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칼럼(pd) 2007-10-26   970

<통인동窓> 노무현, ‘안보’에 귀의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파병연장 담화에 부쳐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에 주둔중인 자이툰 부대에 관한 대국민 담화를 통해 공표한 것은 파병 연장만은 아니다. 그 내용 없는 담화는 노무현 대통령의 일천한 외교적 경륜은 물론 한국 외교의 부재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또한 노 대통령이 안보와 국익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내세워 국민을 호도하고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던 과거 냉전시대 권위주의자들의 통치관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철군 약속 번복을 해명하고자 한 담화는 한마디로 “한반도 평화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한미 간의 긴밀한 공조가 절실하다. 게다가 (당초 목적은 아니었지만) 우리 기업의 이라크 진출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국익에 부합하는 선택임을 이해해 달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고작 이것이 올해 초 윤장호 하사를 잃고, 불과 3개월 전 국민 21명이 아프간에서 피랍되어 전국민이 2개월 가까운 시간을 노심초사했던 나라의 대통령이, 그보다 더 위험하고 파병의 정당성도 없는 이라크에서 올해 안에는 반드시 철수하겠다던 약속을 번복하면서 국민에게 제공하는 설명과 정보의 전부란 말인가?

이것이 그토록 시시콜콜 따지기 좋아하고, 임기를 마치기도 전에 수백명의 국정평가단을 운영할 만큼 평가하기 좋아하는 대통령이 제시하는 논리적 근거의 전부란 말인가?

아프간 피랍사태를 잊었나?

3개월 전 그 악몽 같은 순간들을 떠올려 보자. 정부는 피랍기간 내내 허둥거렸다. 아프간 정부에게 협상을 위임하고 있다가 2명의 인질이 죽는 낭패를 보았고, 미국에게 협조를 구했으나 원하는 도움을 얻는데 실패했다. 기대했던 부시(미)-카르자이(아프간) 정상회담에서는 인질 문제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파키스탄 무샤라프 대통령과 아프간 카르자이 대통령의 회동에 기대를 거는 것은 한층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는데 이 두 부패한 정치인은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족장들에게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뒤늦게 탈레반과 직접협상에 나서기로 했을 때, 대화채널을 확보하는 데에만 적지 않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고 협상장소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두고 유엔의 협조를 얻으려던 기대와 노력도 실패했다. 정부는 이 사태가 이슬람권 전체의 도덕적 문제로 여겨질 것을 우려한 몇몇 이슬람 정부들의 협조를 얻어낼 수 있었지만 협상기간 내내 채널의 부재와 외교의 부재를 절감해야 했다. 시간을 허비한 정부는 애꿎게도 민간 인도지원 단체들까지 철수시키는 전무후무한 부당한 조건을 수용해야 했다. 물론 다른 이면 협약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정부가 자신이 결정한 일에 뒤따르는 위기 앞에서 이를 수습하고 해결할 수단을 그다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아프간에 군대를 6년간 파견하고도 아프간을 거의 모르고 있었고, 그 동안 독자적인 대 이슬람, 대 아프간 외교 없이 다만 미군과, 부패한 아프간 정부에 맹목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가 허둥거려야 했다. 한마디로 미국 요청으로 군대만 보냈지 아프간에 대한 이해도 정책도, 따라서 외교도 없었다. 게다가 인질 사태에 놀란 정부는 군대의 철수 시기는 차일피일 미루는 반면, 최고의 지역전문가로서 매우 성공적으로(군대와는 달리) 현지에서 적응해온 유능한 한국인 국제NGO인력과 현지교민까지 신속히 소개시켰다. 이로서 정부가 아프간 전쟁에 군대를 보낸 대가로 아프간에서 이제 막 형성되고 있던 진정한 인도적 지원의 풀뿌리 네트워크를 호박넝쿨 걷어내듯 송두리째 걷어내게 되었다.

내친 김에 이번 피랍사태 해결은 물론 발생에 있어서 정부의 과오와 책임은 없는지 따져보자. 피랍의 악몽은 말할 것도 없이 탈레반이 한국의 민간의료선교단을 납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탈레반이다. 그러나 아프간 피랍사태의 책임이 과연 무자비한 반인륜적 피랍행위를 자행하고 2명을 살해한 탈레반과 ‘말 안 듣는 국민’에게만 있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아프간에 대한 정부의 파병정책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프간에 파병된 다산동의부대의 파견동의안은 ‘대테러전쟁 한국군파견동의안’이다. 정부는 아프간에 가 있는 군대의 주임무가 인도지원활동인 것처럼 홍보해왔지만 사실 그 부대의 임무는 대테러전쟁 참전이었던 것이다.

