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칼럼(pd) 2005-08-11   747

<안국동窓> 정의를 들여다보는 창(窓)

흔히 “장님 코끼리 만지기”는 인간의 지식과 판단의 오류 가능성을 지적하기 위한 비유의 하나로 곧잘 활용된다. 모두가 남의 눈이 아닌 내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정의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의 눈으로 정의를 볼 것인가? 과연 정부는 어떤 창으로 정의를 보고 있는가? 정치가는, 기업가는 과연 어떤 창으로 정의를 보고 있는가?

첫 번째 창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강조하는 공리주의의 창. 이것은 밀(J. S. Mill)을 선두로 하여 이미 2세기 이상을 지배하여 왔던 정의를 바라보는 창이다.

공리주의 입장에서, “옳은 것(행위)”은 산출되는 행복의 양에 의하여 결정되며, 행복은 옳은 것(행위)에 앞서게 되며, 옳은 것(행위)은 늘 행복에 의존한다. 때문에 공리주의에선 개인의 권리나 요구가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고려에 의하여 제한된다. 더 큰 선이 산출만 된다면, 개인의 권리나 요구는 삭제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공리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정의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회의 공리성에 의존한다. 전체적으로 최대선을 추구하는 행위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정의로운 것이다. 그래서 밀은 “공리성에 기초하지 않은 정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극단적인 주장까지 하였다.

이러한 입장들에 대해서 롤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잘 되게 하기 위하여 특정한 일부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편리한 발상이지만, 정의롭다고 볼 수는 없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명시적으로 순수한 공리주의의 창을 통해 정의를 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비용을 따지고 효과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리주의라는 창을 통해 정의를 보고, 정의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시장주의를 강조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창이 바로 공리주의라는 창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부분 공리주의라는 이 창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또 그 창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두 번째 창 “공정으로서의 정의”

롤즈(J. Rawls)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창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고자 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창의 하나이다. 롤즈의 경우, 공리주의에 대해서 비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공리주의적 관점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며, 이전의 공리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약점을 피하는 가운데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롤즈는 개인을 존중하면서, 타인들을 위해서 개인의 권리를 희생시키지 않는 그럴듯한 이론체계를 정립하였다. 그러면서도 소위 배분적 정의에 대한 근본적 의사결정을 이론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롤즈의 정의론은 수학과 같아서 한 마디로 풀어내기는 쉽지 않지만, 아주 간략화하면 (적어도 롤즈의 입장에서는) 정의는 “공정한 절차”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즉 공정한 상황 하에서 정의로운 원리가 선택되어야 한다. 롤즈의 정의론에는 계약, 의무, 자율적 선택과 같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루소와 칸트를 적절히 혼합해 놓은 듯한 인상도 든다.

정의는 공정한 선택의 결과이어야 하며, 천부적 재능이나 지위와 같은 우연의 요소들이 불공정하게 작용하는 쪽으로 이용되어서는 않된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선택이 이루어지는 상황은(롤즈는 이것을 각 당사자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원초적 상태라고 함) 어떠한 것인가? 롤즈는 원초상태의 대표자들이 그 유명한 “무지의 베일” 뒤에서 하게 되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무지의 베일이란 말 그대로 (정의라는) 원리를 선택하는 당사자들이 계약과정을 불공정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의미이다.

롤즈가 가정한 당사자들은 서로 이해관계가 없으며, 시기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가정들하에서 계약이 진행된다. 롤즈는 원초 상태의 당사자들은 한 사람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원리를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공리주의의 원리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공리주의와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롤즈는 “격차원리”를 활용하여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위를 향상시키는 경우에 예외적인 불평등한 배분을 허용한다.(소위 말하는 maximin이다) 롤즈는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그 가운데 불리한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면서 정의로운 배분의 불평등을 제한적으로 인정한다. 롤즈는 다분히 거시적 입장에서 정의론을 펼치고 있다. 밀이 정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허용하였다면, 롤즈는 불리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한다.(이것이 아마도 많은 공리주의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며, 반면 정의론자들을 의기양양하게 만드는 부분일 것이다).

롤즈의 주장은 매우 매력적이지만, 또 한편에서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 어렵다는 것은 다분히 현실적이지 못함을 뜻한다. 예를 들어서 핵심어인 “원초상태”는 근본적으로 중립적일 수 없다는 비판은 이미 오래된 것이며, 타자의 자유를 허용하기 위한 부담을 개인 스스로가 기꺼이 져야 한다는 “평등한 자유”의 어려움, 롤즈의 주장을 공격하기 어렵게 만드는 “격차원리”도 결국 “불리한 사람”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면 적용 자체가 근본적으로 어려워진다는 문제 등 롤즈 주장의 강력함만큼이나 비판도 다양하다. 강하기 때문에 그 만큼 비판도 많다고 볼 수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롤즈의 정의를 바라보는 창은 공리주의의 창과 비교하여 “정의”라는 사회 구성의 공통원리를 찾는데 유리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불리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는 장점은 매우 강력하다. 롤즈는 자신만의 창을 만들어서 정의를 본 것이며, 그 결과로서 소위 “자유주의 국가”를 옹호하게 된다. 롤즈는 “계약”이라는 창을 통하여 “배분적 정의”를 보았으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정부의 “자애로운” 간섭은 허용된다.

