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3-03-15   1055

[분쟁지역현황] 북한

일반

  • 수도 : 평양
  • 위치 : 아시아 한반도, 북으로는 중국과 러시아 연방과 인접, 남으로는 남한과 인접
  • 면적 : 12만 2762㎢
  • 인구 : 2320만명(2000)
  • 인구밀도 : 176.7명/㎢(2000)
  • 수도 : 평양
  • 정치체제 : 공화제
  • 공용어 : 한국어
  • 통화 : 원
  • 환율 : 46.98원 = 1달러(2000.10)
  • 1인당 국민총생산 : 706달러
  • 종교 : 공식적인 종교 없음
  • 기후 : 매우 덥고 집중호우가 발생하는 여름과 눈과 서리가 잦은 혹독한 추위의 겨울
  • 지형 : 주로 언덕과 산 사이에 좁고 깊은 계곡이 형성, 서부지역에 넓은 해안평야지대
  • 생산농축산물 : 쌀, 옥수수, 감자, 대두콩, 콩, 소, 돼지, 계란 등
  • 추수기간 : 6~10월
  • 농업종사인구 : 남성전체의 34.9% 여성전체의 42%
  • 영양부실인구 : 전체의 57%
  • 유아 사망률: 1000명당 39명
  • 산모 사망률: 1000명당 35명
  • 예상 수명 : 남 62.5세 여 68세
  • 식수접근권 : 100%

정치

한반도의 역사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지정학적 위치에 의해 형성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자, 1945년 무장 해제를 위해 소련 군대는 한반도의 북측을, 미국 군대는 남측에 들어섰다. 1948년 서울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대한민국’이 형성되었고, 평양에서는 김일성(소련의 후원을 받고, 反일 지도자로써 첫 수상이 되었다.)을 주축으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세워졌다. 김일성은 1972년에 주석이 되었다.

1950년 6월, 북한은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해 무장한 군대를 앞세워 남한을 침범했다. 중국군대는 미국이 이끄는 유엔의 군대를 대항하기 위해서 북한군에 합류했다. 1953년 7월 한국전쟁은 휴전협정에 의해 종식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2개의 한국으로 분열되어 있다.

1960-70년대 중국과 소련의 분쟁이 계속되는 동안, 북한은 모스크바와 베이징 사이에서 동일한 거리를 유지하였으나, 나중에 모스크바 쪽으로 기울었다. 1980년대 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공산권 동유럽뿐 아니라 소연방 자신의 분열마저 촉진시킴에 따라 김일성은 다시 베이징 쪽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내부 분열에 대한 1989년의 숙청작업후에 강경 정책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1994년 3월, 유엔 핵전문가들은 북한지역 2개의 주요 핵사찰지역에서의 감시가 거부당함으로 인해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국제적인 의구심을 제기하였다. 6월까지 미국과 서울은 사찰지역에 대한 감시를 감행하기 위해 북한에 대한 경제적인 조치를 취하려고 하였다. 김일성은 북한을 방문한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에게 타협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함으로써 몇 달간의 혼란의 시기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김일성은 1994년 7월에 죽었고, 그의 권력은 그의 아들인 김정일에게 승계되었다. 경제가 혼란에 빠지게 되자, 김정일은 기름과 더 안전한 핵발전소의 건설을 조건으로 북한의 핵사찰지역에 대한 국제적인 감시를 허락하는 계약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2년동안 계속된 홍수로 인해 거의 기근에 가까운 상태를 야기시켰으며, 이는 김정일을 안심시켜 주지 못했고 이로 인해 북한은 국제적인 식량 보조를 예기치 않게 요청하게 되었다. 북한은 전체 식량의 반정도만 주민들의 식량으로 공급될 수 있었음을 시인했고, 구호 기관들은 일부 영세 농민(혹은 소작농)들은 살아남기 위해 잡초를 먹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때 이후로, 미국은 유엔의 북한 지원 WFP프로그램의 가장 큰 기부자가 되었다. 식량 보조 관리들은 1995년 이래 200만이나 되는 북한 주민들(인구의 거의 10%)이 영양결핍과 이와 유관한 질병으로 죽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구호기관들의 실제 식량보조를 받는 사람들과의 접촉이 거부되었고, 한국인 사용자들을 고용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독립적인 평가를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거의 기근에 가까운 상태 때문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중국의 북쪽 국경 지대를 따라 도망치고 있다. 미국 난민 위원회(Committee for Refugees)는 2001년 말 5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중국에 있고, 북한내부에도 10만 명의 난민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평양은 2000년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일련의 회담을 유지하면서, 이태리와 호주와의 관계를 재개하는 외교적 공격을 시작하였다. 김정일은 베이징을 갑작스럽게 방문하여 그의 정치가로서의 신임을 더욱 굳게 다졌다. 이는 김정일이 지도자가 된 후 처음으로 있은 공식 외국 방문이었다.

