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국제분쟁 2009-01-21   6214

[강연문] 홍미정 교수가 들려주는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Ⅰ. 이스라엘의 신화






 
 1. 시오니즘과 디아스포라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디아스포라는 기원전 6세기에 예루살렘 유대 성전 파괴와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서기 1세기 로마제국이 재건된 예루살렘 유대 성전을 다시 파괴하고, 예루살렘 유대인들을 대량으로 추방한 사건을 설명하면서 디아스포라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후 디아스포라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당한 유대인들’을 상징하여 사용되었고, 예루살렘 영역을 포함하는 팔레스타인 지역 밖에 전 세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의미하는 ‘고전적인 용어’로 일반화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팔레스타인 지역 이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대다수는 바벨론 시대나 로마제국 시대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당한 유대인들과는 혈통적으로 관계없다. 오히려 이 유대인들은 중세 시대에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즉 서기 6세기에 아라비아 반도 남부 지역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힘야르 제국의 힘야르 족(Himyarite), 7세기 북아프리카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베르베르족과 8세기 중반에 흑해와 카스피 해 연안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카자르 제국의 카자르족(Khazar)의 후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특히 카자르 후손 유대인들은 현재 전 세계 유대인들의 약 80퍼센트를 구성하는 아쉬케나짐(Ashkenazim)의 주류를 형성한다. 고전적으로 디아스포라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한 유대인들’, 즉 현대 유대인의 선조들이 바벨론 유수나 로마제국 시대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표현은 역사상의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시오니스트들이 주장하는 “현대 유대인 선조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당했다”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신화다. 시오니스트들은 “땅 없는 민족에게 민족 없는 땅을”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수 세기 동안 지속된 토착 아랍 문화의 존재와 100만 명의 토착 아랍인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오니스트들의 활동의 결과 1948년 5월 유대국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건설되었고, 토착 아랍인들 중 90퍼센트 이상이 고향에서 축출되면서,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2. 이스라엘-아랍 전쟁

◯ 1차 중동 전쟁(1948년)


1948년 5월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종결과 동시에 발발한 1차 중동 전쟁은 아랍 국가들이 공모하여 이스라엘 국가(팔레스타인 땅의 56.47%)를 파멸시키기 위해서 벌인 사건이 아니었다. 아랍 국가들은 처음부터 그럴 의사가 없었고, 그럴만한 군사력도 없었다. 이 전쟁은 ‘1947년 11월 유엔 분할안이 아랍 영역(팔레스타인 땅의 42.88%)으로 명시한 땅을 어느 국가가 차지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 영국의 위임통치 종결과 동시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발발한 전쟁은 ‘수적으로 압도적이며 통합된 아랍 군대가 모든 유대인들을 지중해 속으로 처넣으려한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전쟁에 대한 ‘다윗과 골리앗’ 버전인, ‘통합된 아랍의 전쟁위협’이라는 선전은 위대한 이스라엘, 유대 민족 국가 창설 신화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오늘날에도 이 신화는 이스라엘인들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면서, 이웃 아랍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태도를 결정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화는 근거가 전혀 없으며, 놀라만한 것도 없다. 이스라엘은 단독으로 이 전쟁을 치룬 것이 아니었으며, 국제 사회로부터 막대한 외교적, 물질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영국 위임 통치 시절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은 오직 팔레스타인 게릴라들 뿐이었다. 영국 위임 통치 당국은 전략적으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무력화시킨 반면, 시오니스트 게릴라 조직들에게는 잘 무장하고 훈련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시오니스트들은 대부분은 제 1, 2차 세계 대전 중 영국군 소속으로 전투 경험을 획득하였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 위임 통치가 종결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자는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대체되었다. 미국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 선포 즉시 이를 승인하였다. 이후 오늘날까지 미국은 이스라엘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민족회의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정부를 구성하였고, 1948년 10월 1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물론이고 트랜스 요르단과 이라크 정부도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승인을 거부하였다. (1988년 11월 15일 : 팔레스타인 민족회의가 서안과 가자를 영토로 국가 선언)


그러므로 아랍 군대들이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위하여, 이스라엘로부터 팔레스타인 땅을 방어하기 위한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작전을 수행했다는 신화는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 아랍 국가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형제들을 도와야한다는 아랍 대중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조차 않았다. 1948년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이 철수할 즈음에 유엔 결의가 아랍 영역으로 명시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자국의 국경들을 확장하려고 시도하였다. 유대 국가에 대항하는 아랍 통합이라는 허구적인 선전은 이스라엘에게 ‘아랍의 적들에게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실체를 강화’시켜야한다는 명분만을 제공해왔을 뿐이었다. 당시 영국의 위임통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위협할만한 토착 팔레스타인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과 시오니스트들이 이미 이러한 토착 팔레스타인 세력들 대부분을 살해하거나 추방하였기 때문이었다.


