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파병 2003-10-23   578

<파병반대의 논리> 다음 단계 (The Next Stage)

각계전문가와 세계지성이 말하는 이라크 파병반대의 논리

– 이라크인들, ‘꽃’ 대신 ‘수류탄’을 던질 것 –

이라크전쟁이 발발하기 전 48시간의 경고기간 중, 미국은 이라크 내부에서 반후세인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봉쇄해 버렸다. 백악관 대변인 아리 플레이셔가 후세인이 제거되거나 자진 망명한다 해도 미군과 영국군은 이라크를 “평화적으로” 침범해 대량살상무기 제거 작업을 하겠다고 분명히 말한 것이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이라크인 스스로가 후세인을 몰아내든 말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은 어떤 경우에라도 이라크에 들어가 이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설령 공화국 수비대의 누군가가 다가올 미군의 공격을 피하고 조국을 구하기 위해 후세인 축출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플레이셔의 이 말 한 마디로) 이라크인 스스로 이라크를 이끌어 나갈 수 없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라크인에 의한 해방전쟁이 될 수도 있었던 이번 전쟁은 외세에 의한 침략전쟁이 되고 말았다. 비극적인 것은 이라크인들의 민족자결 의지를 꺾은 이번 사건은 미국 역대 정권의 이라크인들에 대한 정책과 완벽한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이라크인들은 민족자결 의지가 강력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1920년 이라크를 침공했던 오스만 터키는 결국 패배했다. 1932년 이라크인들은 영국 식민통치를 무너뜨렸다. 1958년 그들은 (요르단 출신의) 하세마이트 왕조를 축출하고 공화국을 선언했다. 이라크인들은 엄청난 역경 속에서 독재자를 무너뜨릴 능력을 갖고 있는 민족이다. 그런 그들이 왜 후세인 독재정권은 축출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중요한 고비마다 미국이 개입, 후세인 정권을 지원하거나, 아니면 후세인정권의 대안은 미국에 의한 통치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왔기 때문이다.

이라크 반대파들에 대한 배신

후세인의 바트당이 권력을 장악한 1968년 이후, 미국은 아랍의 민족주의적 정권에 대해 정신분열증적 정책을 취해 왔다. 닉슨은 당초 이라크 내 쿠르드 반군을 지원했으나 1975년 이라크가 당시 미국의 우방이었던 이란과 평화협정을 맺자 이들에게 등을 돌렸다. 이라크 내 쿠르드족은 아직도 이 배신을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으며 미국을 불신하고 있다.

5년 뒤인 1980년, 바트당의 새로운 지도자 사담 후세인은 미국의 축복 속에 친미 왕정이 무너지고 반미 회교세력이 정권을 잡은 이란을 침공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라크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미 해군으로 이라크의 석유 선적을 보호해 주었으며, 당시 국방장관 럼스펠드는 바그다드에서 후세인과 따뜻한 악수를 나누었다. 이란과 이라크가 국경의 쿠르드족 지역에서 화학무기 공방전을 벌이자 미국은 이란만을 비난했다. 미국은 1988년 이란촵이라크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라크를 비난하는 유엔 결의안을 봉쇄하거나 완화시켰다.

1990년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전임 부시 대통령은 이 석유 왕국을 구출하기 위한 다국적군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 군사작전에서 이라크내 기층 반체제 세력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 대신 워싱턴은 망명세력들을(예비역 장군 및 금융인 아메드 찰라비) 규합했는데, 이들은 내부적으로 분열돼 있을 뿐아니라 이라크 국내에서도 인기가 없었다.

전임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인들의 반후세인 봉기를 부추겼다. 그러나 1991년 3월 남부의 시아파 회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미군은 이들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 돕지 않았다. (주로 이라크 남부에 거주하는 시아파는 이라크 전체 인구의 약 60%로 다수를 점하고 있지만 수니파의 후세인이 이끄는 현 정권에서는 소외돼 있음: 역자)

오히려 연합군은 전시 비행금지구역을 일시 해제, 후세인군의 헬리콥터들이 시아파 반군을 기총소사로 소탕할 수 있도록 하는 친절함을 베풀기까지 했다.

미국이 시아파를 배신한 이유는 3가지인데 이는 지금의 상황에도 매우 시사적이다. 첫째, 워싱턴은 이라크 시아파가 정권을 잡을 경우 이란 시아파의 회교정권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80년대 이란촵이라크전쟁에서 이라크군으로서 이란과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시 후세인은 시아파 반군이 장악한 도시들에 이란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포스터를 붙임으로써 미국의 이같은 의심을 강화시켰다)

둘째, 미국의 맹방인 사우디 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자신들의 왕조 정권에 대한 민주적 반대세력이 커가고 있는 상황에서 바로 국경 너머에 세속적촵민주적 정권이 탄생하는 위험한 선례가 현실화되는 것을 두려워 했다. 이들 왕조 정권의 수니파 왕자와 족장들은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고 석유 이권을 보장해 주었으며, 그런 점에서 이들은 이라크의 민족자결보다도 미국에 훨씬 중요하다.

셋째, 이라크인들에 의한 진정한 민주혁명이 일어날 경우 새 이라크 정권은 자신들의 석유자원과 이익을 스스로 관리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분명하다. 1953년 이란의 민족주의적인 모사데그 정권이 석유자원을 국유화하고 미국과 영국의 석유 이권을 박탈하자, 미 중앙정보국(CIA)은 이 정권을 전복시켰다. 워싱턴은 수니파의 지배를 유지하고 ‘지역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후세인을 지원하는 편이 보다 바람직하며 예측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이에 따라 후세인의 테러정치는 계속됐다.

