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칼럼(pd) 2007-03-06   1150

<안국동窓> ‘영웅론’을 부르는 국가주의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미공군기지 위병소 앞에서 한국군 다산부대 소속 통역병 윤장호 하사가 아프간 무슬림전사의 자폭공격을 받고 사망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머리 속 생각보다는 며칠 후 징병신체검사를 받게 되는 스무 살짜리 아들을 하나 두고 있는 보통 아버지 중의 한 사람으로서 생리적 아픔이 먼저 저릿하게 고개를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왜 하필 그 한 명이 너여야 했느냐’던 윤 하사 부모의 절규가 무엇보다 절실하게 다가왔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베트남 전 종전 이후 한국군의 외국에서의 첫 전사 사례라고 하는 윤 하사의 안타까운 죽음을 두고 지난 일주일 동안 많은 말들이 있었다. 미국 유학파 엘리트 청년의 죽음 자체를 안타까워하는 말들, 해외파견 한국군부대의 안전대책 미흡을 성토하는 말들, 위기지역에서의 조기철군을 주장하는 말들…. 해외 파견병력의 전면철수를 주장하는 견해도 적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애도의 분위기 속에서 파병의 불가피성은 수용하되 기본적으로 비전투병력인 해외 파견 한국군의 안전이 위협을 받는 상황은 있어서는 안 되고 그럴 경우 철군을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 여론의 큰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큰 흐름 속에서 애국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목소리들도 적지 않게 들려오고 있었다. 우선 윤 하사를 영웅시하는 상당수의 네티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아프가니스탄 파견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군 입대 자체를 피할 수도 있었던 그가 아프가니스탄 근무를 자원했다가 불의의 죽음을 당했으니 그는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조국의 부름을 받아 목숨을 바친’ 영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부 네티즌들의 분위기 위에서 한 신문은 이를 공교롭게 같은 시기에 자이툰 부대 소속으로 이라크에 자원 파견되는 몇몇 고위층 자제들의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쥬’적 실천과 한데 묶어서 미화하기에 이른다.

물론 윤 하사가 이런저런 핑계로 병역을 기피하거나 입대를 하더라도 편안한 특기와 근무처만 찾아가는 특권・고위층 자제들이나 유학생들과 비교할 때 ‘윤리적으로’ 올바른 청년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으며 이를 조금 과장해서 ‘영웅’이라 부르는 것도 고인을 추모하는 뜻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 ‘조국의 부름을 받고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는 데에 이르면 그것은 설사 수사학적 과장이라 할지라도 문제가 있다. 그것이 병역은 국민의 국가에 대한 신성한 의무이고 국가가 요구하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는 생각이라면 그것은 위험한 것이다. 거기엔 국가가 개인보다 언제나 우선한다는 국가주의적 사고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이성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국가가 보편타당한 인류적 감각에 비추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올바르지 못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보다 더 많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사회의 구성원들은 늘 국가의 정책과 노선을 감시하고 견제하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국가의 판단이 그른 것이 분명한데도 그 판단에 따라 자신을 희생한다면 그는 현명한 국민, 바른 시민이 아니라 일개 노예적 신민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윤하사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부에서 일고 있는 ‘영웅론’에는 국가와 그 구성원 사이의 이런 이성적이고 민주적 관계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짚어두고 싶은 것이 있다. 흔히 병역의 의무를 국민의 절대의무로서 신성시하고 있는데 이른바 병역과 관련된 헌법상의 국민적 의무라는 것은 ‘국방・교육・ 근로・납세의 의무’ 중의 하나인 국방의 의무이지 병역의 의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병역의 의무는 국방의 의무의 한 하위 범주일 뿐이라는 것이다. 국민은 국가가 외침에 의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병역에 복무하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수단과 노력을 동원하여 국가를 방어할 의무가 있지만, 그것이 곧 병역의 의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 병역의 의무는 국방의 의무와 배치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일 수도 있지만 국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면서 국민에게 병역을 강제하고, 그 침략전쟁으로 말미암아 거꾸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그때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국가를 지키는 국방의 의무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나라를 지킨다’는 범위를 벗어나 외국에 군대를 보낸다는 것은 그 어떤 명분을 갖다 붙인다 해도 ‘국방의 의무’와는 무관한 일이다. 또 다른 한 신문은 우리가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이만큼 컸고, 세계시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해외파병은 불가피하다고 강변하면서 역시 윤 하사를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애국청년’이라 부르고 있다. 국제사회에 진 빚을 갚는 것도 좋고 세계시장을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파병 이외에, 그것도 미국이 저지른 아름답지 못한 전쟁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한 파병이라는 방식 이외에 그러한 국제적 기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그 신문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면, 우리는 정말로 전쟁을 원하지 않는 나라이고 평화를 원하는 민족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다시 생각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냉전적 적대의식 속에서 수십년 째 60만 대군을 유지해 오고 전체 GDP 대비 3%에 육박하는 예산을 군사력의 유지 강화에 쏟아 부어 오는 동안, 우리사회는 알게 모르게 평화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냉전체제의 해체와 남북간 긴장완화로 국방상 위험요소가 분명히 줄어들고 있는데도 여전히 군사력 강화는 절대과제이며,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명분으로 이젠 어느새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8개국에 2500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군사력 수출국이 되어 있는 것이다. 군사력은 어느 정도 이상 팽창하면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평화와 대립하게 되어 있다. 군사력을 외침으로부터 국가사회의 안녕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수준으로만 유지하고 그 필요량을 부단히 줄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군사력은 팽창하고 팽창한 군사력은 속성상 전쟁이나 그에 준하는 위기상황을 늘 요구하게 되어 결국 평화를 위협하게 된다.

과연 한국은 이러한 군사력 중독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인가? 불행히도 내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군사력 절대주의적 사회분위기는 거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평화적이고 적대적인 세계인식과 폭력숭상의 문화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윤 하사의 선임병으로 아프가니스탄 다산부대에 근무했던 한 청년이 한 일간지 기고에서 술회한 대로 우리는 오래 전부터 ‘무력과 호전성과 전쟁과 침략을 정당화하고 당연시’하는 사회 분위기에 젖어 왔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군대를 양성해 왔다. 이런 사회는 여전히 불안하고 위험하다. 평화적이지 않다.

평화는 무력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사회, 평화가 최고의 가치가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통해서 지켜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구성원 간에 이런 합의를 공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기는커녕 국익의 이름 아래, 국가주의의 그림자 아래 이런 합의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윤 하사라 불리는 한 청년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숭고하고 영웅적인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다.

윤 하사의 죽음은 그가 아프가니스탄 근무를 자원했기 때문에 더 안타깝고 억울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에게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 길로 가서는 안 된다고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가 스물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에게 그것은 세계평화의 길도, 애국의 길도, 효도의 길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못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교육과 문화가 그로 하여금 억울하고 허망한 죽음의 길로 향하게 했다. 며칠 뒤면 징병검사를 받고 한두 해 내로 입대하게 될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아들과 같은 세대의 한 청년에게 억울한 죽음의 길을 자원하도록 방치한 후회가 가슴을 친 지난 일주일이었다.

* 이 글은 프레시안 (2007. 3. 6)에 실린 칼럼으로 필자의 양해를 구해 올립니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 황해문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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