1948년 전쟁 초기에 이스라엘 군대는 지중해를 통해서 보급품과 장비들을 받아들였으며, 약 2만 7천 명으로 구성되었고, 잘 정비된 조직 체계, 2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여 잘 훈련된 병사들과 막대한 재정적 원조와 정교한 군사 전략을 갖추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정착촌 예비군 약 9만 명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1948년 전쟁에 참가한 아랍 연합(이집트, 트랜스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군대 대부분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고, 적당한 무기도 없었으며, 주로 지역 치안을 담당했던 경찰들로 구성되었다. 아랍 연합 군대 중  어느 정도 잘 훈련되고 적당한 무기가 있는 군대는 영국군이 훈련시킨 트랜스 요르단 군대뿐이었다. 전쟁 초기에 배치된 약 2만 3백 명의 아랍 연합 군대 중 트랜스 요르단 군대는 4천 5백 명 뿐이었다. 그런데 당시 트랜스 요르단군 사령관은 영국인 존 글럽(John Glubb)이었다. 영국이 1921년에 6개월 동안 매달 5천 파운드의 보조금을 압둘라 아미르에게 지급함으로써, 압둘라 아미르는 1921년에 트랜스 요르단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1921년부터 1956년까지 요르단군 사령관은 영국인들(F.G Peak와 John Glubb)이 담당하였다. 당시 이 영국인 군사령관들이 요르단 정치에서 막강한 결정권을 휘둘렀다. 


트랜스 요르단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 사이의 전투는 유엔 분할안이 아랍 국가 영역으로 명시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스라엘이 공격하면서 발발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은 영토를 유엔 분할안이 아랍 영역으로 명시한 지역으로 깊숙이 확장하여 팔레스타인 전 영토의 78%를 차지하였고, 나머지 22% 중 트랜스 요르단이 서안(West Bank)을, 이집트가 가자(Gaza)를 차지하였다. 결국 이 전쟁은 아랍 연합 국가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파괴시키려했던 사건이 아니었고, 1947년 유엔이 아랍 국가 영역으로 명시한 지역을 서로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아랍 각 국가들이 벌인 전쟁이었다. 트랜스 요르단이 주도하는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 국가를 파별시키려고 했다는 신화는 허구다.


◯ 3차 중동전(1967년)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의 노동당 정부가 주도한 이 전쟁은 이집트를 선제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7일 요르단, 8일 이집트, 10일 시리아와 정전 협정을 맺음으로써 이집트 공격 개시 6일 만에 압도적인 승리로 전쟁을 끝냈다. 이스라엘은 기존 영토의 3.7배인 약 7만㎢를 장악하였다. 1967년 6월 12일 노동당의 레비 애쉬콜 총리는 “이스라엘이 일주일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연설하였다. 이 정책 기조는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1979년 이스라엘-이집트 국경획정 협정을 통해서 가자의 지배권을,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국경획정 협정을 통해서 서안의 지배권을 요르단으로부터 승인받음. 1993년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을 통해서 가자와 서안의 지배권을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인정받음.


  3. 하마스와 헤즈볼라는 강력한 적


◯ 2006년 이후 살해된 사람 수 비교

이스라엘-팔레스타인기간팔레스타인인(명)이스라엘인(명)2006650(1/3 어린이)272007370132008년1-11월432296개월 휴전37(6명은 하마스-가자) 3(예루살렘)이번 공격(12월 27일-1월 15일까지)1,097(1/3어린이): 4,418부상13(?)이스라엘-헤즈볼라2006년7월12일-8월14일(레바논) 1,200명(레바논인)160명폭격 9,500회, 사망: 1천2백 명(1/3이 어린이), 부상: 4천명(1/3이 어린이), 난민 97만 명




  II. 이스라엘 관련 유엔 결의



  1. 유엔 총회 결의


181호(1947년 11월 29일): 영국 위임 통치 지역을 유대 국가(56.47%)와 아랍 국가(42.88%)로 분할
194호(1948년 12월 11일): 난민 귀환권
273호(1949년 5월 11일): 이스라엘 유엔 가입
3379호(1975년 3월 22일): 시오니즘을 인종차별주의로 규정
4686호(1991년 12월 16일): 3379를 무효화


  2.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1967년 11월 22일): 동예루살렘, 서안, 가자 등 1967년에 점령한 영토로부터 철군 요구
252호(1968년 5월 21일): 298호(1971년 9월 25일): 예루살렘을 유대국가의 수도로 변경하는 모든 조처는 무효다 
1860호(2009년 1월 9일):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완전한 휴전 요구




   Ⅲ. 오바마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정책 전망 : 현재 분쟁 구조 유지 ․ 심화 가능성



  1. 2008년 이팔 분쟁 현황


 2008년 현재 이스라엘은 분리 장벽 건설을 통해서 서안의 9.5%를 이스라엘 본토로, 8%는 서안 내부의 이스라엘 점령촌으로 합병하였다. 서안의 28.5%를 구성하는 요르단 계곡 지역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폐쇄되어 있고, 이스라엘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된다. 요르단 계곡에 거주하는 3500~4000명의 이스라엘 점령민들이 이 지역 수자원의 85%를 지배하는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 계곡 지역에서 거주하거나 일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 소유지에 접근조차 허락받지 못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서안의 54%에만 접근이 허락되어 있다. 동예루살렘 거주 이스라엘 점령민 20만 명을 포함하여 약 45만 명 이상의 이스라엘 점령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이스라엘 보안대가 570개 이상의 검문소를 설치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용하는 서안의 모든 도로를 통제하고 있다.


