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8-05-13   1345

[일본 헌법 9조 세계대회 참가기 ①] 디아스포라가 역사를 움직인다

지난 5월 2~6일까지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참여연대 등 한국의 5개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일본 평화기행 – 헌법9조에서 동아시아 평화찾기> 행사에 공동 참여했다. 이는 현재 강화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와 역사갈등 문제 등에 대해 동아시아 평화와 공생을 향한 협력의 과제를 모색해 보는 한일 시민사회 연대사업의 일환이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에서는 이번 평화기행에 참여했던 후기를 2회에 걸쳐 연재하며, 첫 번째는 한일 간의 역사 갈등을 보여주는 장소 등지를 둘러본 것과, 두 번째는 헌법 9조 개정을 반대하는 집회 및 9조 세계대회 참석했던 것에 관한 후기를 싣는다. 이를 통해 한일 시민사회 연대의 경험과 고민들을 공유하고 동아시아 평화운동이 성장해 나가는데 작은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드디어 일본 하네다 공항에 발을 디디고 입국 심사를 거치는 동안 누군가 한쪽 벽에 붙여져 있던 포스터를 가리켰다. 그것은 북한으로부터 불거진 납치문제를 주의시키고 경각심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그 포스터를 보는 순간 마치 2002년 조일 정상회담 이후 북한을 악마화하는 일본의 반북 망령들이 포스터에서 되살아나 마치 나를 쏘아보고 있는 것만 같은 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일본은 초행길이었던 내가 그 나라에 대해 접했던 첫인상이 납치 관련한 포스터라는 것은 너무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일까? 순간 움찔했던 기억은 그 뒤에도 오래토록 남았다.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와 지하철을 타고 우리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에다가와 조선학교였다. 이곳 에다가와 조선학교는 한국에 매스컴을 통해 비교적 알려진 편이고, 영화 박치기2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우리를 마중나온 세 분은 김성태 총련 에다가와 지역 관리위원장, 송현진 전 에다가와 조선학교 교장선생님, 정경심 총련 활동가였다.

우리와 한 핏줄이라고 하지만 얼굴 생김새와 약간 어눌한 발음의 한국어 구사 등을 보면 일본인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고 또 엄밀하게 말하면 한국인도 아닌 ‘조선인’이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묘한 느낌이었다. 전후 한국의 젊은 세대들 중에는 이런 나와 비슷한 느낌이나 인식을 대개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러한 학교를 방문한 경험 등은 재일조선인에 대해 가지는 역사적 서먹함을 조금씩 없애주고 서로 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에다가와 지역에서 조선학교는 우리 민족의 학교를 설립했다는 긍지 이상으로 이 지역 주민들의 막강한 구심적 역할을 맡았음을 알 수 있었다. 1940년대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 일부를 당시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이곳으로 강제이주 시켰다. 이들은 온갖 악취와 파리가 들끓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몰려들어 밥을 먹어가며 학교를 건설하고 지켜왔다고 한다. 학교 현관 입구 상단에는 페인트칠로 그려진 그림 속에 “꿈 많은 미래로 나래쳐요”라는 큰 문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946년 설립 당시, 일본에서 무시당하고 차별당하며 이방인으로 대우받는 재일조선인들의 설움이 고스란히 그 글씨에 담겨있는 것만 같았고, 그들의 그 시절 간절함이 시공간을 초월해 나에게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 에다가와 조선학교 정경

우리는 학교 주변 골목들을 돌아다녔다. 김성태 위원장은 사람 한 명이 딱 들어갈 만큼 좁은 문으로 된 조그마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을 가리키며 이런 풍경이 대표적인 재일조선인 밀집지역이라고 알려주셨다. 또한 불과 4년 전에 일본 정부가 이 지역에 상하수도 시설을 놓아 주었다고 하자 우리 모두는 믿기지 않는 듯 놀라워하며 취약한 인프라 기반에 혀를 내둘렀다.

