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국제분쟁 2011-09-15   2804

[언론기획①] 테러와의 전쟁, 독재자들에게 지급된 ‘백지수표’

‘테러와의 전쟁’, 독재자들에게 지급된 ‘백지수표’

 [아시아의 ‘관타나모’]<상> 후퇴하는 민주주의

 9.11 테러 10주년을 맞아 프레시안과 참여연대가 공동 기획한 ‘아시아의 관타나모’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3차례에 걸쳐 진행될 이 연재는 ‘아시아’에 초점을 맞춰 미국이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이 아시아 각국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파괴했는지 집중 조명할 예정입니다. 15일 발행될 <중>편에서는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각국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16일 <하>편에서는 한국의 상황을 점검합니다. <편집자>

전장이 된 아시아 후퇴하는 민주주의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언론들이 9.11 테러 10년을 조명하고 있다. 이 비극적인 테러가 발생한 이후 세상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10년 동안의 전쟁으로 지구촌이 안전해지기 보다는 더욱 위험해졌고, 이대로라면 살상과 보복의 역사는 쉽사리 종식되지 못할 것이라는 게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10년이라는 세월은 9.11이라는 비극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성찰해서 또 다른 비극을 예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9.11 직후 감행된 테러와의 전쟁은 수많은 민중을 희생시키거나, 결코 치유될 수도 회복할 수도 없는 상황에 빠뜨렸다. 개인의 인권을 쉽사리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각종 통제시스템도 구축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테러와의 전쟁이 곳곳에서 수행되고 있는 전장, 아시아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혹독한 인권유린과 민주주의 퇴보는 비단 대규모 살상이 벌어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만의 사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과거 각국 정부들은 테러에 대응하면서 ‘전쟁'(war)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독일의 적군파, 아일랜드 IRA, 스페인의 바스크 조국과 자유,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 등을 상대로 싸우면서 이들 정부들은 ‘안보 조치'(security measures) 혹은 ‘치안 활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반면 9.11 직후 부시 행정부와 미국 언론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그 이유와 함의는 무엇일까.


부시 행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전 지구적 비상사태, 혹은 전 지구적 예외상태에 돌입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미국을 ‘희생자’로 말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방식이 되었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압도적 권리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것은 9.11 테러 직후 애국자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이 법에 의하면 미국의 법무장관은 미국의 안보위협 활동의 혐의가 있는 모든 외국인을 구금할 수 있다. 한 개인의 법적 지위를 철저히 제거하였고, 법적으로 명명할 수 없고 분류할 수 없는 존재를 만들어냈다.


이는 9.11 이후 제정된 반테러법의 기본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상황에서는 법적인 존재인 개인에 대한 그 어떠한 법적 보호도 부정되는 것이다. 법적 지위를 제거함으로써 개인을 안보기관의 구금이나 혹은 구금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고문당하거나 살해될 수 있는 하나의 생물학적인 존재로 격하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관타나모에 구금된 사람들은 제네바 협정에서 규정하고 있는 전쟁포로의 자격을 박탈당할 뿐만 아니라, 미국 국내법에 따라 범죄 혐의가 있는 피기소인의 자격조차도 갖지 않는다. 이들은 그저 ‘피구금자’일 뿐이다. 나치 캠프에서 유대인들이 처했던 법적 상황과 유사한 것이다.


또한 테러와의 전쟁은 한 패권국가가 다른 국가가 아닌, 얼굴 없는 비국가적 행위자에게 선포된 새로운 종류의 전쟁이다. 이는 ‘세계대전'(world war)이 아니라 ‘전 지구적'(global) 전쟁이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이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도, 이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외교와 국제법 그리고 법적·도덕적 인권체제가 미국이라는 테러의 ‘희생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 전쟁이 언제 완전히 끝날지, 승리나 패배의 기준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한마디로, 테러와의 전쟁은 전 지구적인 전쟁이고 무한 전쟁이다.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테러와의 전쟁도 공포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공포는 사람들 간의, 공동체와 국가 간의 신뢰와 이해를 파괴하며, 그 결과 자연스럽게 폭력과 분쟁을 낳는다. 또한 공포는 이성적인 분석을 약화시킨다. ‘우리’ 혹은 ‘동지’가 아니면 ‘적’이 되고, 문제가 되는 행동을 유발한 원인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공포는 갈등을 예방하기 위한 이해와 분석, 설득의 가능성을 포기하도록 한다. 그리고 공포에 기반한 허위 정보가 대량으로 생산된다.