 2007년 1월~12월까지 1년 동안 이스라엘 군인들은 370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하였다.  같은 기간에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은 13명의 이스라엘인들을 살해하였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100채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의 가옥을 파괴하였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의 이동에 대하여 이전보다 훨씬 더 강화된 제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 지구에 대한 집단 체벌과 극심한 비인도적인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대부분의 가자 주민들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원조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이 원조물자들의 가자 유입을 저지하고 있다.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이 통치하는 동예루살렘과 서안에서 이스라엘은 불법적인 점령촌 확장 사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700~800㎞에 이르는 분리 장벽 건설을 강행하고 있다. 면책 특권이 있는 이스라엘 군인들과 점령민들은 팔레스타인인들 살해, 재산 강탈을 일삼고 있다. 현재 약 9천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감옥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바마는 새로운 평화안을 만들어 내는데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으며, 기존의 미국 중재안을 토대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 회담을 진전시킬 것이라고 이스라엘 방문 기간인 2008년 7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차기 미국 행정부는 이미 만들어진 평화안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측이 실현시키도록 도와야하며, 평화와 안보 에서 나란히 공존하는 두 국가 건설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한다.”
 이러한 오바마의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이스라엘 방문에 동행한 중동 정책 고문은 “오바마가 기존의 평화를 위한 2003년 로드맵(the International Quartet’s Road Map)과 2007년 아나폴리스 선언(the Annapolis Declaration)에 토대를 두고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회담을 중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임 행정부의 평화안을 실현시키겠다는 오바마의 주장은 공화당 행정부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정책을 연장하겠다는 것으로 판단된다.



  2. 미국 공화당 정부의 중재안


공화당 정부의 평화안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해체와 이스라엘 안보의 필요성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 평화안이 실현된다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점령지의 현실, 즉 분리 장벽, 이스라엘 점령촌들, 수자원, 영공, 도로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지배권 등을 수용한 채, 접근이 허용된 영토 54%로 구성되는 소위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명칭이 붙은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2-1. 2002년 부시의 연설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2002년 6월 24일 기자회견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책으로, ‘독립적이며 생존 가능하고 민주적인 팔레스타인 국가(independent, viable, democratic Palestinian state) 건설’을 제시했다. 이 때 부시는 “이스라엘 시민들이 테러리스트들에게 희생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의 생활은 더욱 비참해지고 있다. 모든 파벌이 테러에 대항해서 싸워야한다. 평화는 테러와 타협하지 않는 새로운 팔레스타인 지도부를 요구한다.”고 주장하면서, 선거를 통해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지도부를 교체할 것을 요구하였다. 부시 연설은 표면적으로 ‘이스라엘과 나란히 평화롭고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생존 가능한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내세웠다. 그러나 부시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창설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살 폭탄 공격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손으로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시 연설의 핵심 목표는 내전을 의미하는 ‘테러와의 전쟁’이었고,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과 대립각을 세움으로써 팔레스타인의 내전을 진행시킬 수 있는 새로운 팔레스타인 지도부가 필요했던 것이다. 곧 이어 미국을 비롯한 유엔, 러시아, 유럽연합으로 구성되는 4자가 부시의 제안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2-2. 2003년 로드맵

위의 ‘부시 제안’은 2003년 ‘로드맵(Road Map)’의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로드맵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무장 공격을 무조건 완전히 중단할 것, 이스라엘에게는 2000년 9월 28일 이전 경계로 철군할 것’을 각각 요구했다. 결국 이것은 2000년 9월 28일의 경계로의 철군을 요구함으로써, 1967년 이후의 점령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배권을 승인했다. 로드맵은 부시가 주관하고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과 팔레스타인 초대 총리 마흐무드 압바스가 참석한 아까바 정상 회담에서 2003년 6월 4일에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로드맵은 전문, 1 단계, 2 단계, 3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은 당면한 위기의 원인을 이스라엘의 정령 정책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무장 공격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로드맵’의 1 단계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게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을 해체하고 팔레스타인 교육과정, 미디어, 종교 단체에서 반(反) 이스라엘적인 행위를 중지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로드맵의 1차적인 목표는 점령지에서 내전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필가인 무함마드 자카리야는 “파타와 하마스의 내전은 이스라엘의 프로그램(2003년 로드맵)이다. 우리는 이 프로그램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태를 막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자카리야의 말에 따르면, 내전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사건이다.


로드맵 전문은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위한 최종 지위 협상 이전에 팔레스타인인들이 무장 공격을 중지해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팔레스타인인들이 테러에 대항하여 결정적인 초치를 취하고 관용과 자유에 토대를 둔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있는 …… 지도부를 갖고, 폭력과 테러리즘의 종결시킬 때 비로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두 국가 해결책은 오직 성취될 수 있다.