내부 반대세력의 약화

이라크 민중의 민족자결 열망에 대한 최후의 치명타는 1990년대 클린턴 행정부에 의해 가해졌다. 미국이 주도한 10여년간의 경제제재로 후세인에 반대할 수 있는 민중들의 잠재력이 완전히 소진된 것이다. 제재의 당초 목적은 이라크인들에게 압력을 넣어 후세인에게 반기들 들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후세인은 경제적 고난은 미국 때문이라며 책임을 돌렸고, 이는 사실 근거가 없는 주장은 아니었다. 이라크 중산층과 노동계측은 하루종일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물품들을 얻기 위해 돌아다녀야 했다. 그들은 너무도 쇠약해져서 정권에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후세인을 원망하기보다는 미국을 원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3년 제2의 걸프전이 시작된 것이다. 군부나 민간부문을 막론하고 후세인에 대한 저항세력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은 미촵영군의 침략을 ‘이라크해방작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쟁 직전 48시간의 경고기간, 즉 임박한 미국의 군사공격을 피하기 위해 소수의 이라크 군 장교나 바트당 간부들이 후세인을 축출할 수도 있었던 마지막 기회는 아리 플레이셔의 한마디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제 후세인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미국뿐이다. 그리고 미국의 목표는 독재자의 축출, 또는 후세인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되는 생화학무기의 제거가 아니라 이라크의 점령 및 통치다. 이라크 해방은 이라크의 석유자원을 장악하고, 나아가 미국의 ‘세력권’을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1990년 이후 미국의 모든 군사개입이 있을 때마다 미국의 떠오르는 경제적 경쟁상대인 유럽연합과 동아시아 사이의 ‘중간지대’에는 수많은 새로운 영구 미군기지가 생겨났다. 따라서 독일,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중국이 이번 전쟁의 주요 반대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라크와 이란은 바로 이 중간지대, 즉 헝가리에서 파키스탄에 이르며, (미국의) 군사-경제적 ‘제국’의 핵심이 될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이러한 미국의 ‘세력권’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독재자를 축출할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다. 반전운동이 이번 전쟁에 의한 무고한 희생, 그리고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인간적 위기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 이르기까지 지난 30년간 지속적으로 이라크인들의 민족자결 열망을 거부한 워싱턴의 행위야말로 최대의 범죄라 해야 할 것이다.

미군을 환영한다고?

전쟁 초기 지치고 겁먹은 이라크 군인, 또는 민간인들이 침략군을(미군의 침략동기가 무엇이든간에) 환영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후세인의 악몽과 같은 철권통치가 종식되는 데 대한 당연한 인간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1990년에도 일부 사우디인들은 미군을 환영했다. 그러나 1차 걸프전이 승리로 끝난 후에도 미군이 이슬람의 성지에 무기한 주둔하자 환영의 열기는 점차 식어갔다. 마찬가지로 지난 1992년 미군의 모가디슈 상륙을 소말리아인들은 환영했다. 그러나 미군이 부족간 싸움에서 한쪽 편을 들면서 환영은 사라졌고, 미국은 블랙호크 다운’ 전투라는 치욕적 대가를 치러야 했다.

종교적·인종적 측면에서 이라크는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만큼이나 복잡하며, 소말리아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이라크를 점령함으로써 미군은 새로운 복마전에 들어가는 셈이다. 이 복잡무비한 나라에서 미국은 곧 나름대로 ‘좋은 친구’와 ‘나쁜 놈’을 가르기 시작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내부 권력투쟁에 개입하게 될 것이다. 이라크인들은 2003년 미군에게 꽃을 던질지 모르지만, 2004년에는 수류탄을 던질 것이다.

자랑스런 민족자결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라크 민중들은 미군 사령관이나 그 대리인의 통치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이라크 북부에 본부를 세운 찰라비와 같은, 미국의 꼭두각시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미군에 영공사용권을 제공한 터키가 그 대가로 이라크 북부에 진입한다 하더라도 그곳의 쿠르드족은 터키군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남부의 시아파 회교도들은 수니파 독재자 후세인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킨 미군을 반길지 모른다. 그러나 이라크내 다수파로서 그들의 정당한 위치를 되찾고, 경제적 2등 국민인 자신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가로막는 미국 통치자들을 원망할 것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도시의 교육받은 중산층, 그리고 반후세인 좌파 정당들은 ‘옛 통치자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새 통치자’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군사적 승리는 이번 전쟁에서 가장 쉬운 부분이다. 부시는 이번 전쟁을 쉽게 이길 수는 있겠지만 평화를 잃을 것이다. 가장 깨기 어려운 저항은 후세인의 추종자가 아닌, 그의 반대파로부터 나올 것이다. 1세기 전의 필리핀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독재정치에 신음하는 민중들을 ‘해방’하기 위해 이라크에 왔으나 궁극적으로 자신이 도우러 왔던 민주적 반군과 싸우는 제국주의 세력이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미국 반전평화 싸이트 ZNet에서 발췌(2003. 3)

http://www.zmag.org/content/showarticle.cfm?SectionID=15&ItemID=3300

이기사는 2003년 3월 24일자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의 기사입니다. ⓒ 2001-2003 PRESSian. All right reserved. (원문보기)

졸탄 그로스만 (미 위스컨신대 지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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