또한 전 지구적 전쟁은 ‘테러리스트’에 대한 국내 전쟁으로 전환시켰다. 전 지구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은 쉽게 일치되었다. 권위주의와 독재에 대한 대중적 저항은 국가에 의해 안보위협으로 묘사되었다. 안보기관의 개입과 관련된 법과 규정이 변경되면서 순수한 민주적·정치적 저항과 범죄성 폭력 사이의 구분도 흐려졌다. 테러와의 전쟁의 시공간적 제약이 없어지면서 ‘테러리즘’도 폭넓게 정의되었고, 그 적용 범위도 확대된 것이다. 어떤 이의제기나 정치적 저항까지도 테러로 규정하기가 쉬워졌다. 본질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은 반대자들을 억압하고자 하는 국내 정치의 수단이 되었다.

테러용의자로 구금된 인도네시아인들
▲ 테러용의자로 구금된 인도네시아인들 ⓒ뉴시스


테러와의 전쟁과 아시아 민주주의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반테러법에 의한 개인의 법적 지위의 변화는 아시아에서 시민권, 인권이 훼손되고 있는 정도를 알 수 있게 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 아시아 지역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국가들은 테러에 맞서 싸운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비민주적인 행위와 법들을 정당화할 기회를 잡았다. 많은 나라에서 시민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용의자들을 장기간 구금하고, 그들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재판을 받을 권리’를 부정하며, 마음대로 감청할 수 있는 감시체계를 도입할 수 있는 대폭적인 권한이 정부에 부여되었다.

자기결정권 운동은 테러리스트 네트워크로 간주되어 불법화되고, 반체제인사들은 테러리스트로 낙인이 찍혀 구금되고 고문을 당하며, 집회 표현 결사의 자유를 행사하는 합법적인 활동들도 국가안보라는 명목으로 제약당했다.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인종 프로파일링이 만연해지고, 전화선과 이메일, 우편물은 국가 안보기관에 의해 일상적인 감시와 검열을 당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런 일들은, 인권 상황이 열악하다고 알려진 나라들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자유롭고 민주적이라 여겨지는 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9.11 10년을 맞아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SDMA)가 조만간 발간할 <전장이 된 아시아, 후퇴한 민주주의> 백서 초안은 아시아 14개 국가에서 테러와의 전쟁이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에 얼마나 막대한 퇴보를 가져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아시아 지역 국가 중 기존에 테러활동이 있었던 일부 국가 즉 스리랑카, 파키스탄,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9.11 이전부터 반테러법이 존재했었지만, 9.11 이후 대다수 아시아 국가에서 자치 및 분리독립 운동, 반정부세력,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각종 반테러법과 국가보안법들을 제정했거나 강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 국가들은 반테러법을 비롯한 각종 입법조치나 정책들을 통해 테러리즘을 광범위하게 규정하고, 정부에게 폭넓은 자의적 통제권한을 부여했다. 대개의 경우 국가로 하여금 필요할 경우 일반 법률을 무시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수정조항들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구체적인 사례로 네팔의 2002년 테러리스트와 교란행위 예방 및 통제법(Terrorist and Disruptive Activities (Prevention and Control) Act, TADA), 인도네시아의 2003년 테러리즘 범죄근절에 관한 법(the Law No.15/2003 on Eradication of Terrorism Crime), 필리핀의 2007년 인간안보법(the Human Security Act, HSA), 인도의 2002년 테러방지법(the Prevention of Terrorism Act, POTA), 방글라데시의 2009년 반테러법(the Anti-Terrorism Act, ATA), 2002년 돈세탁방지법(Money Laundering Prevention Act), 스리랑카의 2005년 테러리스트 자금 조달 억제에 관한 법(The Convention on the Suppression of Terrorist Financing Act)과 2006년 돈세탁방지법(The Prevention of Money Laundering Act)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반테러 관련 법과 조치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 테러리즘을 애매모호하고 폭넓게 정의한다. 예를 들어, 스리랑카의 1979년 테러예방법(The Prevention of Terrorism Act, PTA)은 테러리즘에 대한 정의가 법안에 없다.
– 견제와 균형의 원칙 없이 정부와 안보 기관에 폭넓은 권한을 부여한다. 법안에는 안보 기관이 테러리스트 행위와 관련될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구속, 구금, 취조할 수 있는 권한, 적절한 사법 심사에 대한 권리를 무시하고 오랜 기간 개인을 구금할 수 있는 권한, 압수수색할 수 있는 권한, 이들의 의사소통을 가로 막을 권한, 용의자들을 감시할 수 있는 권한 등을 부여한다.
–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정당한 법 절차에 대한 권리를 부인한다.
– 사형, 무기 징역, 그리고 추방과 같은 가혹한 처벌을 부여한다.
– 안보 기관들에 면책 특권을 부여한다.
– 모든 법률은 그 어떤 공적인 협의나 참여 없이 공표되었다.
– 종교나 정치적 신념을 근거로 개인이 표적이 되고 기소될 수 있다.
– 동기보다는 의도를 강조하고 있다.
– 실제 폭력을 행사할 그 어떤 의도와도 거리가 먼 행동들을 범죄시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각국 정부가 새롭게 정당성을 부여한 법들도 다수 존재한다. 대표적인 사례들로, 스리랑카의 1947년 공공안전조례(the Public Security Ordinance, PSO)와 1979년 테러예방법(the Prevention of Terrorism Act, PTA) 제정, 파키스탄의 1952년 파키스탄안보법(the Security of Pakistan Act), 1960년 공공질서유지조례(Maintenance of Public Order Ordinance), 1997년 반테러법(the Anti-Terrorism Act, ATA) 제정, 인도의 1958년 군인특별권한법(the Armed Forces Special Powers Act, AFSPA), 1967년 불법행위방지법(the Unlawful Activities Prevention Act, UAPA) 제정,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1960년 국내보안법(the Internal Security Act, ISA) 제정, 그리고 한국의 경우 1948년 국가보안법(the National Security Act, NSA) 제정, 태국의 2005년 비상사태법령(the Emergency Decree), 2007년 컴퓨터범죄법(the Computer Crime Act) 제정 등을 들 수 있다.