로드맵 전문에서 “양 측이 협의한 해결안은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생존 가능한 팔레스타인 국가의 출현으로 이끌 것이다.”라고 ‘생존 가능한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표현을 명시한 것은 이스라엘과 장래 수립될 팔레스타인 국가의 경계가 1967년 전쟁 이전까지 경계였던 그린라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용어의 사용은 강자의 의도에 따라 영토 분할이 가능하도록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아리엘 샤론 내각은 2003년 5월 27일 로드맵에 14개의 보류 조항을 첨부해서 통과시켰다. 보류 조항 1은 모든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들, 즉 이슬람주의자 계열인, 하마스(Hamas)와 이슬람 지하드(Islamic Jihad), 사회주의자 계열인, 민중 전선(the Popular Front)과 민주주의 전선(the Democratic Front), 자유주의자 계열인, 알 아크사 여단(Al-Aqsa Brigades) 등을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명시하면서, 동시에 로드맵 1단계에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 조직들과 그들의 기반 시설을 완전히 파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인들이 1단계를 완벽히 이행하지 않을 경우 2단계로의 진전은 절대 불가능하다.


14개의 보류조항이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지목한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들이 대다수 팔레스타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정상적인 사회를 유지하면서 모든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의 완전 해체를 요구하는 로드맵의 1단계를 성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만약 이스라엘과 미국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압박하여 14개 보류조항이 첨부된 로드맵의 1단계를 강제로 실행시킨다면, 이러한 조치는 팔레스타인 사회를 완전히 분열 해체시키게 될 것이다.


또 로드맵 보류조항 5는 다음을 규정하고 있다.


임시 팔레스타인 국가(the provisional Palestinian state) 의 성격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이스라엘 사이의 협상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다. 임시 국가는 임시 경계와 제한된 주권을 갖게 될 것이고, 오직 제한된 영역과 장비만 갖춘 경찰과 내부 보안대만을 유지하며, 군대 없이 완전히 비무장화될 것이며, 방위 동맹이나 군사협력을 수행할 권한(외교권)이 없다. 이스라엘은 모든 주민들과 화물의 출입과 영공, 통신 매체들, 텔레비전, 라디오, 전화 등을 통제한다.


이처럼, 보류조항 5는 로드맵이 제시한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생존 가능한 주권을 가진 팔레스타인 국가의 출현’을 ‘완전히 불구가 된 임시 팔레스타인 국가’로 전락시킴으로써,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2-3. 2004년 ‘부시 대통령의 편지’

부시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2003년 ‘로드맵’과 ‘로드맵 보류조항’을 재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로드맵’이 명시한 사항들을 실행하고, 무장 활동을 즉각 중지해야 하며, 어느 곳에서도 이스라엘인들에 대항하는 폭력 행위를 중지해야 하고,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테러에 대항하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고, 테러리스트들의 능력과 기반 시설을 분쇄해야 한다. 반면 이스라엘은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방어권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위협이나 위협 가능성에 대한 방어 능력을 강화시켜야 한다. 이스라엘은 가자와 서안 지역으로부터 철수하더라도, 안보를 위하여 영공, 수자원, 도로에 대한 통제권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현존하는 이스라엘인들의 중심지인 점령촌들을 포함하는 현실을 인정해야 하며, 분리 장벽도 팔레스타인인들의 테러 활동에 대항하는 안보의 차원에서 합리화될 수 있다.”


2-4. 2007년 아나폴리스 선언

2007년 11월27일 미국 아나폴리스에서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올메르트(Ehud Olmert)와 팔레스타인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가 참여한 중동평화 회의가 개최되었다. 12월12일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었고, 2008년 말까지 평화 협정을 맺기로 결정하였고, 이-팔 양 측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해결책인 2003년 로드맵을 이행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하였다.


아나 폴리스 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국경 획정, 예루살렘 주권,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 이스라엘 점령촌 철거 등을 협상 주제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에후드 올메르트와 외무장관인 치피 레브니(Tzipi Levni) 등 이스라엘 협상자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내놓은 위의 주제들을 비껴가는 ‘모호하고 느슨한 선언’ 채택을 제시한다. 이 선언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과 관련된 중요한 주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생략한 채, 단지 “평화적인 수단으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헌신한다”는 정도로 한정된다.
 
올메르트 총리는 지난 2007년 10월 7일 내각 회의에서 이 ‘모호하고, 느슨한 선언’은 다음 두 가지를 포함한다고 밝혔다. 첫 번째, 2003년 6월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와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총리가 합의한 ‘로드맵’의 첫 단계를 반드시 이행시키도록 한다. 두 번째, 2004년 6월 전임 아리엘 샤론 총리에게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편지로 보증한 내용을 실행한다.



