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파병 2003-10-23   1334

<파병반대의 논리> 유엔 결의안, 그 내용을 따져본다.

각계전문가와 세계지성이 말하는 이라크 파병반대의 논리

노무현 정부가 유엔 안보리 결의안이 통과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라크 추가 파병을 결정했다. 노 대통령이 18일 라종일 청와대 안보보좌관을 통해 “그동안의 결정기준에서 볼 때, 지금이 (파병을) 결정할 시기”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엔 결의안 통과가 국내의 파병 반대 여론을 잠재울 수 있는 호기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파병 결정은 그동안 “국민 여론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신중하게 판단하겠다”는 입장과 정반대의 것으로서, 결국 참여정부가 국민여론보다는 미국의 압력을 더 크게 고려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적 정통성을 갖고 출범한 참여정부 하에서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훼손되고, ‘주권재미(主權在美)’라는 치욕과 자괴감을 많은 국민들에게 안겨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동시에 결의안 통과 직후 “점령군으로 참여할 수 없다”며 파병 거부를 선언한 파키스탄과 대비되면서 ‘미 제국주의의 하수인’이라는 국제여론의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유엔결의안은 파병의 명분이 될 수 있나?

표면적으로 볼 때, 이번 결의안 통과를 통해 한국의 파병이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한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 노무현 정부는 이미 여러 차례에게 걸쳐 유엔 결의안 통과 여부를 파병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겠다고 말해왔고, 국민 여론 역시 결의안 통과를 전제로 한 파병은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이 다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해왔듯이, 중요한 것은 결의안 ‘통과 여부’가 아니라, ‘어떤 결의안인가’에 있다. 즉, 유엔이 미국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대체함으로써 군사점령을 종식시키고 이라크 전후 복구 및 민주 정권 수립에 기여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결의안이라면, 유엔 회원국으로서 한국도 적극적인 역할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한 이번 결의안은 이러한 비전을 전혀 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유혈사태 및 생존권 위기로 얼룩지고 있는 이라크 문제가 장기화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추가 파병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점령군으로서의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을 ‘평화유지군’으로 전환시키는 내용을 전혀 담지 못했고, 미국이 이라크로 주권을 이양하는 시점을 밝히지 않았으며, ‘더러운 전쟁’의 대가로 치르고 있는 미국의 인적, 물적 비용을 다른 나라들에게 떠넘기게 하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이번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더구나 표결에 참여했던 15개 국가들은 결의안 표결의 ‘권한’은 행사한 반면에, ‘의무’는 이행하지 않겠다는 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서의 안보리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주요 반전(反戰) 국가였던 독일, 프랑스, 러시아가 결의안 통과 직후 파병이나 전비 부담을 할 의사가 없다고 밝힌 것은 유엔 안보리가 강대국의 정치적 야합의 장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들 국가들의 이러한 이기주의적 외교 행태는 결의안의 상정 및 표결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면서, 결의안 통과에 따라 추가 파병과 전비 부담을 선언한 한국 정부의 처지와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이는 이번 결의안 통과를 계기로 유엔 개혁 바람이 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모순 덩어리’ 유엔안보리 결의안

기실 이번 결의안의 내용을 꼼꼼히 보면, 결의안 자체부터가 ‘모순 덩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결의안에는 “이라크인들이 스스로의 정치적 장래를 결정하고 천연자원을 통제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석유 등 핵심적인 이라크의 산업을 외국 자본이 100%의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또한 결의안에서는 이라크의 과도통치위원회가 이라크의 주권을 구현하는 조직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빛좋은 개살구’이다.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는 과도통치위는 이라크 주민의 반발을 고려해 터키의 파병을 반대하고 있지만, 터키는 미국의 압력을 받고 파병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례는 이라크의 주권이 이라크 주민이나 과도통치위가 아니라 미국에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의없게도 결의안이 통과되자마자 결의안을 위반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결의안이 통과되자마자 부시 대통령이 ‘선제공격 권리’를 운운한 것은 미국이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부시 대통령은 아시아 순방길에 오르기에 앞서 캘리포니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적이 공격을 하기 전에 그들을 공격할 것”이라며, 전세계를 야만의 시대로 내몰고 있는 ‘선제공격 독트린’을 고수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미완의 파병 결정’, 목적은 최대화, 위험은 최소화해야

비록 정부가 서둘러 파병 결정을 내렸지만, “파병부대의 성격, 형태, 규모, 시기 등은 미국의 요청을 고려하되, 국민 여론의 지속적 수렴, 제반 현지조사단의 조사결과, 국군의 특성 및 역량 등을 종합 검토하여 이라크의 평화정착과 재건지원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독자적으로 결정할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파병의 성격과 내용을 재조정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국회의 표결이라는 절차도 남아 있다.

특히 정부가 파병의 기준을 “이라크의 평화정착과 재건지원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제시함으로써, 파병부대를 전투병으로 할지, 비전투병으로 할지를 둘러싸고 첨예한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정부 내에서는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투병과 비전투병을 섞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지만, 이는 ‘눈가리고 아옹’하는 것에 불과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유엔 안보리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고 해서, 전투병 파병시 우려되는 문제들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근 이라크의 저항세력들의 움직임은 계획적·조직적인 형태를 띠고 있고, 공격 대상도 미영연합군뿐만 아니라, 스페인, 터키, 유엔, 친미 이라크인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 전열을 가다듬고 총공세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전투병 파병 결정시, 전투병은 물론이고 서희·제마부대 및 이라크 주재 한국 외교관까지 공격 목표가 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인과 터키 대사관이 공격당한 것은 이러한 우려가 결코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한국의 추가 파병의 최소한의 기준은 ‘총을 들고 이라크인과 싸우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추가 파병이 이라크인들의 지지 속에서 치료 및 전후 복구 활동을 벌이고 있는 서희·제마부대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안정적인 지원활동을 할 수 있는 지역에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한가지.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처럼, “파병부대의 성격, 형태, 규모, 시기”는 투명한 공론화의 과정을 거쳐 반드시 국민 여론을 물어야 한다.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전투병 파병을 약속한다든지, 지난번 현지조사단처럼 부실 조사를 근거로 파병을 밀어붙이려고 한다면, 참여정부의 정체성과 민주적 원칙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말 것이다.

이 기사는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10월 18일자 기사입니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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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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