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의 평화바이러스> 테러리스트 혹은 순교자

얼마 전 눈길을 끄는 한 여론조사 결과가 언론에 보도됐다. ‘세계 평화의 최대 위협은 이스라엘.’ 유럽연합집행위원회가 지난달 15일 15개 회원국에서 500명씩 면접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59%가 이렇게 답했다고 영국 <옵저버>는 전했다. 그리고 2위는 미국으로 조사됐다.


▲ 유럽연합집행위원회의 면접조사 결과가 실린 <옵저버> 기사

이런 결과는 여럿에게 예상 밖이었던 것 같다. 우선 조사를 의뢰한 유럽연합집행위는, 언론 보도에 따르면, “거센 파장을 우려해” 조사결과를 공표하지 않았으나 일부 언론에 새나갔다고 한다. 로마노 프로디 유럽연합집행위 위원장은 성명을 내어 “반유대주의가 발붙일 곳은 없으며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선을 긋기도 했다. 유럽연합 시민들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이스라엘과 미국을 1, 2순위로 꼽았다니 유럽연합집행위가 당황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럽연합 시민들의 이런 인식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이후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사라진 볼세비키의 자리에 ‘새로운 악의 화신’으로 대신 앉힌 헐리웃 영화의 방향감각과는 영 딴판이다.

당연하게도 이스라엘의 반발은 격렬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최악의 독재국가나 테러조직보다 아래 수준에 놓았다. 유럽시민들뿐만 아니라 그런 여론을 형성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낀다”(이스라엘 유럽대표부 성명, 11월3일).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중동지역에서 가장 개명된 민주국가로 생각한다. 그 때문인지 그들은 이스라엘은 중동이 아닌 유럽의 일부라고 여긴다. 이러니 이스라엘의 충격이 오죽했을까.

이스라엘은 조사결과가 언론에 보도된 뒤, 유럽에 미만한 ‘반유대주의’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상황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지적하고 나섰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반유대주의라는 말은 2차대전 시기 나치 일당의 ‘학살’과 ‘희생자 유대인’을 자동 연상시키는, 이스라엘의 마법의 주문이다)가 이번 조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뭐가 ‘잘못된 정보’인지 나는 잘 모른다. 솔직히 ‘세계 평화의 최대 위협 세력’이 이스라엘인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로선 “폭탄 테러로 뼈대만 남은 버스를 유럽에 보내 도시를 순회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는 이스라엘 측의 대응을 전하는 기사를 보고 착잡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폭탄 테러로 뼈대만 남은…’은 이스라엘에만 있지 않다. 서안과 가자지구 등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도 그런 외부 폭력의 상흔은 흔하다. 아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더 많다.

지난 7월 초 열흘 남짓한 일정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을 취재한 적이 있다. 팔레스타인 서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나블루스에 갔을 때, 도시의 수많은 건물 벽면을 도배하다시피한 포스터들이 내 눈길을 잡아당겼다. 젊거나 어린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소총을 손에 든 사진이 담겨 있는 포스터들이었다. 아랍어를 모르는 나는 그게 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한국에서의 문화적 느낌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그건 영화 포스터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하마스, 이슬라믹 지하드, 파타계열의 알 아크샤 순교여단 등 팔레스타인 무장저항단체 소속 ‘순교자’들을 기리는, 이를테면 영정 같은 거였다. M-16 자동소총을 들고 해맑게 웃고 있던 열일곱살의 모하메드 사비어도 그렇게 ‘순교자’ 대열에 올라 있다. 그는 올 2월 텔아비브 근처 나타냐에서 ‘자살폭탄공격’을 끝으로 이곳을 떠났다. 이스라엘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 언론은 사비어 같은 이들을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

꽃다운 한 여인이 있었다. 하나디 타이시르 자라다트. 스물아홉살.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변호사 자격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던 꿈많은 젊은이. 그는 10월 4일 이스라엘 북부 항구도시 하이파에서 점심시간을 맞아 붐비던 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폭했다. 레스토랑 입구에서 그를 제지하던 보안요원을 사살하고 안으로 들어가 허리춤에 매단 폭탄을 터트렸다. (이스라엘에선 맥도널드 매장 등 사람이 많이 들락거리는 상점엔 예외없이 총을 든 보안요원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테러범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니 그곳에선 햄버거나 피자 따위를 사먹거나 하려면, 공항 보안검색대를 지날 때와 다름없는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해야 한다. 늘 생사의 경계선을 오가는 이들은 도인이 될까, 아니면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될까.)