  3. 미국 민주당 정부 중재안


3-1.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

 1978년 9월 미국의 카터 대통령(민주당)이 중재하고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리쿠드당)와 무함마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참가하여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캠프데이비드 협정이 맺어졌다. 이 협정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자치정부를 세운다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꾸어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라는 당면한 위기를 모면하였다. 캠프데이비드 협정 이후 ‘두 국가 건설’을 요구하는 국제 사회의 목소리는 한동안 사라졌다.


서안과 가자에서 ‘군대 재배치’, ‘강력한 지역 경찰 창설’, ‘지역 모든 주민의 자치 정부 수립’, ‘5년간 임시 기간 설정’ 등을 규정하였다. ‘서안과 가자의 최종 지위’와 ‘난민 문제’ 미결정, ‘점령촌 문제’와 ‘예루살렘 문제’ 등은 언급 없음, 팔레스타인 대표기구인 PLO 역할 없음.

사실,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임하는 이스라엘의 목표는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립을 저지하고, 서안과 가자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주권을 철저히 관철시키기 위한 토대를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캠프데이비드 협상을 준비하는 1977년 9월 25일 의회 연설에서 베긴 이스라엘 총리는 이 협상의 최종적인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5년의 임시 기간 후에 주권 문제를 결정할 것이고, 우리는 서안과 가자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강력히 주장할 것이다.
2. 주민 투표는 없다.
3. 어떤 상황에서도 팔레스타인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4. 이스라엘은 서안과 가자에서 점령촌 건설 사업을 강화할 것이다.
5. 예루살렘은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다.
6. 이스라엘 방위군은 서안과 가자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후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아랍 국가들, 팔레스타인인들과의 협상에서 협상자들은 계속 바뀌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측은 베긴이 1977년 의회에서 연설한 이 틀을 2008년 현재까지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3-2. 1979년 이스라엘/이집트 국경 획정 협정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국경을 다음과 같이 획정하였다. 이 이스라엘/이집트 평화 협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영토는 없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영구적인 경계는 이집트와 이전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승인된 국경이다. 양 측은 이 경계를 불가침의 경계로 인정한다. 양측은 수자원과 영공을 포함하는 상대방의 영토 보전을 존중한다.


3-3.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국경 획정 협정

7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민주당)이 중재한 워싱턴 회담에서 이스라엘 요르단 사이의 국경을 획정하였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국경은 위임 통치하의 경계선이다. 즉 요르단 강과 야르묵 강, 사해, 와디 아라바, 아까바 만이다. 이 국경은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영구적이고, 안정되고, 승인된 국경이다.


따라서 이 조약에서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위치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영토는 없다. 오직 이스라엘과 요르단 두 국가만 존재할 뿐이다. 요르단은 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서안을 이스라엘의 영토로 완전히 승인하였다.


결국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와 윌리암 클린턴 행정부가 중재한 1979년 이스라엘/이집트, 1994년 요르단 국경 획정 협정은 서안과 가자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를 무시하면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3-4. 1990s 오슬로 협정

1993년 9월 13일 워싱턴에서 이스라엘 정부의 시몬 페레스와 PLO의 마흐무드 압바스(2003년 4월 미국이 후원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임명한 팔레스타인 초대 총리)가 임시자치 정부 원칙 선언(Israeli-Palestinian Declaration of Principles on interim Self-Government Authority, DOP)에 서명하였고, 미국과 러시아 연방이 참관하였다. 이 협정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서안과 가자에 대한 이스라엘 국가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DOP의 어느 조항도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을 저지하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한다는 내용을 포함하지 않았다. 유엔 결의 242호안보리 결의 1항 영어 원문 ‘Withdrawal of Israel armed forces from territories occupied in the recent conflict’의 해석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측은 이집트와 1978년 캠프 데이비드 조약을 맺었을 때 이미 시나이 반도로부터 철군했기 때문에 서안과 가자 지구로부터 철군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오슬로 Ⅰ협정은(Gaza-Jericho Agrement) 1994년 5월 4일 미국, 러시아, 이집트의 입회하에 노동당 정부의 이츠하크 라빈과 팔레스타인 측 대표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에 의해서 카이로에서 서명되었다. 이 협정에서도 이스라엘은 점령촌, 군사 지역, 안보 문제들에 대하여는 계속해서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5항에 따르면,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이라 할지라도 점령촌, 군사기지와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권리를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다.


반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자치 지역 외곽에 대한 안보권조차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공격에 대해서도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치 지역은 외곽 지역으로 재배치된 이스라엘 군에 의해서 포위된 상태였다. 물론 팔레스타인 자치 당국은 외교권도 갖지 못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은 군 당국을 통해서 자치지역 내의 입법․사법․행정권을 계속해서 행사한다. 뿐만 아니라 이 조항은 법 적용에 있어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을 차별화시킴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인종 차별 행위를 합법화하였다.