김성태 위원장이 주로 우리에게 일러주신 점은 여기서 어떻게 재일조선인들이 힘든 역경을 이겨내고 사회적 권리를 쟁취해 왔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학교 증축사업 및 일본 시민사회의 관심과 지원 증대를 비롯해 한 어린이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을 교훈삼아 어린이들이 맘껏 뛰어 놀 수 있도록 아사히 공원을 조성한 것, 또한 에다가와 지역에서는 일본인 이웃들과 협력도 뛰어나 마침내 연대투쟁으로 대지진에 대비한 가스시설 등을 옮겨가도록 한 것, 땅에 대한 소유권을 함께 인정받아 시세 7%를 받을 수 있게 되기도 했던 도쿄도와의 승소 경위 등 김성태 지부장은 마치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지역이 빈곤하고 열악하며 차별의 땅으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치열함과 생명력이 뭉쳐져 지역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유도하게 된 것을 궁극적으로 깨닫게 했다. 그것이 바로 여기 재일조선인들이 단순히 역사의 피해자 혹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버려진 사람들이라고만 기억되어선 안 될 중요한 이유였다.

짧은 시간 동안의 에다가와 조선학교 방문은 어떻게 일본에서 수십 개의 조선학교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유지해 오면서 재일조선인 개개인들의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되어 왔는지를 포착하게 했다.



▲ 김성태 총련 에다가와 지역 관리 위원장은 평화기행 참가자들을 직접 인솔해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며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다.
 
 여기 에다가와 조선학교가 전후 재일 조선인들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면, 다음 날 우리가 방문했던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은 전시 중 군대로부터 피해당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히 보여주는 곳이었다.


 이곳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아시아 각국의 여성 피해자들의 증언과 자료들이 수집 보관된 곳이다. 또한 이에 대한 활발한 전시 활동과 함께 관련 소송 지원 및 모의재판 등을 펼쳐 오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2000년 12월에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를 처벌하는 여성 국제전법 법정」이었다. 일본 정부는 93년 ‘코노담화’를 통해 일본 위안부 문제에 국가가 직접 관여한 적이 없으며 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공식 발표했고 일본의 우익세력들 역시 위안부를 매춘행위로 공격해 왔다. 한국에서도 정신대에 다녀온 할머니들이 일종의 ‘커밍아웃’을 하고 오랜 세월동안 일본정부에 대한 시위를 줄기차게 해 왔지만 이렇다 할 사과와 보상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제대로 고발하듯 지난 모의 법정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폭로수준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 해결을 원칙으로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자 했다. 그래서 재판에서는 크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자 처벌, 진실 규명, 평화운동의 확산 등에 중점을 두고 진행을 했다고 한다.


▲ 자료관 내부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일본 평화운동에 관한 갖가지 자료와 서적, 전시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자료관 입구에는 일본군 성폭력에 대해 공식 증언에 나섰던 성폭력 피해자들의 얼굴사진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자신을 파괴의 끝으로 몰아갔던 전시의 경험을 당신 스스로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일까. 그런 면에서 사진 속 인물들의 용기가 대단해 보이기도 했지만 반면에 사진을 똑바로 쳐다보기 힘든 나 자신의 괴로움도 컸다. 그것은 오늘날 역시 예전보다 전혀 나아진 바 없이 전쟁과 폭력, 기만이 압도하는 이 시대의 야만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위안부 문제가 쉽게 묻히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구술로나마 다행히 역사 위로 오를 수 있게 되었지만 일본 우익세력은 다시 이들의 진실을 매도시키는데 급급하고 있다. 실제로 현행 일본 교과서들 중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은 불과 10%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내용 삭제가 증가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삭제 행위들은 단순히 일본의 우경화나 군국주의 가속화가 우려되는 것을 넘어서서 미래 인류에 대한 무한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자 인간다움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자세히 자료관에 대해 안내를 해 주셨던 분은 마지막으로 무엇이 ‘화해’인가를 묻는 언급을 하셨다. 누가 어떤 내용으로 화해를 해야 하는 것일까? 이는 한일 간 첨예화되고 있는 역사갈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중요성과 더불어 각국 시민사회 연대의 필요성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 실마리는 재일조선인에서부터 아시아 지역 곳곳에서 강제징용 되었던 위안부 여성들까지 그동안 일본정부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왔던 역사적 디아스포라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들이야말로 일본사회 나아가 세계를 향해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앞서서 높여 옴으로써, 이 야만과 차별의 시대를 벗어나기 위한 소통을 끊임없이 갈구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전쟁이 가져다 준 절망의 극복 한가운데 존재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정말로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열심히 귀 기울이고 있는 나 자신을 또한 새롭게 발견했다. 그것은 한일 시민사회 연대가 형해화되지 않고, 진정한 화해로 나아갈 수 있는 가교 역할의 주인공들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던 순간이었다.

 


글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지은 간사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