다산부대의 본래임무는 다국적군 막사 신축 및 개보수, 동의부대는 다국적군 진료였다. 아프간 파병 부대 예산에 인도지원 예산이 단 1원도 책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동의부대의 아프간 민간인 진료봉사활동은 사실상 경상비의 일부를 전용해 임무 외의 활동을 수행한 것이다. 따라서 저항세력들이 한국군을 다국적군의 보급 병참부대쯤으로 여기고 이를 교전상대로 인식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아프간에서 한국군의 평판은 좋으며 아프간은 한국인들에게 안전하다는 근거 없는 홍보에 몰두해왔다. 물론 외교부가 종종 아프간에서의 공격적 선교활동의 위험을 경고하는 등의 실무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피랍 사태가 있기까지 대부분의 국민들이 한국군의 평판이 좋고 따라서 안전하다고 믿고 있게 된 데는 정부의 책임이 크다. 정부가 파병을 정당화하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 했던 많은 잘못들, 예를 들어 철저한 정보통제와 무책임하게 발표한 각종 자의적 홍보자료들, 그 홍보논리에 반영된 일방주의적이고 자의적인 논리와 인식들이 국민들을 아프간 정세에 무지하게 만들었고, 공격적 선교활동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피랍사태에 중대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그토록 안보를 강조하던 정부는 국민들이 처한 위험에 대한 정보공유와 조기경보를 등한히 했던 것이다.

더욱이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임무가 사실상 종료된 군대를 제 때에 철수하지 않아 화를 키웠다. 이는 매우 중대한 실책이다. 실제로 정부와 국회는 2006년 말 이라크 파병군의 2007년 완전철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아프간 파병군의 2007년 철수도 같이 논의했는데, 당시 국방부의 설명은 아프간에서는 언제든지 철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2006년 11월 열린우리당 주최 토론회에 나온 국방부 관계자들은 아프간 다산동의부대는 ‘한미동맹’을 고려해 상징적 차원에서 주둔하고 있으나 그 철수에 대해서는 이미 다국적군 측과의 양해가 이루어진 상황이라고 부연하기도 했었다. 말하자면 2006년 말에도 아프간 다산동의부대는 언제든 철수할 수 있는 조건이었던 셈이다. 그 때 지체없이 철군했더라면 윤장호 하사는 물론 피랍 사태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았을 것이다. 2007년 아프간에서 일어난 사태들은 정부의 안이함과 불필요한 저자세 외교, 불필요한 파병 장이 부른 비극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에서 이러한 일들이 재연되지 않을 보장이 있는가? 그리고 아프간에서와 같은 위기가 재발할 경우 해결 수단을 가지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무런 대책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파병 연장에 앞서 아프간 피랍 사태로 확인된 난제에 대한 검토 결과를 공개하고 국민 앞에 대책을 제시했어야 했다. 허나 노 대통령은 맹목적 ‘한미공조’, 막연한 ‘국익’만을 되뇌고 있다.

조삼모사 : 파병연장 담화의 위험한 논리

노 대통령은 담화에서 철군 약속을 번복하게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하다면서 ‘국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니 이해와 협조를 구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전혀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이해와 협조가 가능한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아 왔다.