오슬로Ⅱ 협정의 정식 명칭은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의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임시 협정(Interim Agreement on the West Bank and the Gaza Strip)’이다. 이 협정은 1995년 9월 28일에 워싱턴에서 이스라엘 정부와 PLO에 의해서 합의되었으며,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을 가자와 제리코 이외의 다른 서안 지역으로 확대하였다. 이 조약의 서명에는 미국, 러시아, 이집트, 요르단, 노르웨이, 유럽 연합이 참관하였다. 우선 오슬로Ⅱ가 목표하는 평화과정이 무엇인지 먼저 전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수 십 년 동안의 대결을 끝내고 평화적인 공존, 상호 존중, 안보 속에서 살기 위하여 상호의 합법적․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면서 …… 현재의 중동 평화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협상자들의 목적은 팔레스타인 임시자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 이 협정에 포함된 임시 자치 정부 합의는 전 평화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고, 최종 지위 협상들은 1996년 5월 4일 이전에 시작될 것이며, 안보리 결의 242호와 338호의 이행으로 귀결될 것이다 ……  이러한 합의들과 함께 팔레스타인인들이나 이스라엘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테러리즘, 폭력, 선동 행위들과 위협들에 대하여 직접적이며 유효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대처하도록 상호 약속한다.


이 협정의 전문은 평화적인 공존, 상호 존중, 안보를 말하고 있다. 이때는 1987년 12월에 시작된 인티파다의 끝자락이었다는 것이다. 이 인티파다가 전 세계에 알려짐으로써 이스라엘은 국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측으로부터 자신들의 합법성을 보장받을 필요가 절실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인티파다가 이스라엘 국가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여겨 인티파다라는 민중 항쟁을 통제할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정부’를 필요로 하였다. 이를 반영하듯 이 협정 체결 직후인 1995년 12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와 팔레스타인의 강력한 이슬람 무장 저항 단체인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공격을 중단하겠다는 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결국 1996년 1월에 자치 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고, 동시에 1987년부터 거의 10년 동안 지속된 인티파다는 마침내 종결되었다.


이 협정 전문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테러리즘, 폭력, 선동 행위와 위협’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대처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테러리즘, 폭력, 선동 행위와 위협’은 바로 1987년부터 시작된 인티파다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정식 국가이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물리적 조치는 군사 작전이 되며, 이러한 군사 작전은 안보를 위한 차원이므로 테러로 분류되지 않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은 국가도 없고, 군대도 없고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이들의 행위는 ‘테러’로 분류되는 것이다. 오슬로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경찰이 수립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이스라엘에 대항해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 불순 세력들’을 제압하는 데 활용하도록 되어있었다. 따라서 전문의 내용은 팔레스타인인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이스라엘 안보 위협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제거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입장에서 이 자치 정부는 국가의 형태를 취할 필요가 없었으며,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불순한 팔레스타인인들을 통제할 정도로만 강력하면 되었다. 이 협정에서 규정하는 팔레스타인 경찰의 역할이란 일종의 커다란 감옥 안의 간수의 역할과 비슷하게 보인다.


이 협정은 외부 안보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인들의 총체적인 안보에 대한 책임은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수행할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자치 지역 내의 점령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이 그 보안권을 확고하게 행사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 서안에 산재해 있는 이스라엘의 점령촌은 안보라는 구실로 이스라엘 군대가 계속해서 그 지역에 머무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으며, 정착민 보호를 위하여 점령지내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주둔하는 것은 합법적이다.


11항은 서안을 다음과 같이 세 영역들로 분할하였다. A 지역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행정과 보안을 완전하게 관할하는 곳으로 서안의 2%를 차지한다. B 지역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행정 관할 영역이지만 보안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협력하는 지역으로 서안의 26%를 차지한다. C 지역은 이스라엘이 완전하게 행정과 보안을 통제하는 지역으로 서안의 72%에 해당하며, 이곳이 바로 협상의 대상이었다. 또 오슬로 협상자들은 사실상 C 지역에서 다수의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존재와 투자를 합법화시킴으로서 이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 협상자들은 A 지역과 B지역에 있는 이스라엘의 재산권에 도전하지 않기로 다음과 같이 양보하였다.


16항(3) :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의회의 관할 하에 있는 지역에 위치한 이스라엘 정부와 이스라엘 부재지주의 합법적인 권리(이스라엘인들이 소유한 회사들을 포함)를 존중해야한다.
22(3)항 :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의회의 관할 지역에 있는 토지에 관한 이스라엘인들의 합법적 권리(이스라엘인들이 소유한 회사들을 포함)를 존중해야한다.


그러나 C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합법적 권리와 재산을 존중하겠다는 이스라엘 정부의 약속은 전혀 없었다. 이렇게 불균형하게 팔레스타인이 양보한 결과로서, 이스라엘 정부는 오슬로 과정 동안에 비군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수십 ㎢에 이르는 점령지의 영토를 전유하였다. 이 협상 이후에 이스라엘은 ‘영토와 평화의 교환’으로 서안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하여 마치 자신들이 역사적인 양보를 한 것처럼 선전하였으나, 당시 이스라엘이 이 영토를 합법적으로 소유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슬로 팔레스타인 협상자들이 C 지역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는 오슬로Ⅱ에 동의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은 서안의 대부분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배권을 승인하였으며, 점령촌 팽창을 중지시킬 가능성마저도 없어져 버렸다. 협상 기간 동안 서안과 동예루살렘에서 점령민들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990년 초에 약 20만 명에서 2000년에는 약 40만 명으로 약 두 배가 되었다.



