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국제분쟁 2003-03-15   2259

[분쟁지역현황] 앙골라 리포트 : 냉전의 희생국 – 앙골라(Angola)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과 냉전으로의 종속

석유와 다이아몬드, 커피가 풍부한 나라 앙골라는 콩고민주공화국, 잠비아, 나미비아 (Namibia)와 인접한 아프리카 남서부에 위치한 국가입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거쳐 1975년 뒤늦게 독립한 앙골라의 종족은 총인구의 37%를 오빔분두족(Ovimbundu)이 차지하고, 킴분두(Kimbudu)족이 25%로 두 번째로 많으며, 바콩고(Bakomgo)족(13%), 메스티조(Mestiso)라 불리우는 포르투갈 식민역사 속에서 포르투갈에 동화된 혼혈족(2%)과 남동부에 소수민족들이 있습니다. 포르투갈의 동화정책으로 인하여 상당수(65-88%)가 기독교인이며 나머지는 전통아프리카 종교를 믿습니다.

남대서양연안에 위치하여 남아프리카로의 입구역할을 하는 지리적 위치와 풍부한 자원은 앙골라에 대해 강대국들이 관심을 갖게되는 원인이었는데, 앙골라 지역은 16세기 무렵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편입되었습니다. 1482년에 포르투갈 항해자가 처음으로 상륙한 이후 1575년부터 식민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앙골라에 대한 포르투갈의 정책은 브라질로 보내는 노예의 공급원이었습니다.

따라서 천연자원에 대한 개발보다는 ‘노예사냥’에 더욱 열을 올렸는데, 1800년대에 노예제의 폐지와 브라질의 독립, 유럽 제국주의국가들에 의한 아프리카 진출의 본격화에 따라 비로소 이 지역에 식민지 수탈의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1910년대 자본주의적인 식민지농업이 도입되었으며, 1917년의 다이아몬드 발견을 계기로 앙골라의 식민지 개발은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포르투갈의 식민정책은 초기부터 선교단을 앞세운 동화정책을 취하였는데, 메스티조라 불리는 집단의 형성은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꾸준히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하고, 포르투갈의 독재정치가 강화됨에 따라 식민정책이 더욱 폭력적으로 가해지자, 이 지역에서는 1960년대부터 독립투쟁을 위한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풍부한 자원에 대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냉전체제의 형성에 따른 아프리카 지역에서의 패권을 향한 미국과 소련의 경쟁이 얽혀 앙골라는 1975년 독립을 하였지만, 냉전체제에 종속되어 거의 30년에 가까운 분쟁을 겪게 되었습니다.

1910년대 인텔리 중심의 탈식민 저항운동이 독립투쟁의 기초를 마련한 이래, 1950년대에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지하단체들이 조직되어 1956년 수도 루안다 지역에서 아고스띵유 네뚜(Agostingho Neto)의 주도로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앙골라해방인민운동(MPLA: Movimento Popular de Libertacao de Angola)이 결성되어 독립투쟁을 벌였습니다.

이어 1961년 후베르뚜(Holden Roberto)가 결성한 앙골라해방민족전선(FNLA: Frente Nacional de Libertacao de Angola)이 앙골라 북서부지역에서 결성되었으며, 1966년 사빔비(Jonas Nalheiro Savimbi)에 의해 앙골라전면독립민족동맹(UNITA: Uniao Nacional para a Independencia Total de Angola)이 앙골라 동부지역에서 결성되었습니다.