태국과 파키스탄의 예방구금(재판 없는 구금),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통제 명령(control orders), 필리핀, 인도네시아,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영장 없는 수색, 그리고 신속하고 장기간에 걸친 구금과 같은 정상적인 형사 절차를 우회할 수 있는 조항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법률 중 다수가 테러 단체로 간주되는 조직을 금지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정부에 부여하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와 같이, 어떤 조항들은 테러 단체와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자들에게 사형 선고를 허용하고, 용의자를 장기간 기소 없이 혹은 변호사 접근이 차단된 상태에서 구금하도록 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가혹하기로 유명한 군인특별권한법(Armed Forces Special Powers Act of 1958)이 이제 카시미르와 북동부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물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와 숲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2009년 반테러법 도입 이후 언론인, 인권옹호자, 정치 활동가 수백명이 이 조잡한 법에 따라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고 기소되고 있다. 태국 정부는 빠따니 지역에서 분리,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대를 배치하고, 정부 후원 하에 살인과 고문, 구금을 자행하였다. 인권운동가들 역시 실종 등 위협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아시아 지역의 각종 반테러조치들에 대해 서방 국가들은 종종 ‘안보지원'(security assistance)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무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파키스탄에서는 서구의 무인항공기 폭격으로 실종된 사람들의 숫자가 매일같이 늘어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북쪽의 좌파 게릴라 운동과 남쪽의 자결권 운동이 똑같이 국가의 탄압에 직면하였다. 자결권 획득을 목표로 하는 남부 모로(Southern Moro) 운동은 미군의 지원을 받은 아로요 정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되었다.

이렇듯 테러와의 전쟁 직후 취해진 반테러법 제정과 정책들이 오·남용되면서 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전은 더욱 멀어졌다. 오랜 기간 어렵게 쌓아올린 아시아 각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보호체계도 현격하게 허물어져 버렸다. 9.11 이후 등장한 전 지구적 정치‧사법 질서는 아시아 각국의 정치적‧사법적 환경을 바꾸었고, 그 결과 아시아 시민사회는 비국가적 테러행위자보다 국가테러, 국가폭력이라는 거대한 억압체계에 직면하고 있다.

* 이 글은 5.18 광주 아시아 포럼 ‘테러와의 전쟁과 아시아 민주주의’ 기조발제자 파하드 마즈하르 (UBINIG, 방글라데시) 얍 스웨싱(Forum-Asia) 요약문을 참고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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