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통상적인 시각이다. 몇몇 ‘고장난’ 사병을 격리하거나 수리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공장 또는 옛날 정신병원의 방식이다. 그러면 결론은 단순하다. 군대와 사회를 어떤 폭력과 인격모독도 굳건히 견뎌냈고 그럴 수 있는 완벽한 (괴물 같은) 남성으로 채우면 된다.

 

조금 더 넓게 병영문화, 군의 조직문화로 여기는 시각도 널리 펴져 있는데 비슷하게 타성에 젖은 접근이다. 지휘관 몇몇이 사병 체험을 하거나 이전과 비슷한 규칙과 교육을 강화한다고 해서 중·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회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엄격하게 서열화된 질서와 폭력의 맞물림이 막아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찬찬히 사람 세상을 둘러보면 ‘인성이 완비된’ 완벽한 남성도 그리 많지 않고 새로운 문화가 마술같이 나타날 리도 없다는 것이다.

 

‘인성이 불비한 자’를 가려내려는 기괴한 군사적 시도는 군인을 사람 또는 시민으로 보지 말자는 명령이기도 하다. 사람의 세계, 시민의 세계는 너무도 다양해서 인성의 완비와 불비를 구분하지 않는다. 인권과 인권침해, 법과 범죄를 구분한다. 만약 한국에서 군인을 시민으로 보려는 시도를 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제복을 입은 시민으로서 병사의 인권과 인권침해, 병사의 시민권과 부당한 명령, 법규범과 범죄를 구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는 인성의 문제도 문화의 문제도 아니다.

 

병사를 사람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군대 내 폭력 실태가 몇몇 총기 사건과 자살이나 구타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그중 극히 일부만 외부에 알려지는 실태에 분노하는 일이다. 군의 사조직화, 사생활의 서열화, 광범위한 인격모독과 인권침해, 차별과 희롱, 폭력이 상호순환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 중요한 점은 군대 내 폭력이 국가의 의무를 수행하는 젊은 시민들에게 가해지는 피해이므로, 적군에 의한 피해 못지않게 국가와 사회에서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문제가 시기에 따라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지속적·체계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실체라는 점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말을 안 하고 못해서 그렇지 그 상처를 몸과 마음에 안고 평생 살아가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규모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단지 이를 ‘군대는 원래 그래’라고 덮고 있을 뿐이다.

 

‘다양한’ 남성을 위한 대체노동

무엇이 실패했는가? 그동안의 ‘병영문화 개선’이라는 접근은 모두 근본적 의미에서 실패했다. 문화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값싼 노동력을 값싸게 부려먹기만 한 한국군의 역사와 조직 구조에 기인하는 것이며, 여기에 작동하지 않는 허울뿐인 문민통제가 실패의 큰 원인이다. 문민통제의 상징이 민간인 국방부 장관이라는 생각은 한국에서는 아직 얻어맞을 얘기일 뿐이며, 국회의 감시는 군의 정보통제와 폐쇄성을 넘지 못한다. 병사들의 인권침해와 폭력 피해는 국회의 감시에서 한참 멀리 벗어나 있다. 군사법제도는 군 지휘체계의 위력 앞에서 피해자들을 구제하고 제도를 변화시키는 힘을 갖지 못했다. 민주국가가 보통 갖추고 있는 (외부) 군감독관제는 요원하다. 피해자들의 가족은 성가신 존재로 취급되고 제대한 동료 남성들은 군대 내 폭력에 대해 침묵한다. 국가는 병사의 안전을 방치하는 직무유기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다. 남는 것은 ‘군인도 사람인가?’라는 자조와 가학적 미소뿐이었다.

 

이제 침묵을 질문으로 바꿔야 한다. 한국에서 징집병은 시민인가? 만약 여론이 바뀌어서 징집 병사를 시민으로 인정하기 시작한다면 군의 운영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시민은 권리를 가지므로 병사의 인권이 세부적으로 정의되고 보장되어야 한다. 시민은 다양하다. 남성 시민도 다양하므로, 모든 청년 시민을 군의 특수한 육체적·공격적·집단적 표준에 맞출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징집 포스터와 달리 옛날식으로 남성답지 않은 남성이 훨씬 많아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변화다. 결국 시민이 국가에 의무적으로 기여하는 방식, 대체노동(복무)의 방식이 훨씬 다양해져야 한다.

 

또 병사인 시민은 하루 8시간만 노동하고 적절한 휴식과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를 가진다. 물론 연애할 자유와 가족생활을 영유할 권리도 가지며 급여도 정상적으로 받아야 한다. 부당한 명령은 거부할 권리를 가지며 그 명령권자를 재판에 회부할 수 있어야 한다. 군사 영역 이외에서 의사표현의 자유가 있고 사상과 종교의 자유, 기타 시민으로서의 권리 행사가 보장되어야 한다.

병사와 불화하는 군대

많은 사람들이 군인도 사람이라는 주장을 두려워한다. 군기 또는 지휘권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더 던져야 하다. 군이 사회로부터 폐쇄된 채, 적절한 감시를 받지 않으며 군국주의 일본의 ‘군기’를 여전히 군대의 근간으로 삼는 것이 과연 민주국가에 타당한가라는 질문이다. 폭력과 모독의 대물림으로 지휘권을 유지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군대에서 타당한가라는 질문이다. 그런 강함이 쇼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지 않았나.

 

사병들이 ‘사적 명령’ ‘부당한 명령’을 대표적 인권침해로 꼽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민주국가에서 인권의식을 갖추고 성장한 젊은 시민들을 군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성이 불비’한 것은 사실 군대 제도다. 그렇다면 새로운 구상이 필요하다. 부당한 명령에 대한 불복종권과 시민권에 기초한 병사, 이러한 민주적 시민 병사에 기초한 지휘권과 군의 기운(군기)을 구상할 수 있어야 한다. 군의 규모와 제도 여러 면에서 개혁되어야 할 것이 산적해 있다. 그러나 민주국가에서 제도 개혁의 토대는 시민의 인권이다.

 

* 위 글은 한겨레 21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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