앙골라해방인민운동은 메스티조와 인구의 23%를 차지하는 옹분두(Mbundu)종족이 중심이었고, 인구의 약 13.5%를 차지하는 바콩고 종족을 중심으로 앙골라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었으며, 오빔분두종족을 배경으로 앙골라완전독립연맹이 만들어졌습니다. 좌익성향을 가진 앙골라해방인민운동에 대해 미국의 지원으로 우익노선을 추구한 앙골라 해방민족전선이 만들어지는 등, 이들 독립투쟁세력들은 각자 상이한 이념과 더불어 각기 상이한 문화와 고유언어를 사용하는 서로 다른 종족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독립이후 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앙골라해방인민운동의 지도자인 네뚜가 1960년 체포된 이후 재판없이 추방당한 사건을 계기로 1961년 루안다의 감옥을 습격하는 등 독립투쟁이 본격화되었는데, 앙골라해방민족전선은 현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샤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아프리카 단결기구(OAU)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념대립으로 앙골라해방인민운동은 참여가 배제되었고 이들은 앙골라해방인민운동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때로는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포르투갈 내부에서는 1974년 군사쿠데타로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식민지들의 독립을 약속하게 됩니다. 1975년 포르투갈과 3개 단체들은 알보르협정을 통해 앙골라 독립과 3파가 고루 참여하는 과도정부수립을 합의하였지만, 독립정부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과 냉전체제의 형성으로 이내 독립투쟁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앙골라해방인민운동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앙골라완전독립연맹간의 분쟁으로 바뀌었습니다.


외세의 개입

독립직후 1976년에 앙골라해방인민운동은 앙골라 중부지역에 앙골라인민공화국(PRA: The People’s Republic of Angola)을 세웠습니다. 한편 앙골라해방민족전선과 앙골라완전독립연맹은 연합하여 남부지역에 앙골라인민민주공화국(PRDA: People’s Republic Democracy of Angola)을 수립하였습니다.

미국, 소련, 쿠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개입하면서 분쟁은 장기화되었습니다. 소련의 경우 대서양과 홍해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리고 앙골라의 풍부한 자원에 대한 관심으로 인하여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군대를 직접 훈련하는 등 군사원조를 하였습니다(1970년대에는 중-소 갈등으로 인하여 중국이 앙골라해방민족전선을 지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쿠바는 자신의 외교정책으로서 ‘혁명수출전략’의 일환으로 아프리카 혁명운동에 지원을 하였는데, 쿠바의 지원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개입 때문이었습니다. 1990년 남아공으로부터 독립한 나미비아지역의 독립투쟁을 앙골라가 지원한다는 구실로 앙골라를 남아공이 침공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미국으로서는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권의 확산방지와 특히 인접하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상유지를 위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통한 지원과 함께 앙골라완전독립연맹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원을 하였습니다.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앙골라 지역이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서자 미국, 독일, 이스라엘의 원조로 핵무기를 생산하였다가, 점차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흑인정권이 등장하게 될 때 핵무기의 ‘의도하지 않는 사용’을 두려워하여 백인정권과 미국은 핵무기를 1990년대에 폐기하기도 하였습니다.


탈냉전, 그러나 지속되는 무력충돌

냉전체제의 붕괴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외세의 개입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1988년 12월 앙골라, 쿠바측이 남아공의 나미비아 독립 허용을 조건으로 쿠바군 철수에 관한 쌍무협정 체결하였고, 유엔은 유엔앙골라진상조사단(UNAVEM: United Nations Angola Verification Mission) 70명을 파견하여 쿠바군의 철수를 감시하였습니다. 1991년 쿠바군은 완전 철수하였고, 남아프리카공화국 군대 3,000명은 1988년 8월 철수하였습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민주화물결 속에서 앙골라 역시 1990년 복수정당제를 인정하고, 1991년 앙골라완전독립연맹과 평화협상을 진행하여, 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이에 유엔은 선거감시를 위한 제2차 유엔앙골라진상조사단(UNAVEMⅡ)을 파견하여 유엔의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하였습니다. 1992년 이 선거에서 앙골라해방인민운동의 산토스 후보가 49% 득표, 앙골라완전독립연맹의 사빔비 후보가 40%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사빔비는 정부측의 부정선거를 이유로 선거결과에 불복하고 1992년 10월 무력투쟁을 개시하여 분쟁은 냉전의 종식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분쟁이 지속되는 것은 석유생산지역을 장악한 정부군과 다이아몬드생산지역을 장악한 반군이 자체적으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엔은 앙골라완전독립연맹에 대한 금수조치를 결의하는 한편, 중재에 나서 1993년 11월부터 협상이 시작되어 1994년 10월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에서 제2차 평화협정에 합의하였습니다. 평화협정의 요지는 1) 앙골라완전독립연맹에 부통령 및 4개 각료직, 7개 차관직 배분, 2) 앙골라완전독립연맹군 해체 및 방위군 편입, 3) 휴전 감시 공동위원회 설치, 4) 대통령 선거 재실시 등이었습니다. 유엔은 평화협정의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우리나라도 파병했던 3차 유엔앙골라진상조사단(UNAVEMⅢ)을 보냈습니다.