정부는 작년 파병 연장의 조건으로 2007년 중 철군을 완료하고 이를 위해 6월말까지 임무종결계획서를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대통령이 국민과 국회의 양해를 구하고자 했다면 6월에 이같은 담화를 발표하여야 마땅했다. 백번을 양보해 철군 약속은 지키지 못하더라도 6월까지 국민 앞에 이에 대한 최종입장을 밝히겠다는 약속만큼은 지켜야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 약속을 너무도 가볍게 여겼다. 전쟁의 주모자격인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서조차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국회의 권능을 무시하고서 어떤 합의를 기대한단 말인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한 민주적 절차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담화는 정당한 절차를 무시한 담화이기에 아무리 공손한 어조를 가장하고 고심어린 선택임을 호소하고 있다 하더라도 국민과 국회의 권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노 대통령과 그 정부는 임무종결계획서를 제때 제출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 계획서를 제대로 작성하기 위한 어떤 진지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5월말 필자가 속한 참여연대는 일련의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정부가 임무종결계획서 작성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았다. 이라크 상황 평가와 이라크 재건지원 실적을 평가하기 위해 외부용역으로 작성된 보고서의 유무를 묻는 정보공개청구에 국방부와 외교부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그런 보고서는 없다고 답했다. 또한 정부는 이라크 정세분석 보고서 목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임무종결계획 작성을 위해 열린 회의의 목록과 그 회의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국방부는 자이툰 부대의 2004~2006년 예결산 내용 역시 공개를 거부했다. 자이툰 부대의 활동을 공정하고 냉정하게 평가하고 이라크 향후 정세전망을 사실에 입각해서 분석해 이를 국민·국회와 공유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불성실’에는 고의성마저 엿보인다. 실제로 불과 며칠 전까지도 파병 연장은 결정되지 않았고 고심을 거듭해왔다던 청와대의 설명과는 달리 정부가 파병군의 장기주둔을 기정사실화하는 여러 가지 조치들을 지난 2006년부터 취해왔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지난 작년 말 정부는 2007년 말까지 철군을 약속하는 것과 동시에 당시까지 제한해 왔던 아르빌 지역에 대한 기업인 진출을 전격 허용했다. 지금 국방부는 진출한 기업인 보호를 위해 군대주둔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또한 정부는 2007년 2월 1일 미군과 한국군이 협력하는 민군협력기구인 아르빌 지역재건팀을 발족했다. 지역재건팀 합류는 사실 2006년 6월 육군 홍보자료에서 이미 언급되고 있었다. 2007년 6월까지 임무종결계획서를 제출하기로 한 정부가 그간 활동에 대한 평가나 정세판단, 장기적 이라크 정책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부적절한 조치를 시행하는 것은 당초 파병연장을 전제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노 대통령은 이 모든 실무적 진행을 묵인해왔다. 그리고 이제 대선을 두 달 앞둔 어수선한 시기에 ‘고심어린 결단’이라는 립서비스로 ‘배째라’식의 이해와 협조를 강박하는 노 대통령은 타고난 정략가이자 정상배일지 몰라도 민주적 상식에 부합하는 대통령이라 할 수 없다.

사실 대통령의 조삼모사식 임기응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국이 추가파병을 요구해왔던 2003년 10월 노 대통령은 국민과 함께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밝힌 직후, 밀실에서 추가파병 방침을 결정하고 미국에게 먼저 통보했다. 또 자이툰 부대에 유엔 경호임무를 추가하거나 미국 주도의 지역재건팀 합류 등 중대한 임무변경에 대해 한 번도 국회와 국민에게 정보를 공개하거나 사전합의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국회에 보고한 자이툰 부대 편성에는 없던 공군 수송부대(다이만 부대)를 국회의 동의도 거치지 않고 파병해 놓고, 2005년 파병연장 동의안 제출시 은근슬쩍 공군수송부대를 자이툰 예하부대로 파견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다이만 부대는 자이툰만이 아닌 다른 다국적군 수송업무도 맡고 있는데, 그것이 자이툰의 임무인 아르빌 재건지원과 아무런 상관없는 임무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것이 과연 국방부의 실무적 실수에 불과한 것인가? 놀랍게도 자이툰 부대를 600명 수준으로 줄인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담화 속에 자이툰 예하부대라는 다이만 부대는 포함되지 않았다. 당초 정부가 파병지로 예정했던 모술과 키르쿠크가 안전한 지역이라고 보고했다가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박자료에 의해 이라크에서 가장 무장갈등이 심각한 곳으로 판명되어 낭패를 본 국방부 보고자들은 노 대통령에 의해 모두 중용되어 초고속 승진을 거쳤다. 정부는 매년 이라크 재건지원이 성공적이라고 주장해왔는데, 2004~2006년까지 자이툰이 사용한 예산이 5000억 이상인 반면, 같은 기간 실제 재건지원에 사용한 예산은 99억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숨겨왔다. 게다가 그 중의 절반은 아사이쉬 등 쿠르드민주당 군사조직에 지원되었는데 아사이쉬는 키르쿠크에서 투르크멘족등에 대한 차별적 고문살해에 연루되어 서방 언론의 주목을 받은 조직이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자이툰의 재건지원이 성공적이라고 자평하고 있다.