6월 평양에서 김정일과 남측의 대통령 김대중의 정상회담은 외교적 수완의 분출구였다. 이 만남은 두 국가 정상사이의 최초의 대면 회담이었다. 2000년 10월, 미 국무장관인 메들린 올브라이트가 북한을 이틀 동안 방문하였다.

2001년 3월, 미 조지 부시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정책을 다시 검토하고, 김정일이 계약 사항 등을 잘 이행할 수 있는지에 관해 의문을 표시하면서, 북한은 남한과의 장관급 회담을 무기한 연기했다. 막판에 평양은 2001년 10월에 예정되었던 제 4차 이산가족 상봉도 연기하면서 이는 미국의 9·11테러 이후 강화된 남한의 보안 경계 상황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달 후, 남한의 보안 상태에 대한 신랄한 태도를 보이면서 제 6차 남북 장관급 회담을 파기시켰다.

2002년 1월, 미국 대통령의 연두 교서에서 부시는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대량학살의 무기로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축’이라 규정하였다. 2002년 3월 베이징 주제 스페인 대사관을 통해 25명의 북한주민들이 집단 망명하였다. 이들은 북한의 기근과 압박으로부터 도망친 이후 중국에 숨어있는 수 만 명의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보여주었다.

북한은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좀약을 다시 만들기 시작한 후에 2002년 12월 유엔 IAEA 사찰단을 추방하였다. 워싱턴에서는 북한이 핵프로그램을 즉각 중지하고 핵확산 금지조약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제지표

  • 국내 총생산: 18억불(2001 추정)
  • 성장률:9%(2000)
  • 물가상승률:2.3%(2000)
  • 부채:12억불(추정 1999)
  • 국방비: 21억파운드(2002)

군대상황

  • 무장력 : 현역 108만2천명(추정) 예비역 470만명
  • 육군 : 95만명, 탱크 3500대
  • 해군 : 4만6천명, 잠수함 26정, 프리깃함 3정, 연안경비정 310정, 코르벳함6정,
  • 미사일함대 43정, 수뢰함대 103정
  • 공군 : 8만6천명, 전투항공기 621대, 무장헬리콥터 24대

식량위기원인

  • 늦봄가뭄
  • 여름수해
  • 초가을태풍피해
  • 삼림부족으로 인해 해마다 발생하는 홍수
  • 경제제재조치
  • 비료부족으로 생산량 감소

경작지 피해 경과

  • 1994 – 태풍으로 인한 심각한 수해
  • 1995/96 – 경작지역 16% 감소
  • 6~8월 1997 – 서부곡창지대에 심각한 가뭄
  • 2000 – 지속되는 가뭄과 8월에 태풍피해

북한식량상황 – 2001년

유엔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에 의하면 북한의 많은 지역에서 3달이상 봄가뭄이 지속돼 식량상황을 심각하게 악화시키고 있다. 이 봄가뭄이 국내 식량 생산에 미치는 영향은 전체 인구에 대한 식량안전에 치명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오랜 봄가뭄으로 기록될 이번 3월과 6월 중순사이 지속된 가뭄은 강과 저수지를 메마르게 하고, 관계 체계를 사용불가능하게 했으며, 농사를 지연시키고 많은 경작지에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수확량을 대폭 감소시킬 것이다.

10%가량의 경작지에 농사를 짓지 못했고, 나머지 땅에서 난 수확량도 평균 이하로 감소했다. 밀과 보리 수확량은 보통 1헥타르 당 2톤이었던데 반해, 0.85톤으로 떨어졌으며, 감자 수확량도 최근의 평균 10톤에서, 1헥타르 당 3.77톤으로 감소했다. 겨울, 봄 곡류 생산량은 17만2천톤으로, 본래 기대한 산출량인 49만3천톤에 훨씬 못 미친다.

WFP와 FAO는 북한정부의 공공분배 시스템이 지난 8개월간 제공한 215그램에서 남은 기간동안 150그램으로 개인당 일일 배급량을 감축하기로 했다고 한다. 두 기관은 국내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공동 경작지가 이 목표조차도 충족시키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게다가 봄 수확이 줄어들면서, 계속되는 가뭄이 주요식량과 감자 수확을 위한 경작 환경을 저하시켰다. 옥수수 수확의 45%정도가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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