그는 자살공격 직전 유서 따위를 남기지 않았다. 다만 그의 행동 직후 지하드 산하 사라야 알 쿠드스라는 단체는 지난 6월 오빠와 사촌이 이스라엘군에 사살당한 장면을 목격했던 그가 보복공격에 나선 것이라고 전했다. 변호사의 꿈을 펼치기엔, 변호사로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돕기엔, 세상은 너무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실 나는 이 보도를 처음 접하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신문에 실린 그의 사진이 내가 지난 7월 팔레스타인에 갔을 때 차분하고 온화한 표정으로 그곳 사정을 들려준 한 팔레스타인 여인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신문을 내려놓고 책상 한 켠에 밀어두었던 당시 취재수첩을 뒤적였다. 루브나 알 아슈가르. 아, 아니구나, 다행이다. 그런데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그것은 테러가 아니다. 인간선언이다. 당신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땅을 잃고, 나무도 잃고, 일자리는 없고, 학교도 없고, 미래도 없다면, 아버지는 살해당하고 형제는 감옥에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겠나. 분노는 증오를 낳고, 증오는 복수를 부른다.”

“왜 젊은이들이 ‘자폭공격’을 한다고 생각하나”는 질문에 동예루살렘에서 만난 팔레스타인국제문제연구소 마흐디 압둘 하디 소장은 이렇게 답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선 온건파로 꼽히며, 때로는‘서방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의 답변을 듣고, 난 가슴이 먹먹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슴 밑바닥에 고인 끝모를 절망의 한자락을 본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나는 “폭탄 테러로 뼈대만 남은 버스를 유럽에 보내 도시를 순회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던 이스라엘 희생자유족회 지브 파이너 대변인의 말에 반대할 생각이 없다. 이스라엘 전투기의 폭격으로 무너져내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건물들, 테러범의 침입을 막겠다며 이스라엘이 쌓고 있는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조상대대로 이어온 농사를 포기해야만 하는 팔레스타인 농부들, 딸아이의 입학 선물을 사려고 산을 넘다 검문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보안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뜬 어떤 팔레스타인 아버지, 이스라엘 보안군의 검문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앰뷸런스 속에서 이름도 모를 자신의 자식과 함께 죽어간 팔레스타인 여인의 사연 또한 유럽시민을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기회가 함께 제공한다면 말이다.

늘 그렇듯 문제는 방향감각이다. 한쪽에서만 보면 세상을 온전히 볼 수 없다. 영원한 ‘큰형’ 아메리카의 전폭적 지원과, 100∼200기로 추정되는 핵무기를 보유한 이스라엘. 그리고 대대손손 이어온 자기 땅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탱크에 돌맹이로 맞서는 팔레스타인. 둘 사이의 치명적 힘의 불균형을 전제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폭력’만을 문제로 삼는다면, 평화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꿈일 뿐,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악순환이 사람들 곁을 맴돌 뿐인 것이다.

‘테러는 치명적 약자의 절망적 저항 수단’이라는 지적에 묻어나는 섬뜩하면서도 서글픈 메시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건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부시 미국 대통령이‘민주혁명을 일으키겠다’는 이라크에서도, 다시 등장한 화염병 시위를 두고‘도시 게릴라’라거나 ‘반민주적 폭력행위’라는 비난이 난무하는 2003년 11월 대한민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의 없이는 평화롭게 살 수 없다. 우리는 정의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정의를 줘라, 그러면 우리도 평화를 줄 것이다.” 하디 소장의 이 절규가 팔레스타인에만 해당하는 소리인가.

첨언 ; 1993년 오슬로협정 체결의 주역으로 9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전 수상은 34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뒤 48년 이스라엘 건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을 때까지 키부츠 생활을 하는 한편 무장 게릴라를 이끌며 ‘유대인 국가 건설’을 위한 폭력투쟁을 펼친 바 있다. 그걸 요즘 이스라엘 유대인이나 부시 스타일의 미국사람들 말로 번안하면, ‘테러’가 된다.

이제훈 한겨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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