‘한미공조’, 그리고 공격받는 민주주의

대통령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회피한 채 지난 5년 내내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느 때 보다 한미공조가 절실하다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4년간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할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고 이번 담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한미공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라크에서 공조를 중단하면 한반도에서의 한미공조가 어떻게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에 대해 마땅히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 4년간 이라크에서의 한미공조가 한반도 문제를 푸는데 일조했다는 근거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고, 이라크 철군이 한반도 한미공조를 위협하리라는 근거 역시 제시하지 않고 있다. 반면 지난 4년 동안은 정부가 펼치는 논리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입증할만한 근거들이 갈수록 풍부해지는 과정이었다.

우선 이라크 전쟁 협력 여부가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가정은 완전히 비현실적인 것으로 입증됐다. 사실 2003년 이라크 침공 초기의 미국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는 그렇게 생각할만한 요소가 없지는 않았다. 9.11 직후 대테러전쟁을 선포하면서 부시 행정부는 기존의 동맹은 대테러 전쟁에서 미국의 편에 서는가에 따라 재평가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동맹국 줄세우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이러한 패권적 태도는 곧 국제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미국 내에서도 역대 미국이 쌓아온 국제관계에서의 협력체계를 결정적으로 손상시킨 정책으로 지탄받기에 이르렀다.

부시 행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결국 재임을 거치면서 유야무야되었고 차기 정권을 누가 잡던 그런 기조의 대외정책이 계승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는 것이 통설이다. 게다가 부시 행정부가 이러한 패권적 줄세우기를 시도할 때조차 파병이라는 채찍을 강요했으되 이에 따른 당근을 명시적으로 제시한 사례는 없다. 파병의 대가로 무엇을 주기로 한 바 없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초기 자이툰 부대 파병의 대가로 대북 정책 기조의 변경을 요구하던 윤영관 외교장관이 파월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가당찮은 내정간섭이라는 비난에 직면했던 사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의 대량살상무기 반확산·비확산 정책의 핵심 쟁점이자 장래 동북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좌우할 북한 핵문제는 미국의 대외정책의 골간이므로 파병 따위를 대가로 거래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황을 제대로 묘사하려면, 이라크 파병이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부시 행정부의 참혹한 실패가 대한반도 정책변화를 가져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라크 민중들의 참혹한 희생의 대가로, 그러한 희생이 유발되는데 일조한 한국이 요행히 그 덕을 보게 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라크, 아프간에 이어 극동에서도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한 부시 행정부가 임기 내에 북한 핵문제를 ‘거래’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마음을 정한 결과로, 그리고 북한의 극단적 벼랑외교의 결과로, 한국 정부가 노력해온 북핵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게 된 셈이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한국의 파병협력과는 무관하게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국이 이라크에서 파병군을 철수시킬 경우 미국과의 대한반도정책 공조가 위협받을 것이라는 우려는 지극히 저자세적인 사고에서 나온 비현실적인 가정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제 북핵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라크 파병 문제 같은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외교행위’가 필요한 것이다. 이 점에서 노 대통령의 담화는 필요한 외교행위를 포기하고 그 이유를 ‘한반도 평화’와 ‘국익’으로 얼렁뚱땅 정당화해버린 외교포기선언이다. 게다가 외교행위를 함에 있어 민주적 위임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민주국가 외교의 기초이며 나아가 이러한 민주적 외교과정 자체가 민주국가에서 포기할 수 없는 가장 핵심적인 국익을 구성한다는 점에 유념한다면, 노 대통령의 담화는 ‘국익’을 ‘망령되이 일컬어’ 국민에게 주권포기를 강요하는 주권포기선언에 준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 외교가 있었는가? 미국의 힘에 대한 과도한 공포, 조잡한 민족주의와 부국강병론, 정부 내외의 친미적 인맥들에 의해 가공되어 전달된 편향된 정보, 대통령 자신이 주창해오던 참여민주주의 담론과는 상반되는 자의적이고 마키아벨리적인 꼼수들이 빚어내는 기괴한 ‘비현실적 현실주의’가 난무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대통령과 그 정부는 실용주의니 현실주의니 하는 좋은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늘 비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도 쓸모없는 결론에 경도되어 왔다. 한마디로 말의 성찬, 헛똑똑이었다. 그래서 근시안적 식견과 외교원칙의 부재로 인해 현실의 바다 위를 좌표도 없이 부표처럼 떠돌다 예기치 못한 현실을 암초에 늘 좌초해 왔다.