  4.  오바마 시대의 이-팔 협상 전망


4-1. 오바마의 AIPAC 연설: 이스라엘 안보는 신성불가침

 오바마는 지난 6월 선거 운동 과정에서 미국-이스라엘 공공업무 위원회(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에서 연설하였다. 이 연설에서, 오바마는 “이스라엘의 안보는 신성불가침이고, 협상 대상이 아니다. 미국-이스라엘 동맹은 공동의 이익과 민주주의라는 공동의 가치에 근거하며,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것은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다.”라고 공언하면서, 가자를 통치하는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는 이란이 이스라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오바마는 가자(하마스)에서부터 테헤란(이란)까지 그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미국-이스라엘의 방위 협력이 강화되어야하며, 이를 위하여 대통령으로서 10년 이내에 3백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제공하기 위한 양해각서를 이스라엘과 체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보를 위해서 중동 최강의 군대를 보유한 이스라엘에게 3백억 달러를 지원한다는 이 제안의 의미는 미국이 이스라엘의 군국주의화를 심화시키는 것으로 예상된다. 이 계획은 이스라엘을 더욱 견고한 군사 요새로 변형시키고, 주변 중동 국가들의 무장화를 급격히 부추기면서, 결국은 이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과 이익을 극대화시킬 것이다. AIPAC는 1950년에 창설된 친 이스라엘 조직이다. 뉴욕 타임지에 따르면, AIPAC는 이스라엘과 미국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중요한 조직이며, 10만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 조직은 미국의 주요한 친 이스라엘 로비를 주도하며 2008년에는 단독으로 24억 2천만 달러의 군사원조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 정책을 위하여 이스라엘에게 제공하였다.

AIPAC 연설 도중 오바마는 시오니스트들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주제어인 ‘홀로코스트’를 언급하면서, 2차 세계대전에서 외할아버지의 형제들이 6백 만 명을 학살한 악마 나찌와 대결해서 싸웠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아프리카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자신의 생애가 세계 각지를 떠돌았던 유대인들의 그것과 유사하다며, 고향 땅을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세운 시오니스트들의 꿈에 깊은 공감을 표명하였다. 그는 시오니스트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창설한 것은 정당하고, 필수 불가결하였으며, 수십 년 동안 투쟁한 성과라고 평가하였다. 이스라엘 국가 창설 60년이 지난 오늘날 이 투쟁을 완화시킬 수 없으며, 포기할 수도 없고, 대통령으로서 자신은 이스라엘의 안보 문제에 관한한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약하였다. 


4-2. 오바마의 이스라엘 방문: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테러리스트 하마스

오바마는 지난 7월 24일 이스라엘 방문 당시 예루살렘에 위치한 시오니즘의 상징물인 홀로코스트 기념관(Yad Vashem), 통곡의 벽(Wailing Wall)을 방문하였다.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홀로코스트로 희생되었다고 알려진 6백 만 명의 유대인 희생자들을 기념하여 1953년에 예루살렘에 건설되었다. 통곡의 벽은 이스라엘 국가 건설의 이념적 토대인 시오니즘의 근거를 제공한다. 시오니스트들의 주장은 이 벽이 예루살렘 구도시가 고대 다윗왕의 성전 터였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오바마는 유세 기간 중 “예루살렘은 분할될 수 없으며, 이스라엘의 수도다.”라고 거듭 주장하였다.


같은 날 그는 가자 인근에 위치하여 하마스의 로켓 공격을 받는 스데로트(Sderot) 이스라엘 점령촌을 방문하였다. 스데로트 점령촌은 가자를 통치하고 있는 하마스의 로켓포 공격을 계속해서 받고 있는 지역으로 2001년 이후 13명의 정착민들이 하마스의 로켓포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스데로트 점령촌 기자회견에서 오바마는 “나는 이스라엘의 안보를 확약하기 위해서 스데로트에 왔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가 있고, 평화가 안보를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 자국의 시민들 머리 위로 로켓이 떨어지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국가는 없다. 국가의 첫 번째 임무는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내 두 딸이 자고 있는 집으로 로켓을 발사한다면, 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것을 막을 것이다. 이스라엘인들도 이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오마바의 주장은 이곳을 로켓으로 공격하는 하마스를 테러리스트 단체로 규정한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과 조지 부시 행정부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관한한 오바마의 전략이나 목표는 부시 행정부의 그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를 뒷받침하듯 오바마는 이스라엘 국가 정책의 정당성을 이념적으로 현실적으로 뒷받침하는 세 지역들, 홀로코스트 기념관, 통곡의 벽, 스데로트 이스라엘 점령촌 방문한 반면, 팔레스타인 관계 지역은 단 한 군데도 방문하지 않음으로써 이스라엘 국가 건설 이후 계속되어온 미국의 이스라엘 편향 정책을 명백히 드러냈다.