이번 평화유지군은 당시 분쟁이 극에 달했던 르완다에는 국제사회가 냉소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인도, 파키스탄, 브라질, 우루과이, 짐바브웨, 루마니아, 영국, 남아공 등이 석유 등 부존 자원이 풍부한 앙골라의 전후 개발을 의식하여 참여에 적극적인 의사를 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협상은 또 결렬되었습니다. 루사카평화협정에 따라 앙골라완전독립연맹측이 정부와 내각에 참여하고 군대는 무기반납과 함께 정부군에 편입되는 등 1997년 양측이 모두 참여하는 단일 거국 정부를 출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반군측 지도자인 사빔비는 다시 반정부투쟁을 개시하여 게릴라전은 최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남부 및 동부 다이아몬드생산지역에 대한 정부군과 반군간의 쟁탈전이 계속되었는데, 2002년 반군측 지도자였던 사빔비가 교전 중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반군과의 협정이 다시 체결되어 27년만에 분쟁은 비로소 사그러들고 있습니다.


침묵의 살인자 대인지뢰

앙골라에서는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이래 계속된 분쟁으로 최소한 50만명이 사망하고 4백만명 이상의 난민과 2백5십만명의 국내유량민(internally displaced people)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재 우기임에도 불구하고 잠비아, 콩고민주공화국으로부터의 난민들이 2003년 3월 현재 만명이 돌아왔습니다. 앙골라 정부발표에 의하면 작년까지 130,000명의 난민들이, 그리고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에 따르면, 97,000명의 난민들의 귀환을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이들 난민들의 귀향과 재정착은 식수와 안전한 위생의 결여, 식량부족, 질병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러한 어려움 중에서 대인지뢰의 문제는 심각합니다. 앙골라의 경우 인구 1천만명에 지뢰는 1천 5백만개로 지뢰가 사람 숫자보다 많습니다. 장작을 구하던 사람들, 밭을 일구던 사람들, 호기심에 만져본 어린이들이 계속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International Campaign to Ban Landmines)의 2002년 보고서에 따르면, 무려 76종의 지뢰가 매설된 것으로 알려진 앙골라는 2001년에 2,232개 지역이 지뢰 및 불발탄 지역으로 집계되었고, 다행히 2002년 평화협정이후 더 이상 새로운 지뢰매설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지뢰제거작업의 비용은 2001년에 비해 전체적으로 15% 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스웨던 27%, 노르웨이 25%, 미국 52% 등의 비용삭감에 따른 것입니다.

또 하나 분쟁의 후유증으로 인구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어린이의 고통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1996년 유엔 아동보고서에 의하면 앙골라에서 한해동안 전체 어린이의 66%가 살인장면을, 91%가 시체를, 67%가 고문장면을 목격한 것으로 밝혀 충격을 주었습니다.

현재 미국의 이라크침략으로 모든 관심이 그곳에 집중된 상황에서 2003년 4월 평화협정 1주년 기념에 맞추어 유니세프는 이와 같은 어린이의 상황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였습니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5,000여 학교와 전체 병원의 60%가 분쟁기간동안 파괴되었고, 백만이 넘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으며, 앙골라 어린이의 45%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냉전체제 속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을 치루었던 앙골라.

인간을 파괴하면서 얻는 그 어떤 이념과 가치도 허구이며, 위선인 것임을 우리는 앙골라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인류가 추구해야할 가치는 바로 인간존엄 그 자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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