노무현 정부의 이러한 편향은 그가 외교를 민주주의와 철저히 분리하는 그릇된 사고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더 가중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 기간 동안 이루어진 대외정책적 결정은 어떤 국내정책 못지않게 국민의 삶과 한반도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전략적 결정들이었는데, 대통령의 의사결정은 대부분 시민들의 자기결정권과 충돌하고, 민주적 절차를 훼손하는 방법으로 강행되었다. 또한 ‘실용’과 ‘실리’를 내세워 국제사회의 평화와 정의에 눈감고, 약소국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힘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2000년대 초 한국사회에 존재했던 역동적 민주주의, 한반도 분단냉전체제를 극복할 새로운 평화적 전망을 향한 상상력과 열망은 역설적으로 노무현 자신에 의해 효과적으로 차단당했다.

그것은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좌표상실은 물론, 나아가 2000년 전후 수년간 이어지던 역동적 민주주의를 한국사회에서 거세하는 파괴적 결과를 초래했다. 이제 전세계가 부러워하던 한국사회의 민주적 역동성은 한국에서 급격히 소멸하고 말았다.

이라크 장기주둔의 길을 연 노무현 담화

노 대통령의 논리대로라면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논의는 짧게 잡아도 향후 10년은 족히 걸릴 것이고 매년 한미공조는 어느 때보다 중요할 터이다. 게다가 미국에 어떤 정부가 집권하든 이라크에서 모든 군대를 뺄 가능성을 희박함으로 이라크 미군 역시 족히 10년 이상은 주둔할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정부는 단 1년만 연기한다고 하지만 이후 정권이 노 대통령의 논리를 인용해 한 5년만 더 연장하겠다고 해도 노 대통령은 내가 한 약속은 그게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을 터이다. 왜냐하면 대통령 자신이 그런 황당한 논리로 철군 시한과 관련된 국민과의 약속을 제 맘대로 어긴 선례를 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노 대통령은 미국에 이라크 장기주둔이라는 선물을 주고 임기를 마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 결정으로 임기를 시작해서 이라크 장기주둔 바통을 넘겨주면서 임기를 마치게 되었다. 노 대통령의 담화는 그 5년간의 세월이 보여주는 노무현식 민주주의의 예정된 타락과 쇄락의 기념비로 계속 기억될 것이다.

국회, 계속 ‘머저리’로 남을 건가

필자는 지난 4년간 국회에서 이루어진 파병 관련 논의를 빠짐없이 모니터해왔고, 그 기간 동안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모든 자료를 검토해 왔다.

적어도 이라크 파병에 관한한 국회는 거수기 그 자체였다. 집권여당은 결국 정부의 거수기로 작용해왔고 야당 역시 파병 예산 사용이나 장병의 안전문제에 대해 날선 추궁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국방부는 국회에 늘 잘못된 통계와 성의없는 내용을 보고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비난받은 적이 없다.

국회는 2004년 첫 연장표결에서 찬성 토론도 없이 파병 연장에 거수기 노릇을 하기도 했고, 이러한 무책임한 행태가 비판당하자 2005년 국회 표결과정에서 찬성 측 대표연설에 나선 김성곤 의원 등은 이번이 마지막 연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연장동의를 호소했다.

2006년 말에는, 시민사회단체가 ‘아르빌 지역은 언제든지 다국적군이 철수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밝힌 주이라크 미군보고서를 국회와 정부에 제공한 것에 자극받아 집권여당을 중심으로 철군계획을 정부로부터 받아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유야무야 된 채 다만 2007년 6월까지 반드시 철군계획을 내놓고 2007년 말까지 철수한다는 것을 전제로 연장에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그런데 그 약속마저 노무현 대통령의 담화를 통해 최종적으로 조삼모사식 국회기만행위로 입증된 셈이다. 국회가 제정신이라면 국방장관 해임을 결의하고 정부의 파병연장안을 부결시켜야 한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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