오바마는 유세 기간 중 “이스라엘은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고, 진실한 친구 이며, 중동에서 유일하게 민주적인 국가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것은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중동 정책의 출발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확고한 지지와 연대 의사를 여러 번에 걸쳐 확인하였다. 반면, 그는 압도적인 화력을 사용하면서 매일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 민간인 살상과 팔레스타인인 영토 강탈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팔레스타인인을 언급한 경우는 이스라엘의 안보 논리를 합리화시키는 불가피한 배경으로써 ‘이스라엘의 존재를 위협한다고 알려진 하마스’뿐이었다. 오바마의 눈에는 하마스 이외에 다른 팔레스타인인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하마스의 공격을 받은 가자 근처의 스데로트 이스라엘 점령촌을 방문하여 하마스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이란, 하마스,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위협을 거듭 주장하면서, 이란이 테러리즘 후원 세력이며,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4-3. 이/팔 분쟁의 주요 주제들 회피

2003년 미국을 비롯한 유엔, EU, 러시아가 후원한 로드맵 협상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게 무장단체 해체를 요구했다. 이스라엘 의회는  로드맵을 통과시키면서 하마스를 해체되어야 할 대표적인 테러리스트 단체로 지목했다. 이후 2004년 3월 22일 하마스 최고 자도자인 아흐마드 야신이 이스라엘의 표적 공격으로 살해되었고, 같은 해 4월 17일 야신의 뒤를 이은 압둘 아지즈 란티시 하마스 최고 지도자 역시 이스라엘의 표적 공격으로 살해됐다. 현재 하마스 최고 지도자 칼리드 마샬은 시리아에 망명 중이다.   2008년 11월 9일 가자를 통치하고 있는 이스마일 하니야 하마스 지도자는 가자를 방문 중인 EU의회 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 “하마스 정부는 이스라엘과의 장기 휴전을 원하며, 1967년 경계 내에서 수립되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기꺼이 수용해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 제안을 거부했다. 우리는 유대인들과 분쟁 중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당면 문제는 이스라엘의 점령 상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의해 가자는 포위당하고, 서안은 점령당해 있다.”라고 밝혔다. 하마스가 2006년 의회 선거 이후 일관되게 제시하는 협상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현 이스라엘 국가 영역을 제외한 1967년 6월 전쟁 이전의 휴전선(1948년 전쟁의 결과 만들어진 휴전선)으로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국경획정, 이스라엘 점령촌의 완전한 철거, 동 예루살렘의 주권, 1948년 점령된 땅(현 이스라엘 국가 영역)으로부터 추방된 난민을 포함하는 500만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9천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감옥의 수감자 석방, 이스라엘 군의 완전한 철수.

그러나 현실적으로 하마스가 내세우는 주제들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 주제들을 1991년 마드리드 국제 대회에서 이미 파타 소속의 팔레스타인 대표들인 하이다르 압둘 사피와 파이잘 후세이니 등이 이미 제안한 내용(1949년 제네바 협정 적용)과 거의 일치한다. 마드리드 회의팔레스타인 대표들은 과도 협정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면서 분쟁의 최종적인 해결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제안을 즉각 거부하였고, 1993년 하이다르 압둘 사피와 파이잘 후세이니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협상자들을 마흐무드 압바스와 야세르 아라파트로 대체하였다. 이 새로운 팔레스타인 협상자들이 과도 협정의 개념을 수용하면서 이스라엘과 오슬로 협상을 시작하였고, 점령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배권을 승인하면서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하였다.


자치정부/이스라엘 협상의 최후 국면인 2000년 캠프데이비드 최종 지위 협상에서 미국 민주당 정부 대통령 빌 클린턴(Bill Clinton), 이스라엘 노동당 총리 에후드 바락(Ehud Barak),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야세르 아라파트가 참가하여, ‘국경 획정, 예루살렘 주권, 난민 귀환권, 팔레스타인 영공 통제권, 팔레스타인 영토에 이스라엘군 재배치권, 요르단 계곡에 국제군 주둔, 비무장 팔레스타인 국가’ 등을 논의하였으나, 최종적으로 타협점을 찾는데 실패하였다. 


현재 오바마 정부에서 중동 정책을 주도할 인사들은 이전에 클린턴 정부에서 오슬로 협상과 캠프데이비드 협상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경험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에 클린턴 민주당 행정부가 주도한 협상들은 부시 공화당 행정부에서도 2003년 로드맵 등으로 연속성을 가지고 진행되어 왔다. 오마마 민주당 행정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해로운 해법을 내놓기 보다는 기존의 로드맵의 틀에서 분쟁 해결을 위한 몸짓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위의 협상들과 마찬가지로 오바마 시대의 협상도 ‘국경 획정, 예루살렘 주권, 난민 귀환권, 점령촌 철거, 이스라엘군 철수 등을 포함하는 이/팔 분쟁의 주요 주제들을 회피’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해결 방안을 제시하기는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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