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파병 2003-10-23   608

<파병반대의 논리> 우스운 동맹이 되지 않으려면

각계전문가와 세계지성이 말하는 이라크 파병반대의 논리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 8월이었다. 이라크 미군정을 책임지고 있는 폴 브리머 최고행정관이 조지 부시 대통령을 찾았다. 그는 상황이 나쁘다며 1년 안에 상당수 미군이 철수하려면 추가로 많은 돈을 치안과 재건에 투입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내년 11월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는 부시로서는 가슴이 뜨끔한 말이었다. 브리머는 의회에도 출석해 “사실을 숨기지말자”며 이라크인들이 미군을 해방자가 아니라 점령자로 보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파월 국무장관이 유엔 결의를 통한 다국적군구성과 870억달러 규모의 추가예산안을 만든 것은 부시가 여름 휴가에서 돌아온 8월 말이다. 국무부는 이 안을 곧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람시켰고, 부시는 대국민연설을 통해 이제 더 미군을 이라크에 투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병력·재정 지원요구가 바로 각국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미국의 우방이면서도 이라크 침공에 반대해 냉랭한 관계를 유지해온 독일과 터키가 최우선 공략 대상이 됐다. 독일을 끌어들이면 반부시 여론의 선봉장인 프랑스가 약해질 것이고, 터키의 파병은 아랍권의 반미 분위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부시는 먼저 방송에 나가 “독일 국민으로선 역사적으로 평화주의자가 될 이유가 있다”며 “이라크 침공에 반대한 것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를 워싱턴에서 만나 ‘친구’라고 부르며 화해의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슈뢰더는 “파병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독일의 약속은 이라크인 군인·경찰 훈련 지원에 그쳤지만 미국은 이를 높이 평가했다. 터키에 대해서는 존 스노 재무장관이 발벗고 나서 80억달러 이상의 지원 계획을 서둘러 발표했다. 그럼에도 터키 정부는 소극적이다. 국민의 70% 이상이 파병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훨씬 격이 낮은 리처드 롤리스 국방부 부차관보가 주된 통로가 됐다. 그는 한국 정부에는 공식적으로 얘기하지도 않은 채 파병 요청 병력의 내용·규모를 들먹이며 몇 차례 언론 플레이를 했다. 거대 야당의 총재가 미국으로 가 그를 만나기도 했다. 독일에는 몸을 굽혀 접근하고 터키에는 돈보따리를 먼저 내밀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한국은 베트남전, 걸프전, 아프가니스탄 공격, 이라크 침공 등 1960년대 이후 미국이 치른 모든 주요 전쟁을 지지하고 병력을 보낸 유일한 나라가 아닌가.

무엇보다 한국에는 미국의 말이라면 알아서 헤아리는 세력이 있다. 지금 파병에 찬성하는 한 축에는 부시 행정부의 대외 정책, 특히 대북한 강경 기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정통 보수 세력을 자처하지만 사실은 냉전 논리를 21세기까지 연장시키려는 극우나 수구에 가깝다. 다른 그룹으로는 초강대국인 미국의 비위를 건드려서는 안보나 경제에서 이로울 게 없다는 이른바 현실론자들이 있다. ‘안전보장론’에서‘거부시 미국보복론’에 이르기까지 각종 파병론을 만들어내는 것은 주로 이들이다. 이들은 미국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고 친미를 벗어난 국익은 없다고 믿는다. 이 밖에 미국과 미국적 생활양식이 좋아서 파병을 지지하는 전통적·문화적·종교적 친미파도 있다. 미국의 정책을 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침공과 점령이 재집권으로 가는 길목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다자주의 외교로 회귀했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엄청나게 불어나는 점령 비용을 덜고 미군 희생자를 줄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라크 침공은 정당했으며 부시는 강력하고 권위 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 두 과제는 상충되지만 유엔이 잘 따라준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땅한 대안도 없다. 그래서 세계에 내민 게 골방 깊숙이 처박아뒀던‘유엔카드’다. 스스로의 잘못은 인정할 줄 모르면서 힘을 앞세워 남에게 뒤처리만 떠넘기려는 이런 정책은 ‘뒷골목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알면서도 파병 요청에 응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리 포장하더라도 뒷골목의 의리 이상의 것이 되기 어렵다. 이것이 과연 21세기 한-미 동맹의 모습일까?

이기사는 한겨레신문 2003년 10월 7일자에 실린 기사입니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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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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