세 번째 창 “정의란 공정한 교환, 절차의 문제”

노직(R, Nozick)의 입장에서 롤즈의 주장은 썩 기분이 내키는 것은 아니다. 롤즈의 주장대로라면, 사회구조는 불리한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만들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인데, 노직은 이것을 싫어한 것이다. 노직은 롤즈를 반박하는 창을 통해 정의를 조망하였다.

무엇보다도 노직은 사기업과 최소국가를 옹호하였다. 국가는 오직 최소해져야만 정당하다고 보았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칸티안적 관점이 작용하고 있다. 즉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개인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며 자연이다. 때문에 어떠한 것도 개인의 권리, 즉 자연적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도 타자를 위해서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국가도 예외일수는 없다. 때문에 일견 무정부주의자적 관점과 흡사하다. 노직이 말하는 최소국가는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전제하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습으로서, 타자의 자발성에 기초하고 있다. 국가는 기본적인 개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않된다. 최소국가만이 정당한 국가이다.

또한 국가는 재화를 재배분할 권리도 없다(배분적 정의의 권한 부재). 노직에 따르면, 사회 내에서의 재화의 배분은 국가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개인들 사이의 교환의 결과일 뿐이다. 어떠한 유형의 재분배도 사람들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침해한다. 정의란 “공정한 교환”이기 때문이다,

노직은 칸티안적 권리에 근거하여 침해에 대한 저항권, 행동과 의사결정의 자유로운 선택권, 사적인 소유의 권리 등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는 이러한 권리에 대한 보호와 권리침해에 대한 보상을 보증하는 한에 있어서 정당성 갖는다. 롤즈가 분배적 정의를 역설하였다면, 노직은 배분적 정의에서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였다. 노직에게 있어서 정의란 공정한 교환, 절차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지배와 착취가 현실 그 자체인 한, 노직이 생각하는 교환은 늘 정당성을 잃곤 한다. 무엇보다도 노직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불평등함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다. 복지 증진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때문에 노직은 늘 롤즈와 불편한 관계에 있다. 노직은 공정한 절차에 대한 관심으로, 결과를 좀더 중요하게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노직의 주장이 갖는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의 자유주의, 정의의 원천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또한 자유와 평등이 양립하기 매우 어려운 가치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의를 보다 근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용기를 주고 있다.

다양한 현실, 다양한 창, 그리고 다양한 정의

단 3개의 창을 통해서 정의를 어떻게 볼 수 있는지 정말로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앞의 논의들을 더 단순하게 정리하면, 밀과 같은 공리주의자들은 공리의 극대화를, 롤즈는 불리한 처지의 사람들을 유리하게 하는 것을, 노직은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을 정의라고 보았다. 다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떤 창을 선택하여 보느냐에 따라서 정의가 다양한 모습으로 비쳐짐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늘 일정한 창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창의 통하여 재단(裁斷)된 세상을 본다. 세상만이 아니라 정의조차도 재단하여 본다. 현실은, 정의는 창 너머에 늘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데, 우리는 늘 일정하게 재단하여 보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또 늘 창을 통하여 세상을, 정의를 보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유일한 창만이, 유일한 현실만이, 유일한 정의만이 존재하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다. 아무리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하여 열심히 창을 닦아도 창은 창일뿐이다. 창이 곧 정의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창은 세상을, 정의를 우리도 모르게 왜곡시키는 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왜곡하고 정의를 왜곡한다 할지라도 그 창을 내 스스로 만들어 가질 수 있으면 그나마 나으련만, 대부분은 그러하질 못하다. 대개 “누군가가” 만들어준 창을 사용한다. 창을 사용하기는 하는데 누가 만들어준 창인 지도 모르고, 어떤 색깔의 창인지도 모르고, 어떤 모양의 창인지도 모르고 사용하고 있다.

많은 것들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정부의 활동이 그렇고, 국회의원의 입법이 그렇고, 언론의 보도가 그렇고, 시민단체의 비판이 그렇다. 정의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의는 어떠한 모습인가? 현실을 지배하는 정의는 혹 권력가가 가진 창을 통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구태여 왈쩌의 다원적 평등을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의는 다원적임에도, 혹 특정한 정의가 획일적으로 강요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특정한 창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리 그럴듯한 모습의 정의라 할지라도, 획일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이름의 전체주의일 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현실들이 존재하고 있다. 수많은 창들이 있다. 그리고 수 많은 정의들이 있다. 하나의 정의가 아닌 수많은 정의들이 존재하고 있다. 가난한 자의 현실이 부자의 현실이 될 수 없듯이, 가난한 자의 정의가 부자의 정의가 될 수 없다.

최근 국정원의 X-화일을 두고 온갖 말들과 해법들이 난무한다. 종잡기 어려울 정도이다. 어떠한 것이 선택되든, 분명 정의의 이름으로 해법이 선택될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된 정의라는 기준은 지극히 부분적인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정의가 아니라 불균등하게 적용되는 정의이며, 모든 이가 이익을 누리는 정의가 아니라 일부만이 이익을 누리는 정의이며, 누군가에게는 정의가 아니라 “부정의(不正義)”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의는 분명히 듣기 좋은, 사용하기 좋은 말이지만, 늘 양날을 가진 칼과 같은 존재이다.

윤태범 (방송대 행정학과 교수, 맑은사회만들기본부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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